소설리스트

농사짓는 플레이어-186화 (186/239)

< 167화 CF촬영 >

갑작스런 외근이 잡혔다.

평상시처럼 서류와 씨름하고 있던 나한테 ‘그룹 전략실’의 사람이 찾아와서 외근 업무를 전달해주고 간 것이다.

그룹 전략실이라면 나를 회장님께 픽업해가는 오 팀장이 있는 부서다.

그룹의 비밀스런 일을 처리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단 사원인 나한테 일을 주고가자, 다른 동료들이 모두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외근 업무 내용을 확인했던 나는 회사 차로 태워준다는 전략실 사람을 따라 헐레벌떡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BMW에 탄 나는 전략실 사람이 건네준 업무서류의 내용을 떠올렸다.

‘가상현실 사업 전략 협의 및 CF 촬영을 위한 자회사 이터널 방문’

거창한 제목의 서류였는데, 한마디로 나더러 CF를 찍으러 게임회사 이터널에 다녀오란 것이었다.

물론 서류의 다른 내용들도 눈에 띄었다.

가시화된 가상현실 엔터테인먼트의 예상 연간 수익 표부터 시작해서 수익구조 방식까지 여러 가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가상현실에서 심심풀이로 하고 있는 몇 가지의 장사나 사업들을 전문가가 분석한 것 같은 흔적이 역력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결국 나를 데려가고 있는 이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뭐 좀 여쭤 봐도 괜찮습니까?”

“말씀하십시오, VIP님.”

“······.”

잠깐 할 말을 잃었다.

VIP라는 호칭이 좀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당황하는 것과는 달리 그 사람은 자주 그런 호칭을 붙이는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나는 당혹감을 얼굴에서 지우곤 그에게 의문점을 물어보았다.

“이거 혹시······ 전략실에서 기획한 겁니까?”

“예, 하지만 저희 실무팀이 아니라 미래전략팀에서 VIP님의 사업구상을 체계화해서 정리한 겁니다.”

미래전략팀, 말로만 듣던 그룹의 엘리트 조직이다.

회장님 직속의 씽크탱크인 그들은 돈 냄새 나는 것이라면 뭐든 찾아 사냥한다고 해서 ‘호랑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물론 자잘한 돈벌이가 아닌, 그룹차원에서 할 만한 신흥 프로젝트나 큰 규모의 사업을 주도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상현실 사업을 검토했단 건······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일전에도 회장님이 관심을 보이셨고, 곧 회장님이 직접 그들에게 기획을 짜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도착했습니다, VIP님.”

“예······ 그, 그럼 일단 이터널사의 사업부를 먼저······.”

“서류절차와 전략협의는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VIP님은 곧바로 촬영을 하러 가시면 됩니다.”

“네? 촬영이요? 그······ CF 말인가요?”

“예,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으니 이터널 사에서 제공한 장소에서 촬영하시면 됩니다. 안내해드리죠.”

“가, 같이 갑시다.”

전략실 사람을 헐레벌떡 따라가 이터널 사의 본사로 들어갔다.

나는 CF 촬영을 왜 게임회사에서 한다는 것일까, 조금은 의문을 가졌지만 짐작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혹시 가상현실에서 촬영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예상은 얼추 맞아떨어졌다.

전략실 사람이 안내해준 곳은 이터널 사의 캡슐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어, 혹시······.”

“미나? 아니······ 미나씨?”

미나였다.

현실에선 처음 보는 모습.

가상현실에서의 모습과 똑같았다.

오히려 현실이 더 화사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옷이나 화장 덕분인 것 같다.

그녀는 그곳의 CF 감독과 함께 있던 것이다.

“두 분, 현실에서 만나시는 건 처음이었나요? 넷튜브 채널에선 항상 붙어다니시길래 연인이신 줄 알았는데.”

"어머, 연인이라······ 그렇게 보였나요? 호호호······.“

“······.”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CF감독의 말에 미나는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이며 웃었다.

그러면서 나를 힐끗힐끗 바라보는데, 그럴때마다 나는 가슴이 조금 뛰는 기분이었다.

“그럼 저는 업무를 보러 다녀오겠습니다.”

“아, 네. 수고하십시오.”

전략실 사람은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곤 떠나버렸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히 미나를 바라보았다.

좀 전에 그녀를 미나라고 부르려다가 씨를 붙여야 했다.

게임에선 친근하게 반말을 했었지만, 현실에선 그러는 것이 좀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미나도 비슷했는지 나를 오빠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하긴, 상호관계에 있어서 게임과 현실는 엄연히 접근성에 차이가 있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CF감독이 의욕을 보이며 말했다.

“자, 미나씨에겐 이미 설명해드렸는데, 공진씨는 바삐 오셔서 잘 모르죠?”

“서류에 적힌 것은 봤습니다. 저를 CF배우로 쓴다는 내용인데, 당최 그게 무슨 소린지······.”

“적힌 그대로입니다. 공진씨를 CF배우로 쓰는 거죠.”

“저는 전문 배우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결정이 난거죠?”

“하하, 그야 여러 사정이 있죠. 우선 만 하루만에 결정 난 일이라, 긴급히 연예인을 섭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룹에서도 인기 연예인을 쓰고 싶어 했지만 스케줄이 맞는 사람이 도저히 없었죠. 그렇다고 무명 연예인을 아무나 쓸 순 없었고요. 그러다가 떠올린 아이디어가, 아예 이미 홍보영상을 찍은 두 분을 배우로 해서 우선 영상을 찍자는 거였습니다. 일단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서 채택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감독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하루만에 난 결정.

CF를 상당히 급하게 찍는 느낌이다.

나는 그 점에 대해 감독에게 물어보았는데,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맞죠, 보통은 이렇게 CF를 찍진 않습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이번 CF는 대단히 도전적인 겁니다. 최초로 가상현실 게임 속에서 CF를 찍을 거니까요.”

“역시 그렇군요.”

“그래서 약간 선행적인 실험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후속 CF는 정식으로 유명 연예인을 섭외해서 계획적으로 촬영할 생각이고요.”

“음, 납득이 갑니다.”

“이해력이 좋으시군요. 그리고 또 하나 이유를 덧붙이자면 장미나씨는 연예인 지망생이신데다가 미나씨나 공진씨 모두 외모가 출중하셔서 그렇습니다. 하하.”

“하하, 미나······씨는 몰라도 제가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하지만 농담이라도 칭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면서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은 껄껄 웃었고, 미나도 호호 웃었다.

“이런,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시간이 좀 쫓겨서요. 서둘러 접속해서 일을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감독과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 되었다.

미나는 자신의 캡슐로 향하면서 살짝 미소와 윙크를 했고, 나는 조금 얼굴이 빨갛게 된 상태로 내게 배정된 캡슐에 들어갔다.

나는 곧 <마일스톤>에 접속했다.

멍멍멍!

월월월!

접속한 위치는 당연히 나의 농장, 가장 먼저 실버와 골드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으니, 미나가 곧이어서 접속했다.

“오빠!”

게임에 접속하자, 곧바로 오빠라고 친근하게 나를 부르는 미나였다.

“아, 안녕. 미나야.”

“흐응, 게임에선 역시 그렇게 불러주네요.”

“너도 게임에서만 오빠라고 불러주는구나.”

약간 놀리는 듯한 미나의 말에, 살짝 반박하듯 말했다.

미나도 나도 실실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야······ 처음이었으니까요. 현실에서 만나는 건.”

“응, 미나는 실물이 더 예쁘던데.”

“어머 참, 오빠는 가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니까요!”

“앗, 미안.”

“미안할 필요는 없고요!”

으음, 미나의 반응에 대응하기 힘들다.

확실히 나는 여심을 모른다.

“주인님, 농장에 침입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크르르르릉

월월월!

그때, 골렘이 다가와 그런 말을 했다.

실버가 경계하듯 한쪽 방향을 바라보며 맹렬히 짖고 있었다.

골든 리트리버인 골드는 경계심 없이 그쪽 울타리에 몰려든 사람들에게도 꼬리를 흔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침입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초보자 옷차림인 촬영 감독과 그의 스태프들이었다.

“골렘아, 저분들은 오늘 초대한 손님들이야.”

나는 골렘과 실버의 경계심을 풀어주었다.

그리곤 미나와 함께 감독에게로 다가갔다.

“이야, 정말 그림 같은 농장이군요. 이게 공진씨의 개인 농장입니까?”

“네, 이젠 농장만이 아니라 하펜 영지 전체가 제 것인 셈이지만요.”

“대단하군요. 영주가 된다는 거 쉽지 않을 텐데 말이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보다 이제 촬영은 어떻게 하는 거죠?”

“아, 촬영은 저기 촬영감독······ 야! 동물만지면서 놀지말고 촬영 준비나 해! 아차차, 미안합니다. 어쨌든 촬영팀이 책임지고 찍어드릴 겁니다. 저희 각본대로 자연스럽게 연기만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CF감독은 그렇게 말하곤 주변을 기웃거렸다.

뭔가 찾는 모양인데, 뭔가를 못 찾는 모양이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아 그게······ 그 애들은 어딨습니까?”

“누구 말씀이시죠?”

“그 뭐시냐······ 그래, 정령들 말이에요. 불강아지랑 러시안 블루 닮은 고양이에, 바람으로 이루어진 독수리하고, 귀여운 흙거북이 말이에요.”

“아, 그 아이들은 제가 소환해야 합니다.”

“그럼 소환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게, 미나씨와 공진씨의 채널 영상에서 그 아이들도 나왔는데, 은근히 그 아이들이 귀엽다는 반응이 많아서 말이죠. 꼭 촬영에 포함시키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감독의 요청에 따라 정령들을 부르려 했다.

잠깐, 그러고보니······.

“감독님, 그런데 정령들을 상급 정령으로 소환해드릴까요?”

“제가 이 게임을 잘 몰라서 그런데, 지금 정령들은 무슨 정령이죠?”

“중급 정령들입니다.”

“상급 정령으로 소환하면 모습이 바뀌나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저도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요.”

“그럼 중급인 상태로 부탁드립니다. 상급 정령이라고 하니 어쩐지 멋진 느낌인데요. 지금 잡고 싶은 컨셉은 귀여운 컨셉이거든요.”

“알겠습니다.”

세부사항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정령들을 중급 정령들로 소환했다.

왈왈왈!

냐오옹

삐이익

브어엉

정령 친구들이 화사한 빛과 함께 소환되었다.

촬영팀으로 보이는 이들이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찍는 듯했다.

“역시 귀엽군요. 그림이 잘 나올 것 같습니다.”

“예, 그럼 이제 뭘 하면 되죠?”

“여러가지······ 그러니까 농사나 여러 활동을 하는 모습을 찍을 겁니다. 그러니까 생활 스킬이라던가요? 특별히 그것들을 찍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보통 게임 광고는 전투 영상으로 멋지게 찍는 컨셉으로 나가는데, 이번 건은 신선한 컨셉이라 저도 의욕이 넘치네요.”

감독은 그렇게 말하면서 콧김을 내뿜었다.

정말로 의욕에 불타는 모습이다.

“그럼 우선 동물들과 어울리는 모습으로······ 저 아이들하고 같이 찍죠. 그 채널영상에서 목축을 홍보하신 것처럼 말이에요.”

감독의 요청이 이어졌고, 나와 미나는 곧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 167화 CF촬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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