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12일차 로그아웃 >
무기상점에서 경매를 마친 우리들은 마을 한편의 잔디밭에 모여 앉아 잠시 쉬었다.
그냥 쉬기 뭣해서 모두에게 과일주스를 돌렸다.
지혜와 미나, 시화는 물론 블루스 노인과 그리고 과묵한 드래곤씨까지 각자 취향에 맞는 과일 주스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휴식을 취했다.
“자네 출근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할게 남았나?”
“로그아웃하기 전에 촌장을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촌장을?”
“예, 마을 상단을 만드는 일이랑 보석상을 짓는 일에 관해서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대충 알겠구먼, 또 촌장에게 사람 소개를 해달라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끌끌, 알겠네. 근면한 모습이 보기 좋군.”
“저는 그냥 게임을 즐길 뿐입니다.”
블루스 노인의 마지막 말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고, 블루스 노인도 싱긋 웃었다.
이번엔 반대로 내가 블루스 노인에게 물어보았다.
“어르신께선 아직 로그아웃하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음, 오늘은 좀 늦게까지 해볼 생각이라서. 그래······ 나도 자네 땅을 좀 임대해볼 생각이라네.”
“농장을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어르신이라면 임대가 아니라 그냥 드릴 수도 있고, 또 더 많이 드릴수도 있는데······.”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내가 경제인으로써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고는 말 못하지만 받지 않아도 될 특혜는 바라지도 않는다네. 그냥 소박하게 심심풀이로 해볼 생각이야. 농사 말일세.”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허허, 그러겠네.”
블루스 노인과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시화는 이제 레이드 시간이 되었다며 텔레포트를 하기 위해 마법사 길드로 향했고, 블루스 노인과 드래곤씨는 부동산 사무소에서 일행과 헤어졌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그대로 촌장댁에 향했다.
나는 촌장댁에 도착하여 그의 문을 두드렸다.
“으흠, 누군가? 어험, 영주님 아니오!”
“안녕하십니까, 촌장님.”
“이 늙은이를 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게······ 짐작하실 것 같지만 이번에도 촌장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제 도움이라고 하면 또 사람을 찾는 것 말씀이시군요. 어쩐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촌장은 우리들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해주었다.
나와 지혜 미나가 앉을 의자를 마련해주곤, 곧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자, 오늘은 어떤 사람이 필요합니까?”
“그게······ 우선은 마을에 상단을 지을 생각인데, 당연히 상단 업무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상인이라든지 아니면 상업 경험이 있다든지.”
“음, 돈 좀 만질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몇 있지요. 적당한 자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까?”
상단 문제는 그렇게 해결된 듯했고, 나는 다음 용건을 말했다.
“이번에 제가 보석세공을 배웠습니다만.”
“보석이라······ 우리 마을과는 영 관계가 없는 일이군요.”
“이제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보석 광산이 있는 노슬론 마을과 협약을 맺었습니다. 그쪽에 투자도 좀 했고, 상단을 이용해 보석을 유통시킬 수 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보석은 보석홈을 이용해 수요를 좀 만들 수 있죠. 기본적으로 사치품이기도 하지만요.”
“맞습니다. 그것 외에도 보석세공은 조각 같은 예술에도 쓰이죠.”
“조각이요?”
“예, 조각도 스킬로 있습니다. 굳이 예술 스킬로 분류하긴 하지만 사실은 생활 스킬의 하나죠. 그 외에도 미술이나 노래, 연주, 춤, 미용 등의 생활 기술들도 있습니다.”
촌장에게서 의외의 정보를 얻었다.
하긴, 유명한 게임 소설에서도 조각이 다뤄졌는데, 이 <마일스톤>에서도 없으리란 법은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촌장이 이어서 말했다.
“아무래도 영주님은 보석세공 또한 활성화시키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익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아쉽지만 우리 마을에 보석세공에 조예가 깊은 이는 없는 걸로 압니다. 제가 아는 한은 말이죠.”
“그렇습니까······.”
다소 아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선 보석상 같은 건물을 만들어줘도 그곳을 운영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촌장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선 구할 수 있지요. 바로 각 국의 수도 정도라면 그런 예술인이나 장인을 구할 수 있는 예술가 조합이 있을 겁니다.”
“예술가 조합이라······ 보석세공사는 그런 쪽에서 구해야하나 보군요.”
“예, 아무래도 조각의 일환이다 보니 말이죠.”
“그렇다면 수도로 가야할 텐데······ 저 같은 경우는 메이거스의 수도로 가야겠네요.”
“예, 아마 다른 곳은 껄끄럽겠죠. 특히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밀레스의 경우는 피하시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메이거스의 수도라······.”
“메이거스의 수도 이름은 매그너스입니다. 장대한 도시라는 의미죠.”
우리 마을에 메이거스의 대사가 온 적은 있지만, 내가 수도로 간 적은 없었다.
이번 기회에 가봐야할 것 같은데, 오늘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 하다.
내일 그런 일정을 잡기로 했다.
“흠,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보도록 하죠.”
“예, 영주님. 헌데 제가 오늘 들은 일이 좀 있습니다. 아직 소문이긴 하지만 영주님께서도 알아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무슨 일이죠?”
“이웃 중립 마을이 우리의 영향력을 흠모해 영주님에게 합류하고 싶어 한다는 소문입니다.”
“아······ 그 일 말이군요. 저도 조금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일전에 골렘이 했던 말이기도 했다.
조만간 다른 중립 영지에 또 다른 영주가 생기지 않는 한 내 영향력 때문에 다른 영지 또한 내 영지가 될 수 있단 것이다.
“그렇다면 영주님, 마을 회관을 지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직 우리 마을엔 마을 회관도 없습니다. 촌장으로써 좀 부끄러운 일이군요.”
“마을 회관은 어떤 역할을 하는 건물이죠?”
“마을 사람들과 영주님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민원과 안건을 모아주고, 타 마을이나 영지와 외교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만약 영주님이 만드시고자 하신다면 마을 회관을 관리할 담당자들은 제가 섭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죠. 안할 이유가 없네요.”
나는 즉답했다.
말 그대로 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답하자, 촌장이 빙그레 웃었다.
“회관이 지어지면 더 이상 저에게 의존하실 필요도 없으실 겁니다. 회관의 직원들이 제 후임이 되어서 적당한 인물들을 섭외해줄 테니까요. 저로썬 조금 아쉬운 일이기도 하군요.”
“그렇다면 촌장님을 마을회관의 사무국장으로 임명해드려도 좋습니까?”
“하하, 늙은이는 그만 놓아주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촌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나도 환하게 웃었다.
만약 내가 세종대왕님이라면 이런 유능한 사람의 은퇴 청원은 ‘아니 된다.’하고 계속 일하게 했겠지만, 나는 세종대왕님이 아니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촌장과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 되었고, 우리들은 촌장댁을 나왔다.
“그럼 오빠, 이젠 건물을 지을 생각이시죠?”
“응 맞아. 상단이 일할 건물이랑 마을 회관을 지어야지.”
나는 미나에게 그렇게 말하곤, 적당한 터를 찾으러 갔다.
두 건물은 굳이 광장에 지을 필요는 없었다.
마을회관의 경우 접근성이 좀 떨어져도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면 찾아올 행정건물이고, 상단이 일할 건물은 아예 손님이나 민원인이 찾아올 일은 없으니 말이다.
곧 마을의 적당한 공터를 찾아선 그곳에서 영지건설 카탈로그를 검색했다.
[영지 건설, 석재 상단사무소
마을의 상단이 일할 수 있는 사무소. 현실의 상회라면 물품을 놔둘 창고가 필요하겠지만, 인벤토리가 존재하는 게임에선 창고가 필요 없다. 따라서 외관적으로는 보통의 집과 별 차이는 없다. 다만 일하는 상인의 기분을 좋아지게 해주는 정도는 될지도?
필요자금 : 30만 골드
필요조건 : 7,000이상의 번영도]
[영지 건설, 마을회관
마을의 잡다한 민원과 마을 부흥에 효과적일 수 있는 안건등을 접수할 수 있는 건물. 그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인재 영입을 하거나 타 영지와의 외교사안을 진행시킬 때 유용한 건물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정식으로 ‘공무원’인 셈이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나태함이나 부패는 없으므로 걱정하지 말자.
필요자금 : 90만 골드
필요조건 : 8,000이상의 번영도]
두 가지 건물 모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즉시 건설에 들어갔다
태산이가 열심히 ‘브어어엉’거리면서 돌을 만들어주었기에 재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망치질은 어깨 빠질 듯이 해야 했지만 말이다.
1시간 정도 하고 나니, 두 건물 모두 만들 수 있었다.
“으하, 끝났다.”
“수고하셨어요, 오빠.”
미나가 그렇게 말하면서 박수를 쳤고, 지혜도 조용히 박수를 쳤다.
그런 뒤론 나는 그녀들과 함께 농장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출근을 준비하기 위해 로그아웃을 할 때였다.
내가 로그아웃하겠다고 하니, 그녀들도 그러기로 했다.
“지혜야 미나야, 그리고 모두들 내일보자!”
오늘도 알찬 하루가 지나갔다.
* * *
공진이 로그아웃 한 뒤, 블루스 노인은 하펜 마을 근처 강가의 땅에 200㎡짜리 땅을 임대했다.
그와 ‘드래곤’이란 이름의 사내와 함께 임대한 땅이다.
공진에겐 소박하게 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땅만 소박하게 했을 뿐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주어 제법 멋들어진 농장도 짓고, 소도 사고, 귀엽고 사나운 경비견 한 쌍도 샀다.
무엇보다 그 두 사람은 ‘돈이 남아돌면 사라’는 잡화점 상인의 말대로 ‘고급 낚싯대’를 사서 강가에서 낚시를 했다.
“용재야.”
블루스 노인은 그의 본명을 불렀다.
공진이 드래곤씨라고 부르는 그의 정체는 바로 이용재, 공진이 다니는 그룹의 회장이며 블루스 노인의 아들이었다.
“재밌지 않느냐? 사이버 슬로우 라이프란 것도.”
“예, 아버지. 그렇군요.”
“특히 낚시 하는 맛이 있구나, 네가 정령술을 배우니 물고기가 더 잘 낚이고.”
“맞습니다.”
이용재 회장은 갓 시작한 초보자이지만 주저할 것 없이 정령술을 배웠다.
그는 딱히 강한 직업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인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공진의 홍보 영상의 댓글로 알아낸 하나의 정보 때문이기도 했다.
‘정령들은 술사가 바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는 정령술을 배우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소환한 물의 정령은 지혜를 약간 닮아있었다.
정확히는 지혜의 어머니, 그러니까 사별한 이용재 회장의 아내와 똑같았다.
블루스 노인은 아들이 소환한 물의 정령을 보고 애틋하면서도 아직 그도 아내를 잊지 못했다는 것에 딱한 마음도 들었다.
지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아내에게 무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표현이 서툴렀고, 그룹의 회장이란 자리에 압박당한 것에 가까웠다.
자신의 손녀가 그 점을 알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아들아, 그런데 왜 지혜에게도 정체를 밝히지 않는 거냐?”
“그게······ 지혜에게 제가 게임을 하고 있단 것을 알리면 조금······.”
“허허허, 부끄럽단 것이냐? 쯧쯧. 시대가 바뀌었거늘, 어째서 나이 든 나보다 더 고리타분할꼬.”
“크흠······.”
아버지의 말에 헛기침 밖에 하지 못하는 이용재 회장이었다.
“여하튼 오늘 소감은 어땠느냐? 이 사업, 네가 보기에도 할만하겠어?”
“보기보다······ 꽤 좋습니다, 아버지. 이미 공진군과 이것저것 이야기 나눴지만요.”
“그렇다니 좋구나. 오늘 당장 CF를 찍을 준비 끝나도록 잘 진행해봐.”
“그러겠습니다. 아버지. 앗! 또 입질이닷!”
“······.”
일 얘기하다가도 또 입질이 오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이용재 회장이었다.
블루스 노인은 그런 그의 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보았다.
< 166화 12일차 로그아웃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