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플레이어-166화 (166/239)

< 147화 9일차 선술집 >

테리우스씨는 자진해서 몰려온 사람들을 상대로 토지계약을 맡아주었다.

너무 많은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만 테리우스씨는 걱정말라고 했다.

촌장이 보내준 NPC에게 일만 가르쳐주면 그냥 맡겨놔도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농장으로 돌아와 선술집을 열 준비를 하고, 선술집을 열었는데 얼마지 않아 테리우스씨도 합류했다.

미성년자인 지혜만 빼고 모두 맥주나 위스키를 들고 건배를 했다.

“하하, 자네도 이제 진정한 땅 부자가 됐군.”

“가상현실의 땅 부자인걸요, 어르신.”

“이 친구야, 지금 시대에 가상현실인 게 중요한 것 같나? 몇몇 경영인이 착각에 빠지기 쉬운 일이 하나 있지. 현물경제가 아니면 돈이 안 되는 줄 아는 이들이 있는 거야. 가상현실이 아니어도 실체가 모호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다양하게 있었다네. 꼭 클럽 운영하고, 걸그룹 만들어야 엔터테인먼트인 줄 아는가? 고작 스마트폰으로 보는 소설 플랫폼의 연매출이 얼마인줄 아나? 그런 것 돈을 버는데, 가상현실은 오죽하겠어? 자네는 그 가상현실에서 큰 기회를 마련한 거야.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블루스 어르신은 뭔가 심오한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게임은 언제나 남이 보기엔 ‘저런 거에 돈을 왜 써?’ ‘저런 것이 돈이 돼?’ 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국내 게임 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했던 2000년때부터 2050년대인 지금까지 그랬으니 반백년을 이어온 편견이다.

그냥 게임도 아니고, 이처럼 가상현실이 만들어진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렇게 블루스 노인의 말에 납득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자부심을 가지기엔 제가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이번 일도 블루스 어르신께서 좋은 분을 소개해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이야 내가 소개해주었지만, 사업 구상은 자네가 했지 않나? 저렴한 임대료로 수요를 유인한다는 것은 욕심 많은 사람이면 하기 힘든 걸세. 자네의 장점은 욕심이 없어서 오히려 더 순수하게 손익을 따질 수 있단 점 같군.”

블루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위스키를 마셨다.

크으, 하고 숨을 토한 그는 곧 내게 다른 화제로 말했다.

“자네, 지금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는가?”

“잘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르침이라고 할 게 뭐있나. 그저 세상이 더 어렵게 돌아갈 거란 말일세. 물론 나같은 사람들. 돈으로 탑을 쌓은 사람들은 더더욱 살기 좋아지겠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 살기 어려워질 세상일세. 단적인 예가 뭔지 아는가?”

블루스 노인의 물음에 나는 잠깐 답을 알 것 같았다.

“혹시 AI(인공지능) 때문입니까?”

“허, 자네도 귀 닫고 살진 않나보군. 정답일세. 보다시피 인공지능의 발달이 눈에 띄게 좋아진 세상이야. 이 게임에서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지. 아니, 사람보다도 더 좋다네. 배신하지도 않고, 실수도 하지 않으며, 학습능력마저 뛰어나지. 그게 뭘 의미하겠나?”

“더 이상 사람을 쓸 이유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맞네, 사실 자네의 일자리도 얼마든지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게 된 시대지.”

블루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술을 다시 마셨다.

나는 이 대화가 무척이나 사이버펑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세상에는 더 이상 사이버펑크란 말이 공상만을 뜻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러다이트 법을 제정해서 강제로 AI의 공적사용을 제한했지. 기업의 반대가 있었지만, 몇몇 뜻 있는 정치인들이 일자리를 걱정하면서 법으로 막은 걸세. 나는 기업의 입장이었고, 그때 마찬가지로 반대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괜찮은 조치였다고 생각한다네. 만약 그 법을 제정하지 않고 사무직을 포함한 산업현장을 모두 인공지능으로 대체했다면 지금 자네도 일자리는 없었을 걸세.”

“다행인 일이로군요.”

“맞아, 하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일 거야. 결국 그 법 또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사라질 수 있으니. 알지 않은가? 사이온톨로지들이라고 했던가? 과학지상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의 지배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해줄 거라고 믿으니 말이야.”

“······.”

바쁜 사회인들이 주목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확실히 그것은 한동안 화두에 올랐던 일이었다.

과학의 발전이 인간을 진정 노동으로 해방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인간에게 필요한 노동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일까?

전자는 인공지능의 미래를 낙관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비관하는 것이다.

“만약에 인공지능이 상용화되는 날이 온다면······ 내 생각엔 결국 일자리는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될 거야.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빈곤해지겠지. 모순적이지 않나? 뭘 위한 인공지능이란 건가? 그런 시대에 사람은 무얼 하면서 돈을 돌게 해야 하지? 이건 나도 알 수가 없었네. 하지만 자넬 보니, 조금은 답을 알 것도 같군.”

“제가 뭔가 한 것이 있습니까?”

“바로 자네가 하는 일이 가상현실에서 일자리를 만드는 것 같아서 말일세. 혹시 그런 세상이 오면 사람들은 더 이상 현실에서 일자리를 찾기 힘드니, 가상현실에서 찾지 않을까 하고, 그런 생각이 든다네. 유희가 곧 일이 되고 일이 곧 유희가 되는 것이지.”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현실의 모든 인력 노동이 기계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기술 수준이면 꼭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법이 막고 있고, 돈의 문제로 안할 뿐이지. 뭐 물론 30년 전 정도였다면 그런 낙관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일세. 하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이런 가상현실 게임도 하는 시대지 않은가?”

“······.”

어느덧 블루스 노인의 말을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듣고 있었다.

그들 모두 진지하게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럴만하지, 미나는 직접적으로 연예인이란 직업 자체에 이미 인공지능과의 경쟁을 느끼고 있었고, 파티시에가 되고 싶다는 지혜 또한 어쩌면 좀 더 미래에는 기계와 인공지능과 경쟁해야할지 모른다.

물론 지혜는 재벌집 아가씨니까 그냥 취미로 빵을 구우면서도 살 수 있겠지만 말이다.

“허허, 내가 너무 무거운 말을 했나 보군. 아, 시화군이 오는구먼. 안녕한가, 시화군.”

그때 시화가 왔다.

생각해보면 이 변화하는 시대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사람은 시화가 아닌가 싶었다.

전문 프로게이머, 그에게 이 게임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일이니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블루스 어르신. 그리고 공진씨.”

시화는 블루스 노인과 나에게 인사하곤 미나와 지혜에게도 인사했다.

테리우스씨와는 초면인데, 통성명을 하곤 역시 인사를 나눴다.

“부동산 전문가시라고요?”

“예, 블루스 어르신의 소개로 공진씨를 도우러 왔습니다.”

“혹시 마을 쪽에 소란스런 일이 있던데, 그게······?”

“아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시화는 테리우스씨와 그런 대화를 나누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농장을 가지게 해서 농사 스킬을 배우도록 유도한다는 말이군요?”

“네, 계획대로 된다면 주당 50억 규모의 사업입니다. 물론 그건 순전히 계산상의 수치일 뿐이지만요. 아, 그래서 시화씨와 상의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죠?”

“저는 군신길드 소속이고, 이 영지로 인한 수입의 절반을 나누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뭐, 실제로 얼마나 벌게 될지는 모르지만 계약대로 수익을 나눠야죠.”

“아······.”

시화는 나의 말에 잠시 말을 잊은 듯했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50억을 반으로 나누면 25억.

일주일에 최대 25억의 이윤을 얻는다는 것은 그도 놀라게 만드는 것인 모양이다.

“제가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보상이 너무 큰 기분이군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군신길드가 없었으면 저는 영지를 뺏겼고, 이런 사업도 하지 못 했을 겁니다. 나라로치면 시화님과 군신길드는 국방력이고 저는 기업인 셈이죠. 국방력 없이 기업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쑥스러울 따름이군요. 여하튼 많은 수입을 올리면 제 스폰서가 좋아할 듯합니다.”

“혹시 스폰서라면······.”

나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슬쩍 블루스 노인을 바라보았다.

오늘 회장님을 뵈면서 시화의 스폰서가 우리 그룹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허허, 세상 참 좁지 않나? 여하튼 자네 덕에 그룹에도 돈이 들어온다면 우리 아들도 꽤나 좋아할 걸세.”

“그룹 규모에 비해선 푼돈일텐데요.”

“자네는 자신의 일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네. 세상 어느 사원이 회사에 억대 돈줄을 마련해주겠나? 그것도 주당 예상 수입이 25억······ 시화군의 게이머들과 나눠도 적어도 반 이상 건진다 하면 연간 규모는 어마어마할 걸세. 오히려 내 아들이 자네에게 절이라도 해야 할 것 같군.”

지긋이 웃으며 말씀하시는 블루스 노인이었고, 나도 피식 웃었다.

물론 블루스 노인의 말은 농담이다.

무슨 일이 있는들, 국내 재계순위 1위의 그룹을 이끄는 회장님이 내게 절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만큼의 돈이 되는 일이란 것 같다.

“아 참, 공진씨. 오늘은 강화석이랑 정수를 가져왔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아다만타이트와 몬스터 가죽도 가져왔죠. 가져가셔서 아이템을 만들어 보시겠습니까?”

“예, 며칠간 하지 않았으니 나쁠 것 없죠.”

어제 약속한대로 제작 재료를 가져 온 듯한 시화였다.

그런 말을 한 후, 시화는 술을 맛있게 들이켰다.

“오늘은 일 이야기만 하네요, 오빠.”

미나가 어쩐지 고혹적인 눈빛을 하면서 내게 말했다.

스탠드바 너머에서 서 있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보니 미나나 지혜와는 대화가 소홀해졌다.

“저기 오빠는 어떤 사람이 좋아요?”

“이상형 말하는 거야?”

“네.”

“딱히 없는데.”

“에이, 이상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흠······ 현실적이지 않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바라는 거라면 있긴 해.”

“뭐예요? 엄청 예쁜 사람이 이상형인 거예요?”

“하하,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뭔데요, 오빠의 이상형.”

미나가 집요하게 물어보았다.

나는 말하기 쑥스러웠는데, 뭐 까짓거 말하면 또 어떤가 싶었다.

“나랑 똑같은 사람.”

“네?”

“나와 같은 고민을 가졌고, 단점도 같고, 아픔도 같고, 그래서 날 전적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나는 줄곧 그런 사람이 내가 바라는 짝이라고 생각했었어.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상이란 건 오래전에 깨달았지.”

“으음······ 그냥 이해심이 깊은 사람과는 다른 것 같네요.”

“아, 깊게 생각하지 마. 중학생 때부터 생각했던 망상이니까.”

나는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미나는 더 이상 캐묻진 않았다.

지혜는 조용히 주스를 마시면서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는데,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여하튼 그렇게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며 오늘의 선술집도 느긋하게 흘러갔다.

< 147화 9일차 선술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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