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또 한 번의 대면 >
반가운 얼굴은 또 보기 마련이라던가?
하지만 그리 반갑지 않은 얼굴도 또 보기 마련인 것 같다.
“또 뵙네요, 오 팀장님.”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모시겠습니다, 사공진씨.”
뭐, 보기 싫은 사람까진 아니지만 그룹 전략실의 오 팀장이 퇴근길의 나를 또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는 어쩐지 짐작이 되었다.
블루스 노인이 언질해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BMW를 타고 전에 갔던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역시나 그 넓고 고급스런 레스토랑의 손님은 회장님 한 명 뿐이다.
그런데 나 하나 만나려고 여길 항상 대절하시는 걸까?
궁금하지만 물어보기가 좀 힘들다.
“자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나를 자리에 앉히곤 대뜸 회장님이 말씀하셨다.
회장님은 지난번에도 그렇지만 참 화가 많으신 분 같다.
연로하신 나이는 아니지만 중년에 몸에 열이 많으면 좋지 않으실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모른 척하겠다 이거지? 자, 보게!”
회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스마트폰을 건네셨다.
그런데 회장님, 이 스마트폰······ 외국 경쟁사 제품이 아닙니까?
사과 한쪽이 먹혀 있는 로고가 선명하게 그려진 하얀색 스마트폰을 보면서 나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물론 그 위화감은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영상을 보면서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농사짓는 플레이어’의 사공진입니다.”
“이, 이지혜라고 해요.”]
회장님이 보여주시는 영상은 미나가 찍은 요리의 홍보 영상이었다.
막 시작하는 부분이라 나와 지혜가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열심히 비즈니스 스마일을 짓는 나와 어색한 웃음을 짓는 지혜가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잘 찍었구나, 미나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시다시피 사과파이를 굽는 영상입니다만······.”
“내 딸이 자네와 왜 사과파이를 굽고 있어! 자네, 내 딸과 그런 사이는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 사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렇고 그런 사이 말일세! 주겠다는 돈도 마다해서 좀 대단히 여겼는데, 날 그냥 떠본 셈인가?”
“회장님, 오해십니다. 저와 지혜양은 그냥 친구 사이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사이좋게 같이 요리를 하고 있나아! 자, 댓글도 보게나!”
회장님은 영상의 댓글도 보여주시면서 역정을 내셨다.
-오옹, 요리를 저렇게 쉽게 할 수 있구나
-요리 스킬 배우면 여러모로 쓸모 있겠네.
-근데 아직 화덕 같은 거 만들어주지 않았어. 언제 만들어줌?
-곧 만들어 줄 듯. 요즘 하펜 마을에 이것저것 막 짓고 있음.
-근데 직접 요리하는 여자애, 예쁘다. 몇 살일까?
-옆에 있는 아저씨랑 나이 차이 많아 보인다.
“보게! 다들 오해하고 있지 않나!”
“네? 아무도 오해하는 댓글은 안 보입니다만······.”
“아니, 보게나. 여기 다섯 번째 댓글이랑 여섯 번째 댓글에서······.”
회장님은 엉뚱한 댓글을 지적하면서 ‘지혜양과 내가 사귀는 사이라고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라는 이론을 펼치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느새 화제가 바뀌었다.
“흥! 역시 내 딸은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지. 젊은 사람들도 보는 눈은 있구만. 암, 언감생심 누구 딸인데!”
“······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회장님.”
많은 댓글이 지혜양이 예쁘다는 댓글이 달려서 그런 말을 하시는 회장님이셨다.
딸 사랑이 지극히 느껴지는 부분이라 딴죽을 걸진 않았다.
“자네 그런데 여기가 대체 어디인데 농사도 짓고, 낚시도 하는 건가? 한국에 이런 곳이 있어?”
“아, 그게 전에 말씀 드렸다시피 여긴 가상현실입니다. ‘마일스톤’이라는 게임사의 타이틀이죠. 아마 회장님도 아실 겁니다. 우리 그룹 지분이 꽤 있는 곳으로 압니다만······.”
“아, 이데아였나? 그 게임사 말이군. 돈 되는 곳 같아서 주식 좀 가지고 있지. 가상현실 같은 거 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 수준이었나······ 아니, 그게 아니라. 크흠. 자네 어쨌든 이래도 발뺌할 텐가?”
“회장님 저는 지혜양과······.”
[“아하하”
“재밌어요.”]
“······친구 사이일 뿐입니다.”
회장님께 사실을 말하려는데 영상이 계속 이어져서 지금은 낚싯배를 나와 미나, 지혜가 타고 있는 장면으로 흘러갔다.
내 말을 회장님은 듣는 느낌이 아니셨다.
“이······ 내 딸만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여자까지 데리고 뱃놀이까지 하는 건가?”
“뱃놀이가 아니라 낚시입니다. 보십쇼, 저는 그물로 낚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물고기가 이렇게 많이 잡혀? 재밌어 보이······ 크흠, 어쨌든 자네 어쩔 생각이야?”
“어쩔 생각이라뇨. 회장님 거듭 말씀 드리지만 지혜양에게 흑심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하늘 아래에 부끄러움 한 점 없이 말했다.
지혜양은 어쩌다 알게 돼서 도와주고 친해졌을 뿐이다.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나는데, 무슨 그렇고 그런 사이란 말인가?
미나에겐 두근거린 적은 있어도 지혜에겐 그런 적이 없다.
나는 정상적인 연애관을 가진 사람이다.
연애운은 없지만 말이다.
“그럼 어쩌다가 이런 영상을 찍고 있단 말이야!”
“아, 그거라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게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나는 차근차근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회장님은 잘 이해하시는 눈치가 아니셨다.
조금 곡해하셔서 이해하시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자네가 게임에서 일종의 사업을 하는데, 그 홍보로 영상을 찍었고, 내 딸이 도와줬다, 이 말인가?”
“사업······은 아닙니다만, 일종의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맞습니다. 사람들이 생활 스킬을 하도록 만드는 겁니다만.”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해?”
“돈이 아주 안 되는 일은 아닙니다. 2억 상당의 돈을 벌긴 했으니까요.”
“뭐? 게임으로 돈을 벌어? 그거 조폭들이 하는 짓 아냐?”
“아니, 아닙니다. 그게······.”
회장님은 사업가이시지만, 그래도 세대차이가 있으셔서 선입견이 나보다 더 강하셨다.
나는 조목조목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런 것들로 돈을 벌었다고?”
“네, 선술집만해도 하루 수입이 500만 골드, 그러니까 500만원입니다. 사이버 음주가 꽤 잘 먹혔죠. 관련 주류법도 없어서 마진이 아주 잘 남습니다. 최근에는 다른 것도 이것저것하고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사업 프레젠테이션 같아졌다.
회장님은 어쩐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아시는 것도 있으셨다.
“군신 길드라고? 낯이 익은데······ 아하, 그 프로게이먼가 뭔가 하는 거 스폰 하나 했었지. 요즘 인기라고 결제가 올라왔었어.”
“예, 제가 그 길드에 속해서 이런저런 일들을 했습니다. 최근에 영지를 손에 넣어서 아까 말씀 드렸던 프로젝트도 하고 있죠. 관련 부수입도 꽤 됩니다. 물론 개인 차원에서 그런 거지만요.”
“크흠, 영 놀고먹는다는 것은 아니란 말이군. 의외일세. 그러니까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사업 같은 걸 한다는 말이군.”
“그런 셈이죠. 연예인을 만든다거나 클럽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요.”
회장님은 이래저래 나와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신 것 같다.
블루스 노인······ 그러니까 회장님의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돈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다.
그게 사업가의 자세이기도 하니 말이다.
“관광지 개발 아이템이라면 좀 더 전문적으로 해보면 좋지 않겠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방향성이 현실과는 다릅니다. 현실처럼 콘도 같은 것을 짓는 것은 무의미하고, 좀 더 게임을 효율적이고 재밌게 하는 방향으로 만든다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만약 좋은 생각이 있다면 기획안을······ 아니, 이게 아니지. 그것보다 자네 내 딸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조금 질문이 달라졌다.
어떻게 생각한다라······ 여기서 또 친구라고 말하면 괜히 오해하실 것 같다.
하긴 회장님처럼 보수적인 분이시라면 남녀관계에 친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실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회장님.”
“아,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아까는 친구라고······.”
“생각해보니 친구란 말도 너무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해서 그렇습니다. 그저 온라인 상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 외의 관계는 일절 없고, 어떠한 사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혜가 자네에 대해 말을 많이 하던데······.”
“아, 그렇습니까? 그럼 지혜양에게 잘 이야기해서 오해가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조치한다니 어떻게 뭘 하겠다는 말인가?”
“그야······ 지혜양에게 회장님께서 오해하고 계시니 상황을 설명하고 말을······.”
“아니, 그만두게!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건가!”
회장님은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셨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다니, 아무 일도 없게 하려는 건데······.
“자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지혜는 자네를······ 크흠! 어쨌든 자네가 괜히 지혜에게 뭔가 말하면 내가 자네에게 언질을 한다는 것을 지혜가 알게 되지 않나? 지혜는 민감한 나이대라네. 부모가 참견하는 것은 싫어할 때지!”
“아하, 그런 것이었군요. 그럼······.”
“아무 말도 하지 말게나, 절대로!”
“예, 알겠습니다.”
나는 회장님의 말에 흔쾌히 답했다.
근데 어째 좀 이상하다, 분명히 회장님은 나와 지혜의 관계를 오해하셨고, 내가 확실히 선을 긋길 원하신 거 아니셨나?
뭐, 잘은 모르겠지만 회장님 지시니 따를 수밖에 없다.
“후우······ 이거야 원, 자네 나이가 28살이라고?”
“예.”
“사귀는 사람은 없나?”
“없습니다.”
“영상에서 나온 예쁜 처자와는 무슨 관계인가?”
“아, 그녀와도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 사입니다. 하지만 사귀는 건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 관계가 복잡하군. 가벼운 건지 무거운 건지 종잡을 수가 없어.”
회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곤 물을 한 잔 하셨다.
그리곤 내게 엄포를 놓듯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하게. 자네가 누구와 사귀든 상관없지만, 내 딸 눈에게서 눈물 나게 하진 말게. 안 그럼 책임 져야 할 거야.”
회장님은 어쩐지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셨다.
내가 왜 지혜양을 울린단 말인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회장님 지시사항이니 당연히 따라야 한다.
상명하복은 회사생활의 근본이지 않던가.
“네, 물론입니다.”
“······알겠네, 그럼 가보게나. 앞으로도 지혜를 잘 부탁하겠네.”
“예, 그럼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회장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했다.
회장님의 마지막 말씀도 꼭 사위에게 딸을 맡기는 말투 같아서 위화감이 들었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괜히 오해 살 일은 없잖아?
나는 그대로 식당을 나와, 바깥에서 대기 중인 오 팀장과 인사를 하곤 집으로 향했다.
박정하게도 집까지 태워주진 않았다.
나는 택시를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택시에 탄 와중에 괜히 지혜가 떠올랐다.
오늘도 그 애는 제과점 열고 잘 놀았을까?
접속해서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 142화 또 한 번의 대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