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국가선택 >
“오늘 영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선술집의 영업을 끝냈다.
오늘은 전투가 끝나고 일찍 시작했지만, 몇 개 품목을 제외하고 술이 다 떨어져서 접어야만 했다.
“잘 마셨습니다, 공진씨. 길드원 분들도 모두 오랜만에 마음껏 마셨을 겁니다.”
“그랬다니 다행이군요. 오늘은 이만 로그아웃 하실 겁니까?”
“네, 저도 오랜만에 현실에서 좀 쉬고 싶군요.”
흠, 그러고 보니 시화는 평소에 현실에서 활동하긴 하는 걸까?
전업게이머인 만큼 가상현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현실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음, 확실히 현실과 게임의 균형은 중요한 것 같다.
물론 내 경우에는 현실의 비중이 너무 심한 것도 같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도 가보겠네, 늙으니 가상현실에서 자는 걸론 부족하구먼.”
“아, 들어가십시오, 어르신.”
“헐헐, 여하튼 오늘은 재밌었네. 맘껏 싸우기도 했고, 좋은 술도 마셨네. 다음에 들러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흐흐흐, 기대하겠네. 여러모로 말이야.”
블루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로그아웃하려는 듯했다.
로그아웃 하기 전에 지혜양에게 뭔가 말하는 듯했지만, 가족끼리 하는 말 같아서 신경쓰지 않았다.
“미나, 너도 로그아웃할 거야?”
“음, 전 좀 이따 할래요.”
“좀 이따?”
“네, 오빠랑 같이 하는 게 좋겠어요.”
“나랑 같이? 왜?”
“그야······ 뭐, 같이 있고 싶으니까요.”
어쩐지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는 미나였고, 그걸 듣는 나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같이 있어서 딱히 할 건······.”
“에이, 친구끼리 같이 노는 게 어때서요.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안 돼요?”
“마음대로 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어쩐지 유혹 받는 기분이라 기분이 어정쩡하구만.
“저, 이제 뭐할 거예요?”
“어, 지혜양도 안가?”
“등교시간까지 시간 남았으니까요.”
“그럼 지혜양도 저랑 같이 있을 생각인가요?”
“네? 그럼 달리 할 일도 없잖아요.”
“······.”
어쩐지 나랑 있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는데.
어쨌거나 사람들이 떠나고 나와 지혜양, 그리고 미나만 남았다.
뭘 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골렘이 내게 다가왔다.
“주인님. 가축들이 새끼를 낳았습니다.”
“뭐? 정말이야?”
“네, 암소와 암퇘지, 암양이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암탉의 알에서 병아리가 태어났습니다.”
“오, 당장 보러 가자!”
왈왈왈!
골렘의 말을 듣고 나는 헐레벌떡 축사로 향했다.
불돌이를 선두로 정령과 동물 친구들도 뒤따랐다.
호크와 옥스는 이미 없었다.
아마도 짝을 돌보러 간 모양이다.
지혜와 미나도 크게 호기심을 가지고 따라왔다.
먼저 보게 된 것은 호크의 아이였다.
삐약삐약 뺙
“와, 귀엽다.”
“귀여워요.”
노란색 병아리가 귀엽게 울면서 암탉과 호크 사이를 걷고 있었다.
호크는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어도 기쁜 건지 아닌지 모를 눈치다.
아마도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음머어어어어
옥스의 긴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 옥스에게도 다가가 보았다.
옥스는 자신의 짝과 이제 막 일어서려고 하는 송아지를 번갈아 핥고 있었다.
나는 지친 듯한 암소를 툭툭 두르려 주었고, 곧 송아지를 바라보았다.
일어서려고 애쓰는 송아지의 모습이 대견하다.
“힘내, 일어설 수 있어.”
음머어어
내 응원에 송아지가 얕게 울었다.
나는 송아지를 쓰다듬어 주면서 기운을 복돋았다.
이윽고 송아지가 네 다리를 쭉 펴고 일어섰다.
“옳지, 잘했다.”
음머어어어
“그래, 옥스도 수고했어.”
옥스도 출산하는 짝을 돌보느라 마음 고생한 모양이었다.
나는 옥스를 쓰다듬으면서 달래주었다.
지혜양과 미나도 일어선 송아지를 대견하게 보았다.
다음은 돼지들에게 다가갔다.
처음 샀던 암퇘지가 출산을 했는데, 지금은 새끼 돼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새끼 돼지를 꼬물거리는 모습이 매우 귀여웠다.
“아까부터 영상을 찍고 있었어요. 나중에 홍보 영상을 올릴 때 이것도 올리죠.”
“아, 좋은 생각이네.”
“저, 저도 개인소장 용으로 찍어도 되죠?”
미나는 영상을 찍고, 지혜양은 사진을 찍는 듯했다.
귀여운 동물 아기를 봐서 사진을 찍고 싶은 모양이다.
마지막으론 아기양을 보았는데, 아직 털이 안 났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것이 귀여웠다.
“주인님, 골드의 치유견 능력을 이용해서 출산을 마친 가축들을 돌봐줄 수 있습니다.”
“아, 그럼 마침 마을에 가야할 일이 있는데, 골드를 두고 가야겠네. 실버야, 골드랑 같이 있을래?”
월월!
멍멍!
“마을엔 무슨 일로 가요?”
“응, 일단 촌장에게 가보려고. 언제 대사들이 올지 물어볼까 싶어서. 그리고 공용 대장간을 만들 생각이야.”
“벌써 만들 생각인거군요.”
“응, 만들어놔도 아직 쓸 사람이 있긴 할지 모르겠지만. 자, 그럼 가볼까.”
사료나 먹이를 주어서 가축들을 다 돌본 나는 마을로 향했다.
지혜양과 미나, 그리고 정령들이 따라왔다.
“오늘 군신길드랑 오딧세이 길드가 싸우는거 봤어?”
“대박이었음. 정말. 개쩜.”
“이 마을을 두고 싸운다니······ 그럼 이 영지는 이제 정식 영지인가?”
“뭐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무기상점도 생겼고, 제과점이랑 정령술사 길드도 생겼잖아. 뭔가 더 생기겠지.”
“어라? 그건 근데 영주가 아니라 농장 주인이 지은 건물 아닌가?”
촌장집에 가는 길에서 사람들의 수다소리도 들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군신길드와의 전투가 화젯거리인 모양이다.
“다들 오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네요.”
“그러네.”
“사람들도 훨씬 늘었어요. 홍보만 제대로 하면 퀘스트를 깨는 것도 불가능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려나······ 일단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럼 오늘 농장에 돌아가서 한 번 찍어볼까요? 홍보 영상이요.”
“벌써?”
“네, 빨리빨리 하는 게 좋잖아요.”
“그러자. 오늘 공용대장간을 만들 생각이니까.”
미나의 제안에 수긍하면서 계속 촌장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촌장집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였다.
“응? 사람들이 있는데.”
“유저들은 아니네요. 모두 NPC병사들이에요.”
“미나는 알아보겠어?”
“네, 각각 밀레스, 메이거스, 그리고 밀리아리움의 병사들이네요.”
“아······.”
미나의 설명을 듣자 나는 그들이 왜 여기 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각 국의 대사를 호위해온 병사들일 것이다.
“촌장님에게 대사가 왔나보네.”
“그런 모양이네요.”
“지금 들어가는 건 실례일려나······.”
“오히려 찾고 있는 사람은 오빠일 것 같은데, 들어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런가? 뭐, 그렇기도 하네.”
병사가 우선 제지할 것 같지만, 사정을 설명하기로 하고 촌장집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역시 세 무리의 병사 중 한 명이 가로막았다.
“멈춰라! 여긴 출입통제 중이다.”
“혹시 이곳의 영주를 찾고 있는 중입니까?”
“음? 이방인! 그걸 어떻게 알았지?”
“제가 영주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내 말에 병사는 놀라면서도 못 믿기는 모습이었다.
나는 길게 설명해봤자 소용없다고 느끼곤 용건을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안에 촌장님과 대사님들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이 마을의 영주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고요.”
“으음······.”
병사는 내 말을 믿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촌장집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자 그곳에서 촌장과 세 명의 NPC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사처럼 보이는 세 명의 NPC는 각각 특색이 달랐다.
한명은 망토를 두른 갑옷을 입은 것이 전형적인 기사처럼 보였고, 다른 한 명은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게 꼭 마법사 같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교황 같은 흰색 법복을 입었다.
“저 사람이 내가 말한 이곳의 영주가 맞습니다.”
촌장이 공손히 그 세 명에게 말했다.
그러자 기사 같은 차림의 대사가 먼저 나에게 다가왔다.
“그대가 이곳의 영주가 되었다는 ‘사공진’이란 자가 맞나?”
“네, 제가 사공진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우리 밀레스에 합류하겠나?”
아무래도 기사는 밀레스라는 나라에서 온 모양이다.
하지만 태도가 거만한 것을 보니, 별로 협상을 하러 온 것 같진 않았다.
나도 딱히 협상으로 정할 생각은 아니지만 말이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합류하고자 한 나라를 정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겠다는 거냐?”
“그런 것 같네요.”
“흥, 약한 놈이 당돌하군. 후회하지 마라. 너흰 정복될 테니. 돌아간다!”
기사는 그런 말을 남기고 병사들과 떠났다.
남은 것은 마법사와 신관뿐이었다.
“이런, 역시 밀레스의 기사는 성격이 급하군요. 안녕하십니까, 사공진 영주님. 저는 밀리아리움에서 대사의 자격으로 온 추기경 말론입니다.”
그가 떠나자 말을 건 사람은 자신을 말론이라 소개하는 신관이었다.
나는 그에게 괜한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것이 곤란해서 그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려고 했다.
“저는······.”
“아,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속하고자 하는 국가는 군신 길드가 연을 맺고 있는 메이거스지 않습니까? 저는 이미 알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외교라는 게, 꼭 적 아니면 아군이란 것은 아니거든요. 아군이 될 수 없다면 적이라도 되지 않는 것이······ 외교의 묘미죠.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후후후, 그럼 저도 이만 가야겠군요. 언젠가 다시 봅시다, 젊은 영주님.”
그 말을 한 후, 말론 신관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곤 병사들과 떠났다.
이제 남은 이는 한 명 뿐이었다.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마법사였다.
“메이거스 왕국의 궁중 대마법사 사이퍼라고 하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이미 들으셨겠죠.”
“그렇소. 그리고 듣자하니, 이야기가 빨라질 것 같구려.”
“예, 저는 메이거스에 합류하길 원합니다. 이유도 말론 신관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허면 그대를 우리 메이거스 왕국의 정식 영주로 인정하겠소. 그대에겐 이제 남작의 작위가 수여되었소.”
대마법사 사이퍼는 특별히 두루마리를 읽거나, 멋진 의식을 치르는 것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걸로 끝입니까?”
“그렇소만? 뭐 특별한 거라도 기대했소?”
“아뇨······ 아닙니다만.”
“기념행사가 하고 싶으면 알아서 하시구랴. 마법과 상업을 중시하는 우리 왕국은 허례허식을 싫어한다네.”
음, 이 게임의 NPC들은 담백한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이 사람들에겐 뭔가 기대를 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럼 나도 이만 가야겠군. 영지를 잘 다스리게나. 세금은 알아서 떼갈테니 걱정하지 마시게.”
“저기, 적어도 메이거스에 합류하면 뭐가 좋은지 정도는 말씀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 뭐 특별한 건 없네. 다른 왕국이 침략하면 함께 싸워주는 것뿐이라네. 그 외에는······ 사실 자유영지일 때와 차이는 별로 없군. 다만 국익에 공헌하는 일을 하면 여왕전하께서 상을 내리실거요.”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보세.”
대마법사 사이퍼도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아, 참고로 밀레스의 그 싸가지 없는 기사 애송인 아서라고 한다네. 기억해두게나. 분명히 문제 일으키러 또 올테니. 그럼······.”
그는 그렇게 말하곤 손가락을 튕기더니 사라졌다.
마법사라서 그런지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텔레포트 마법으로 병사들과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