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플레이어-148화 (148/239)

< 129화 우정의 이름으로 >

가끔은 후회할 걸 알면서 물러서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금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냥 회장님이 원하는 답을 줄 수도 있었다.

물론 백지수표에 숫자를 적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만, “따님과 만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건 옳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바보로군.’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스스로를 비웃었다.

세상사 옳지 않다고 고집 피워서 좋을 일이 어디 있는가?

미생에 불과한 내가 현실에 타협하지 않아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단적으로 말해, 당장 오늘 일자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나름대로 직장에 애착이 있는 나로선 그렇게 되면 후회할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랬을까?

어쩌면 그것도 미생에 불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생에 불과하니까.

어차피 버려진 돌이나 마찬가지니까.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 조금은 저항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인데, 굽히고 살고 싶지 않다는 걸지도. 쳇,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군.’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물에 샤워부터 하고, 식사를 마쳤다.

그러자 오늘 있었던 비현실적인 회장님과의 대화도 잊혔다.

기분이 훨씬 나아지자 캡슐로 향했다.

‘아 오늘은 정식영지가 되는 날이군. 시화씨가 대비해준다고 했지만 잘 되려나?’

가상현실 쪽에도 근심거리가 하나 있었다.

아마 지금 접속하면 아직 24시간이 지나진 않았을 텐데, 그래도 농장이 조금 걱정되긴 했다.

골렘이나 실버, 골드, 호크, 옥스······ 그리고 가축들도 걱정이 되어서 얼른 접속했다.

[사용자 신원 ‘사공진’ 확인

<마일스톤>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접속.”

주변의 풍경이 농장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평소의 농장처럼 평화롭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멍멍멍!

월월월!

“실버와 골드야!”

접속하자마자 실버와 골드가 활기차게 뛰어왔다.

나는 뛰어오는 녀석들을 끌어안곤 마구 쓰다듬어주었다.

아, 힐링된다.

역시 세상풍파 따위 모르는 개들과 어울리면 사라진 동심이 생기는 기분이다.

“주인님, 다녀오셨습니까.”

“아, 골렘아. 별 일 없었어?”

“아직 정식 영지가 되려면 1시간 35분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동안 농장에 침입한 적들은 없었습니다.”

“다행이다.”

골렘은 어제 준 마법공학 톱날검과 어윈의 방패를 든 채로 말했다.

톱날검을 든 모습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나쁜 마음먹은 사람들도 어지간해선 농장에 침입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주인님, 침입자는 아닙니다만······.”

“응?”

골렘은 드물게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방문객이 있습니다.”

“아.”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고, 그곳에는 말 그대로 방문객이 한 명 있었다.

오늘 일과 관련된 사람.

이지혜양이다.

그녀가 다소 망설이는 눈치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오늘 내가 회장을 만난 것에 대해 알고 있거나 대충 눈치를 챈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괘, 괜찮나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했지만, 그녀가 다짜고짜 안부를 물어보았다.

예쁜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모습이라,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가······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버님······ 음, 그러니까 회장님이 부르긴 했어요.”

“그런······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

“회장님이 오해하시긴 했지만, 제가 잘 설명했으니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나는 약간의 허세를 담아 말했다.

물론 잘 설명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 출근했을 때, 내 책상이 무사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지혜양을 원망하거나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보다 지혜양, 계속 기다렸던 거예요?”

“네.”

“그럴 필요 없었는데, 심심하지 않았어요?”

토끼 같은 눈을 하고 고개를 젓는 그녀였다.

“저기, 일부러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속여요? 뭘요?”

“그게, 제가, 그러니까······.”

“아, 회장님 따님이란 거 말인가요? 그게 뭐 속인건가요. 사실 거짓말 한 건 없잖아요.”

내가 멋대로 임원의 딸이라고 착각했을 뿐이었다.

뭐, 따지고보면 회장님도 아주아주 높은 임원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그건 농담에 가까운 말이고, 사실은 아버지가 회장이라고 밝히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겠지.

내가 그렇게 말해도 지혜양은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지혜양, 저는 딱히 지혜양이 회장님 따님이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아,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달라지지 않아요. 지혜양은 도움을 원했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도움을 준 것 뿐이에요. 그것뿐이잖아요? 회장님은 좀 오해하시긴 했지만, 저는 당당합니다. 그러니까 지혜양도 당당해지세요. 오히려 그런 모습이면 회장님이 오해를 더 하실 것 같네요.”

나는 능청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조금은 안도하는 듯한 지혜양이었다.

“아, 부득이 회장님께 지혜양의 사정을 좀 말했어요. 파티시에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라던가, 뭐 그런 거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괜찮아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회장님이 지혜양의 사정을 이해해줬으면 하네요. 지혜양도 회장님을 너무 미워하지 말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

나의 말에 지혜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뭔가 일이 일단락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지혜양과 회장님이 대화를 나눠도, 지혜양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회장님의 입장에선 반대하는 것도 나름대로 이해는 가기 때문이다.

회장님은 지혜양이 빵을 직접 굽는 사람이 되기보단, 그런 사람을 거느리는 사람이 되길 바랄 것이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재벌 회장의 입장에서, 자신의 금쪽같은 딸이 사회적 계층을 내려가려는 짓이나 다름없는 일을 하려는 걸 쉽게 용납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제 사정은 알았으니, 조금의 대화는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파티시에가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더라도, 지혜양의 어머니에 대해서 반성과 후회의 시간을 공유할 순 있겠지.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괜찮으니까, 지혜양은 일 봐요. 저는 오늘 할 일이 좀 있네요.”

“무슨······ 일이요?”

“음······ 확실한 것은 아닌데요. 잠시 후에 제 영지가 정식 영지가 되면 전투가 벌어질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음식을 만들어 두려고요. 저 대신 싸워주는 사람들에게 나눠줄 생각이거든요.”

“그럼 저도 같이 만들래요!”

“네? 그럴 필요 없는데요. 저 혼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그래도 같이 하면 안 될까요?”

내가 한 번 거절하자, 시무룩한 모습이 되는 지혜양이었다.

딱 잘라 거절하기가 뭣하기도 하고, 도와준다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죠. 도와주면 오히려 제가 고맙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나와 지혜양은 곧바로 화덕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정령친구들을 모두 소환했다.

“모두들 안녕!”

왈왈왈!

냐오옹

브어엉

삐이이익

차례로 불돌이, 물방울, 태산이, 바람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들 기분 좋게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불돌이는 곧바로 화덕 안으로 들어가 불을 때웠다.

“무슨 요리를 만드실 생각이세요?”

“음, 피자를 만들 생각이에요. 재료를 따로 구울 필요 없이 한 번에 화덕에 구울 수 있고, 버프도 출중하거든요. 대량으로 만들 생각인데, 피자 도우 만드는 걸 도와주실래요?”

“네!”

활기차게 대답하는 그녀였다.

곧바로 나와 지혜양은 피자를 마구 굽기 시작했다.

나는 스킬을 이용해서 하나씩, 그녀는 스킬도 쓰지 않고 도우를 반죽하고 재료를 위에 놓았다.

그런데도 속도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확실히 요리를 만들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큰 모양이다.

손은 물론이고 얼굴에 밀가루를 묻혀가면서 반죽하는 그녀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는 재벌가의 딸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얼굴에 밀가루 묻으셨어요.”

“앗······.”

내가 그걸 말하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허둥지둥 닦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런데 닦으면 닦을수록 얼굴에 밀가루가 더 묻고 있었다.

흠, 수건이 없어서 곤란한데.

“저기.”

“네?”

“닦아······ 주실래요?”

아, 그런 수가.

내가 닦아주면 됐었다.

나는 얼른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어 밀가루를 닦고 털어주었다.

말랑말랑한 얼굴을 만지는 게 좀······ 부끄럽네.

“······.”

“······.”

그리고 어쩐지 분위기가 얼어붙어버렸다.

“저, 저 세수 좀 하고 올게요!”

곧 지혜양은 호수로 달려가서 얼굴을 씻었다.

돌아왔을 땐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조금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참고선 바람이를 이용해 얼굴을 말려주었다.

원래부터 예쁜 얼굴인데, 바람에 물기가 마른 모습은 좀 더 매력적이었다.

“저기······.”

“네?”

“너무 빤히 바라보지 말아주세요.”

“아, 미안해요.”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본 모양이다.

여하튼 나는 계속해서 그녀와 피자를 만들었다.

200개 정도를 만들고 나서 주재료인 밀가루가 동나서 그만두었다.

나는 곧바로 시화에게 귓속말을 했다.

“시화씨, 음식과 포션을 준비했는데. 오늘 아무래도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네, 공진씨. 안타깝지만 벌써부터 승냥이떼가 몰려온 것 같네요. 마을 쪽으로 와보시면 아실 겁니다. 저도 마을에 있으니 거기서 만나도록 하죠.

안타깝게도 무력충돌이 예상되는 모양이다.

“지혜양, 아무래도 일이 터질 듯한 모양이네요. 저는 마을로 가야겠어요.”

“저도 따라갈게요.”

“꼭 따라오실 필요는 없는데요.”

“딱히 할 일도 없는걸요. 그리고······ 공진씨랑 같이 있고 싶어요.”

“네, 그럼 같이 가죠.”

굳이 말리진 않았다.

꽤 강단 있는 그녀가 말린다고 포기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혹시 모르니 옥스와 호크도 대동시켰다.

농장은 골렘이 지키기로 했다.

여전히 그에게 마법공학 톱날검과 방패를 맡겼고, 나는 로렌의 창으로 무장했다.

그리고 곧 마을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시화의 말대로 심상치 않은 것을 보게 되었다.

“저 사람들······ 왜 저렇게 모여 있죠?”

“싸우려는 거겠죠. 저 사람들이 아무래도 제 적인 모양이네요.”

마을에서 좀 떨어진 토끼밭에 대략 200명은 될 듯한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분위기상 저 사람들이 마을을 차지하려고 드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난 약간 근심스럽게 그들을 바라보며 마을에 들어섰다.

그러자 마을에도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낯익은 사람들도 있었다.

두석린갑을 입고 환도를 찬 사람, 눈에 익은 핼버드와 츠바이헨더를 들고 있는 사람.

일전에 선술집에도 왔었던, 내가 만든 무기를 쓰는 <군신>길드 사람들이었다.

“공진씨, 오셨군요.”

그리고 곧 시화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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