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대면 >
“사공진씨 입니까?”
“네?”
선글라스, 검은 양복, 넓은 어깨, 커다란 덩치.
흔히 ‘어깨형님’이라고 불리는 이가 퇴근을 하는 내 앞에 나타났다.
차림새가 매우 단정하고 귀에는 블루투스 폰을 달고 있는 걸 보니 조직폭력배 같진 않았다.
어느 조직의 시큐리티 요원 같아 보이는데, 왜 나를 찾는 걸까?
“사공진씨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잠깐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어디서 오셨는데, 그러시죠? 저는 끌려가야할 만큼 잘못한 일은 없는데요.”
나는 휴대폰을 들고 여차하면 신고할 준비를 하고 말했다.
그러자 목석같은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위험한 물건을 꺼내나 싶더니, 그가 꺼낸 것은 명함이었다.
“그룹 전략실 시큐리티 팀의 오 팀장입니다. VIP의 요청으로 공진씨를 모셔오도록 명령받았습니다.”
“······.”
그룹 전략실이라면 회장님이나 고위직 임원분들의 직속 비서실을 의미한다.
재벌 소재의 드라마나 소설에서 흔히 재벌 자재분들이 사고치면 수습하는 역할로 나오는 곳 말이다.
현실은 좀 다르지만, 여하튼 그곳의 경호원이 왜 날 찾아왔지?
날 데려오라고 한 VIP는 누구고?
여하튼 명함을 보니 가짜 같진 않았다.
“제가 안가겠다고 하면 저한테 불이익이 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회사 다니기 힘들어지실 겁니다.”
“누가 절 부르셨는지도 말씀드리기 곤란한 모양이죠?”
“예, 업무에 관련된 일이 아니다보니. 하지만 신변에 위험한 일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
그런 말을 하니, 더 오해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말인즉 신변은 위험하지 않지만, 다른 것은 위험하단 말인가?
은근한 협박처럼 들렸다.
“가시겠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함께 갈 건지 말건지 나에게 묻고 있었다.
뭐지, 나는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
왠지 가지 않으면 정말로 내일 회사 짤릴 것 같은 분위기다.
“가죠. 눈이라도 가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영화를 너무 보셨군요. 그냥 따라오시면 됩니다.”
목석같은 그가 피식 웃더니 나를 안내했다.
나는 그를 따라 회사의 로비를 나섰다.
차도에는 BMW가 대기 중이었다,
나는 곧 그 BMW의 뒷좌석에 탑승했다.
내가 평생 벌어도 못살 고급차라서 그런지 승차감은 끝내주는군.
아니, 이제 <마일스톤>으로 꽤 버니까 아주 못살 것은 아닌가?
물론 한 대 뽑으면 알거지가 되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말이다.
“아, 미리 말씀 드리는데, 오늘 일은 어디서 떠벌리시면 안 됩니다.”
“그건 영화 같네요.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제 신상이 다 털리는 겁니까?”
조수석에 탑승한 오팀장의 말에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가 또 웃었다, 긍정의 웃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차는 출발했고, 다소 긴장한 채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수상한 지하실로 끌려갔다······ 같은 전개는 일어나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아주 럭셔리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는데, 손님이 한 명 뿐인 걸 보니 대절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유일한 손님은 나도 아는 사람이다.
이 회사 사람이면,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면 싫든 좋든 얼굴은 알게 되는 분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
S그룹의 이용재 회장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신문이나 인터넷으로만 보았고, 그는 날 처음 봤을 것이다.
근데 왜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것 같은 모습일까?
국내 재계순위 1위의 재벌 회장님이 일개 사원에게 화가 날 일이 있긴 한가?
이분에게 나는 개미의 발톱 떼만도 못한 존재일 텐데 말이다.
“앉지.”
“예, 회장님.”
나는 이유 모를 분노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공손히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그가 말했다.
“입사 4년차로군. 근무태도 성실하고 평판도 좋고, 실적도 좋고, 친분도 잘 쌓았군. 맞나?”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대로라면 별 일 없는 한 부장 달고 잠시 임원 좀 하다가 퇴직하겠군.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회장님.”
회장님은 별 볼일 없는 내 이력을 보면서, 앞으로의 내 회사 생활을 평가해주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는 건지, 그것도 못하게 해주겠단 건지, 그것도 아니면 네놈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정도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더 모를 말을 하시는 회장님이셨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친구인데, 튀고 싶었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이분이 뭘 잘못 드셨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나에게 이럴 이유가 없다.
나는 정말로 이유를 몰라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회장님은 여전히 찌푸린 인상을 하고선 자신의 명품 지갑을 꺼내셨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사진 한 장을 보였다.
“이 애, 모른다고 잡아뗄 생각인가?”
“······!”
그리고 사진엔 낯익은 사람이 찍혀 있었다.
이지혜양이었다.
내가 놀란 표정이자, 그가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목적으로 이 애에게 접근했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지혜양이 회장님과 무슨 관계입니까?”
“······자네, 끝까지 모른 척 할 생각인가?”
“죄송합니다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뿐입니다. 회장님.”
“아니, 내 딸에게 접근해서 치근댔으면서 그걸 모른다고 잡아떼!”
쾅!
회장님은 드라마를 많이 보셨는지 갑자기 화를 내시며 테이블을 두드리셨다.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손은 안아프신지 걱정이다.
어쨌든, 그랬구나······.
“회장님 따님이셨군요. 저는 회장님 따님이신줄은 몰랐습니다.”
“내 딸 나이가 18살이야. 자네 나이가 몇 살이야?”
“28살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 접근해서 마수를 뻗혀? 자네 콩밥처먹고 싶나?”
“회장님, 저는 치근댄 적도 없고 마수를 뻗힌 적도 없습니다. 게임에서 만난 게 전부입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회장님.”
회장님은 정말로 단단히 오해하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오해를 풀어야 하는 입장인 것 같다.
난 잘못한 게 없지만, 오해는 안좋은 결과를 불러오니 말이다.
“제가 고등학생과 나쁜 관계를 맺는 놈으로 보이신다면 큰 오해십니다.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뭐?”
“저는 주말평일휴일 구분없이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자정에 퇴근합니다. 무슨 수로 고등학생과 그렇고 그런 관계를 가지겠습니까?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하고 싶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정 의심스럽다면 제가 하루라도 야근을 빼먹은 날이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야근수당은 꼬박꼬박 체크하고 있습니다.”
“······.”
나의 반박에 회장님은 조금 의아한 모습이 된 듯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단 것을 인지하신 모양이다.
“이지혜 양은 집에 돌아오면 접속하는 가상현실 게임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 그래! 그 게임에서 해코지를 했군.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아무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건전한 게임입니다.”
“아 글쎄 뭘했냐고!”
막무가내다.
그럼 뭐 사실을 말하는 수밖에.
“빵을 구워 같이 먹었습니다.”
“뭐? 빵? 그 애가 빵을 자네랑 왜 구워 먹어?”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 이유가 알고 싶습니다, 회장님.
이렇게 말할 순 없어서 다른 이유를 말해야했다.
그녀가 파티시에가 되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근데 그게 이지혜양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대충 둘러대보기로 했다.
“그냥 친구기 때문입니다.”
“친구?”
“예. 친구입니다.”
“······.”
내가 곤란하긴 해도 지혜양의 사정을 마구 말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친구라고 둘러댔다.
다소 어린애 같은 말이었을까?
회장님은 구겨진 표정을 펴시질 않았다.
“후우, 내 아들 놈이 여자랑 놀아난 적은 몇 번 있어도 내 딸에게 벌서 이런 파리가 꼬일줄은 몰랐네.”
저는 파리가 아닙니다만.
회장님은 노골적으로 나를 적대하며 말했다.
그러면서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얀 종이.
수표다.
그것도 숫자가 안 적힌 수표.
“이거 받고 떨어지게. 적당히 원하는 만큼 적고 내 딸에게서 떨어져.”
회장님은 거의 던지다시피 펜과 백지수표를 내놓았다.
난 그걸 보고 속으로는 피식 웃었다.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 지금 내가 현실에 있는 것이긴 한 걸까?
야근이 너무 힘들어서 꿈을 꾸고 있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그리고 나는 꿈이라 해도 독배를 마실 사람은 아니었다.
“회장님,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이걸론 떨어지지 않겠다는 건가? 자네 혹시 이상한 망상하는 건 아니겠지? 내 딸과······.”
“그런 게 아닙니다, 회장님.”
뒤에 이어질 회장님의 말이 너무 역겨울 것 같아서 끊어버렸다.
말이 끊기자, “감히 내 말을 끊어?”라는 모습이시다.
“저와 지혜양은 이런 거 받고 헤어져야 할 정도로 깊은 사이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온라인 친구일 뿐입니다. 오해가 너무 깊으십니다.”
“돈이 싫어? 돈이 필요 없다고? 그럼 그대로 내 딸과 헤어지게.”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지혜양이 원한다면 당연히 그럴 겁니다만, 왜 회장님이 따님의 친분관계에 간섭하시는 겁니까?”
“이 작자가 정말 몰라서 묻나! 자네가······.”
“저는 회장님께 부끄러워야할 짓은 전혀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회장님이 절 시험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드라마입니까? 백지수표라니요. 여기에 숫자 하나라도 쓰는 순간 저는 진짜로 회장님 따님으로 돈 만지려한 인간쓰레기 되는 거 아닙니까.”
“······.”
앗,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져버렸다.
어쩐지 나의 커리어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인데.
하지만 이제 루비콘 강을 건넌 기분이다.
“따님께선 그저 파티시에가 되고 싶으시다고, 저에게 도움을 구하신 것뿐입니다. 전 게임 속에서 제과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 뿐이고요.”
“빵? 제과? 그 애가 그게 하고 싶었다고? 그걸 왜 자네에게 말해?”
“회장님······ 따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시는 듯합니다.”
“자네는 안다는 듯이 말하는군?”
“이유는 물어봤으니 아마도 회장님보단 더 알고 있는 듯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회장님의 표정엔 분노와 함께 동시에 의문이 담겨져 있었다.
“내 딸이······ 그런 빵가루 냄새나는 직업을 왜 하고 싶다는 건가? 그건 나중에 식품 계열사 물려주는 걸로 얘기 끝났는데······.”
“회장님, 따님께선 정말로 파티시에가 되고 싶으신 거지, 경영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결국 지혜양의 본심을 내가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돌이키기 힘들 것 같다.
이러지 않으면 오해를 종식시키기 힘들 것 같았다.
“따님께선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리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군요. 어릴 적 어머님과 빵을 구운 것을 그리워한다고요. 그리고 회장님이 어머니 곁을 지키지 못한 것에 매우 서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애가······ 여전히 그렇단 말인가?”
“네, 회장님. 그러니까 저에게 이런 백지수표를 주시는 것보다······.”
나는 마지막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님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
“실례했습니다, 회장님. 그럼 저는 이만······.”
나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