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김치 >
힐링 호를 정박 시킨 뒤, 나와 일행은 여전히 아름다운 트로페 마을을 거닐었다.
태산이는 골렘이 들고 물방울은 내 머리 위에 매달린 채로 말이다.
불돌이는 워낙 활발히 뛰어다녔고, 바람이는 날아다니다가 내 어깨에 앉는 것을 반복했다.
하펜 마을은 시골 같은 아늑함이 있다면 트로페 마을은 해변 마을의 풍취가 있었다.
온통 새하얀 건물들의 아름다움과 바다내음이 잘 어우러져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농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식료품점을 들릴까.”
“작물을 파시려는 겁니까?”
“응, 여기선 사과랑 포도, 딸기를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 온김에 파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지난번에 사과와 포도, 딸기 2,000개 정도를 240만 골드에 팔았다.
하펜 마을에서 팔았으면 아마 개당 50골드까지 값이 내려갔을 것이다.
같은 작물은 같은 곳에 팔면 가격이 폭락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트로페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선 먼 곳의 특산품 취급을 받아서 좋은 값에 대량 매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과일의 재고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이번엔 가능하면 4000개씩 팔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트로페 마을의 식료품점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또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식료품점 청년이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나를 반기듯 말했다.
“오늘도 뭔가 사시려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과일을 매각하러 오셨나요?”
“오늘은 특별히 사려 한 것은 없고요, 과일을 팔러 왔습니다만. 지난번에 팔았던 2,000개는 어떻게 됐나요?”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재고가 전혀 남지 않았어요.”
“그 많던 걸 하루 만에 소비했나요?”
“네? 하루요?”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하하.”
헷갈렸다.
현실에선 하루지만, 여기는 하루가 아니지.
내가 회사 있는 시간을 4배 빠른 이곳 시간으로 계산하면 64시간 정도다.
그 동안 다 팔린 모양이다.
“크흠, 어쨌든 이번에도 팔러 왔는데······ 지난번엔 2,000개씩 팔았잖아요? 이번엔 혹시 4,000개씩 가능합니까?”
“제 쪽에선 오히려 환영입니다. 인기를 끌고 있어서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다행이군요. 저도 재고를 적당히 줄일 수 있겠어요. 값은 지난 번이랑 똑같이 해서 480만 골드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죠.”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식료품점 청년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장사가 정말 잘 된 모양이다.
나는 480만 골드를 받았다.
이젠 장사에 써야하는 재고만 남았기 때문에 4,000개씩 파는 것은 오늘만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거의 선술집 하루 매상보다 많은 돈을 얻었다.
이거, 정말로 부자 되겠군.
나는 인벤토리의 골드를 확인해보았다.
“24,239,700골드······ 그냥 놀고먹는데 돈이 마구 쌓이네.”
마치 불로소득을 둔 것 같은 기분이다.
아, 물론 농사를 짓는 거지만, 나한테는 이것저것 만들면서 노는 것이나 다름없다.
회사원이나 사회인들이 귀농을 꿈꾸면서도 부농이 되는 것을 꿈꾸는데, 나는 사이버 귀농을 한 셈인 것 같다.
일단 트로페 마을에서 볼 일은 없어졌다.
돌아가서 액젓을 만들고 김장을 할 때인 것 같다.
나는 모두와 함께 마법사 길드로 향했다.
“또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본 무뚝뚝하지만 귀여운 걸 좋아하는 마법사 청년이 나에게 인사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골렘이 들고 있는 태산이나, 내 머리 위에 매달린 물방울, 그리고 혀를 헥헥 거리는 불돌이에게 시선이 가 있었다. “만지고 싶으시면 만져도 되요.”
“그, 그럼 조금······.”
냐오오옹
나는 물방울을 손에 안고 말했다.
물방울은 만지든 말든 관심 없는지 묘한 눈으로 마법사 청년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브어어엉
왈왈왈!
삐이이익
마법사 청년은 그런 다음엔 태산이, 불돌이, 그리고 바람이를 만지며 실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무뚝뚝한 인상이지만 웃으니 잘생긴 청년이다.
뭐, 젊은 NPC들은 하나같이 선남선녀지만 말이다.
여하튼 마법사 청년이 만족할만큼 ‘힐링’한 뒤에 그의 텔레포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정령들을 만지게 해준 보답으로 각별히 반값 할인을 해주어 1만 골드에 텔레포트를 시켜주었다.
어느새 우린 하펜 마을의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아, 바다 구경 잘했네. 농장으로 돌아가자.”
“네, 주인님.”
오늘은 바다구경만 한 게 아니라 항해도 했지만, 어쨌거나 일 좀 하면서도 잘 놀다왔다.
뱃일을 했는데도 오히려 피로가 풀린 기분이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농장에 돌아왔다.
멍멍멍!
월월월!
“이 녀석들, 농장 잘 지켰니?”
멍멍!
돌아오면 실버와 골드가 나를 반겼다.
농장을 잘 지켰냐는 말에 실버가 힘차게 짖어 대답했다.
나는 실버와 골드를 마음껏 쓰다듬어 주곤 골렘을 돌아보았다.
“골렘아, 내 예상에 액젓은 절임이라 절임통을 쓸 것 같은데, 맞아?”
“그렇습니다. 만드는 법은 간단합니다. 절임통에 소금물을 담고 거기에 재료를 넣으면 2시간 후 액젓이 됩니다.”
“까나리랑 멸치랑 새우 다 있으니까 하나씩 만들어 둘까. 나중에 뭐가 필요해질지 모르니.”
절임통은 4개를 만들어뒀다.
그 중 3개로 액젓을 만들면 될 듯하다.
곧바로 제작에 착수했다.
물에 소금을 20개는 넣어서 짠물을 만들고, 절임통에 까나리나 멸치, 새우를 가득 채웠다.
[절이는 중 - 멸치 액젓 1시간 59분]
[절이는 중 - 까나리 액젓 1시간 59분]
[절이는 중 - 새우 액젓 1시간 59분]
“새우 액젓의 경우 액젓과 새우젓으로 분할됩니다.”
“흠, 나중에 족발이라도 만들면 곁들이기 딱 좋겠군.”
새우젓은 돼지고기와 딱 궁합이 맞다.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같이 먹어야지.
하지만 지금은 김장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럼 액젓은 만드는 중이고, 본격적으로 김장을 해야겠는데 먼저 배추를 절여야겠지?”
“그렇습니다. 배추를 네 등분으로 가른 뒤, 한 개씩 충분할 만큼 소금에 절여 주십시오.”
“100포기를 담으려면 꽤나 고생하겠네.”
나 혼자 먹고 말거라면 100포기나 담글 필요가 없지만, 선술집의 밑반찬으로 계속 내려면 한 번에 담아두는 것이 좋다.
게다가 김치로 이것저것 요리를 해볼 생각이면 더더욱 말이다.
나는 우선 목공 스킬로 나무 대야를 대량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배추들을 네 등분해서 대야에 차곡차곡 담았다.
100개의 배추를 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30분은 걸렸다.
골렘은 급조한 가죽 장갑을 낀 채로 나를 도와줬다.
“오늘 광산에서 소금을 잔뜩 가져와서 다행이군.”
그런 다음 배추를 소금에 마구마구 절였다. 소금이 무척 많이 들었는데, 이럴 것 같아서 광산에서 있는 대로 캐왔다.
많은 대야에 배추를 담고 그걸 절이고 있으니 꽤나 진풍경처럼 느껴졌다.
“우와 배추가 엄청 많아. 지금 뭐하시는 거지?”
“김장하는 것 같음.”
“김장? 그게 뭐임?”
“님 김치도 안 먹어봤음?”
“아, 김치. 나는 안 먹는데. 저렇게 담그는 거구나.”
사냥하면서 농장을 구경하던 학생 친구들의 말이 들렸다.
음, 젊은 친구들 중에 김치를 안 먹는 사람이 있다지.
그런 말은 30년 전에도 있었던 걸로 안다.
지금은 그 비율이 더 심해졌는지, 아니면 덜해졌는지는 모르겠다.
메주도 뭔지 모르는 것을 보면 2050년대인 지금은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아, 전통이여, 그대는 계속 사라지는구나.
절로 이런 말이 나오는 것 같지만 그럼 너무 전통주의자처럼 보일 것 같아서 참았다.
여하튼 1시간 정도 시간을 들여 배추를 전부 절였다.
“액젓이 만들어지려면 아직 30분 정도가 남았는데. 고춧가루는 아까 말려뒀고······ 양파와 마늘을 다질까. 무도 좀 썰고.”
김치를 담그려면 당연히 양념을 만들어야 한다.
이 게임의 레시피로는 고춧가루에 양파, 무, 마늘, 액젓이었다.
그 외 추가 재료도 있었지만, 기본 재료는 그런 것이다.
현실의 김치는 여기에 부추를 더하고 취향에 따라 굴을 넣거나 한다.
하지만 나는 취향 타는 김치를 만들 생각은 없으므로 기본 재료만 쓸 생각이다.
너무 내 취향으로 만들면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남의 집 김치는 전혀 입에 대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재료를 다지기로 한 나는 조리대를 꺼내 양파와 마늘을 다지고 무를 채 썰었다.
“으음, 양이 좀 많군.”
“저도 돕겠습니다.”
100포기 분량의 채소를 다듬는 것은 장난이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골렘이 도와주기로 했다.
나는 조리대 하나를 더 만들어서 골렘도 채소를 다듬을 수 있도록 했다.
골렘은 가죽 장갑을 끼고 나보다 능숙한 솜씨로 무를 채 썰었다.
골렘이 일의 반 이상을 해준 덕분에 1시간 정도로 전부 끝낼 수 있었다.
그사이 액젓이 만들어지고 양념을 버무릴 준비가 끝났다.
“음, 어린 시절이 기억나네. 어머니께서 김장을 하면 나는 겉절이를 조금씩 먹기도 했지.”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면서 옛날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제 혼자 살아서 그런 일이 없어져버렸지만 말이다.
뭐, 어머니 말마따나 결혼이라도 한 뒤, 마누라가 김치를 담근다면 모를까.
하지만 결혼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 문제다.
서른이 가까워지니 대학시절의 피 끓었던 청춘도 점점 식어가는 느낌이다.
그래, 나무가 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가끔은 그게 공허하거나 두렵게도 느껴지지만, 이 게임을 하고 난 뒤엔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혼자도 나쁘지 않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래저래 인연이 없는 것도 같고. 참, 김치 담그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는 내 스스로에게 조소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감성적인 기분이다.
마음속으로는 내심 연애라도 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내 자신을 달랠 뿐이었다.
나는 너무 감성적으로 변하는 마음을 잊기 위해서 김장에 집중했고, 어느덧 양념을 다 버무렸다.
“다 됐다. 팔이 빠지는 줄 알았어. 골렘이 아니었으면 100포기나 담그지 못했을지도 몰랐겠다.”
“과찬이십니다, 주인님.”
내 칭찬에 골렘은 매우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김치를 담갔으면, 일단 맛을 봐야지.”
나는 곧바로 김치 하나를 주욱 찢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안으로 투척.
아삭아삭 아그작아그작 김치를 씹어먹었다. “으음, 마시쪙. 바로 이 맛이야.”
한국인의 반찬, 김치.
느끼한 맛이라면 직빵으로 잡아버리기도 하지만, 밥과 맛있는 김치만 있어도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다.
돈가스에도 분명히 어울리는 반찬이 될 것이다.
“마무리로는 김치를 김장독에 담아야겠지만······ 이렇게 많은 김치를 김장독에 담으려면 항아리가 엄청 커야하겠다. 그냥 인벤토리에 넣어야지.”
“공간효율적으로 옳은 선택이라고 판단됩니다.”
골렘도 찬성했으니 나는 주저 없이 김치를 인벤토리에 담았다.
다음은 좀 쉬었다가 돈가스를 만들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