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군옥수수 >
나는 느긋하게 광산에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강에서 옥스의 목을 축이기도 했고, 칠면조나 토끼를 상대로 불돌이와 실버가 사냥을 하기도 했다.
갑옷도 옷으로 바꿔 입어서 여유가 넘쳤다.
가죽물통에 든 와인을 홀짝이면서 거북이가 되어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태산이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다녀왔어, 골렘아.”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경비를 서고 있는 골렘의 모습이었다.
오늘도 농장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농작물이 거의 다 자랐습니다.”
“음, 그래. 조금 쉬다가 수확해볼까?”
광산에서 대략 4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나는 조금 휴식을 한 후, 수확을 할 요량으로 편하게 땅에 누웠다.
와인을 홀짝이면서 땅에 누워있는 기분은 무릉도원에서 노는 기분이었다.
“주인님, 농작물이 다 자랐습니다.”
“수확하러 가자!”
냐오오옹
브어어엉
배 위에 물방울과 태산이를 얹어두고 쉬는 중에 골렘이 다가와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났고, 물방울은 놀라서 뒤어갔다.
태산이는 등딱지에 숨어서 데굴데굴 굴렀다.
뒤집혀서 브어어엉 거리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으나 불쌍해 보였으므로 얼른 뒤집어 주었다.
멍멍멍!
왈왈왈!
월월월!
근처에서 서로 모여 낮잠을 청하던 실버, 불돌이, 골드도 어느새 깨어나선 활달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작물들이 풍성하게 자란 밭을 뛰어다니면서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모습이다.
특히 보리밭에 숨으니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천천히 보리부터 수확해야겠다.”
잘 익은 보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확하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아름다운 것은 질 때가 있는 법.
물론 그건 꽃에 비유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지만, 보리밭의 풍경도 농부의 감성으로는 보리도 꽃만큼 아름다웠다.
이런, 정말로 농부가 된 기분이잖아?
“Who let the dogs out!"
멍! 멍멍 멍멍멍!
대낫질을 하면서 보리를 벨 때, 흥이 돋아 팝송의 한소절을 불렀다.
그러자 실버가 화음에 맞춰 울음 소리를 내었다.
그다음은 불돌이, 다음은 골드가 따라 부르는 식이라 재밌다.
나는 그걸 농부가 삼아서 부르며 보리를 모두 수확했다.
“이걸로 맥주를 만들 수 있겠군.”
원래는 맥아를 쓰지만, 게임의 일관성을 위한 허용으로 보리가 쓰인다.
지금껏 다른 술들이 그랬듯이 맛은 가장 좋은 걸로 해놓았을 텐데, 어떤 맛일지 기대가 되었다.
사실 국산 맥주는 악명이라고 할 정도로 맛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가상현실이 만들어지는 시대에도 바뀌지 않는 악명이라니, 어찌 보면 참 대단한 것이기도 했다.
“다음은 사탕무네.”
사탕무는 내가 이 게임을 하고 처음 수확했던 기념비적인 작물이다.
쓰이는 곳이 많아서 그냥 무대용으로도 쓰지만, 설탕을 만드는 용도로도 쓴다. 지금은 김장을 담그는데 쓰일 무의 대체품으로 심었다.
사탕무로 만든 김치는 맛이 있을까? 김치에 단맛이 조금 추가될 것 같은데 맛있을지 잘 모르겠다.
물론 김장의 주역은 무가 아니지만 말이다.
“사탕무는 쓰이는 곳이 많으니까 자주 심어야겠다.”
사탕무는 매운탕거리의 곁재료로도 쓰인다.
설탕에도 꾸준히 필요해서 소모가 많은 편이다.
한 번에 여러 개 수확되는 작물도 아니기 때문에 100개를 심으면 100개 밖에 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자주 심을 필요가 있었다.
“다음은 배추! 크, 알 굵은거 봐라.”
김장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배추!
꼭 김장이 아니더라도 배춧잎은 여러 요리에 써먹기도 한다.
요리할 것도 없이 된장에 찍어 고기쌈을 해먹어도 맛있고 말이다.
“김치 담그기엔 정말로 딱 좋을 것 같군. 근데 100개나 심어놓고 생각하는 거지만, 이걸 다 김장하려면 애 좀 써야겠네.”
“스킬을 이용해 만들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진 않을 것입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배추를 수확하면서 골렘과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서 무와 배추를 100개나 심었으니 기왕 하는거 김치 100포기를 만들고 두고두고 먹고 싶었다.
선술집 반찬으로 내놓으면 100포기도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꼭 선술집 용이 아니어도 내가 먹을 용도로도 중요할 것 같다.
가상현실이긴 하지만 한국인은 밥과 김치 아니겠는가?
그렇게 배추도 전부 수확했다.
“다음은 양상추, 음. 이것도 역시 실하군.”
양상추는 샐러드용으로 심었다.
돈가스와 함께 내놓을 샐러드로 말이다.
샐러드의 핵심은 당연하게도 신선하고 질 좋은 재료.
그런 면에서 양상추는 있는 그대로 샐러드나 다름 없었다.
칼로 쪼개고 잘라 드레싱만 뿌리면 샐러드가 될 것 같았다.
“다음 녀석도 기대되는 녀석이지.”
양상추를 다 수확한 뒤, 마지막으로 남은 녀석이 있었다.
바로 옥수수!
샐러드에 콘옥수수를 첨가하려고 심었는데, 품을 보니 그대로 따서 구워먹고 싶은 비주얼이었다.
“군옥수수 먹고 싶다······ 소스를 잔뜩 뿌려 먹으면 맛있겠지?”
흔히들 ‘마약’이라고 음식들이 인기다.
진짜로 마약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약처럼 맛있는 음식말이다.
그 중 하나가 마약옥수수다.
버터, 마요네즈, 설탕으로 소스를 만들어 뿌운 뒤 파마산 치즈가루를 뿌리면 하얀 치즈 가루가 옥수수에 남는데 그게 꼭 마약 뿌린 것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다른 재료는 다 있는데, 치즈가 애매하네. 치즈 가루가 있으려나?”
“치즈 가루는 조합 스킬을 통해 만들 수 있습니다. 보통 요리 중에 치즈가루가 필요한 경우, 자동으로 조합 스킬이 적용되지만, 치즈 가루만 필요한 경우 조합 스킬로 만들면 됩니다.”
“아하, 고마워 골렘.”
골렘의 말을 들은 나는 조합 스킬의 제작 카탈로그를 찾아보았다.
[조합, 치즈가루
치즈를 잘게 가루로 만든 것. 음식에 뿌려 먹는 용도로 쓰인다.
필요한 재료 : 치즈 1개
필요한 스킬 : 조합 스킬]
“음, 그래. 이거면······ 요리 스킬을 안 써도 마약 옥수수 정도는 내가 직접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내 요리 솜씨는 사실 똥손에 가깝지만, 그래도 간단한 요리는 할 줄 안다.
게다가 이 게임은 재료가 워낙 맛있어도 재료의 맛만 잘 살리면 맛없지가 않다.
생선구이로 그건 이미 증명되어 있었다.
나는 간식으로 마약 옥수수를 해먹을 생각에 옥수수를 빨리 수확했다.
300개 안팎의 옥수수가 수확된 것 같았다.
콘옥수수할 것들은 넘쳐나니까 좀 먹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잔뜩 구워서 야무지게 먹어야지.”
10개 정도의 옥수수를 가져와선 껍질을 벗겼다.
버터, 마요네즈, 설탕을 필요한 만큼 준비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섞은 뒤, 옥수수에 바른다.
잘 바르기 위해서 ‘붓’을 만들었다.
일전에 주운 칠면조의 깃털로 만들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옥수수를 막대기에 꽂아넣고 모닥불에 굽는 것이었다.
“크으, 내, 냄새가 너무 좋아.”
옥수수와 버터 굽는 냄새가 너무 좋았다.
요리 스킬에 의존하지 않고 만드는 것은 오랜만인데도, 왠지 맛이 좋을 것 같은 느낌이다.
금방 하나가 다 구워졌다.
“츄릅······ 이제 여기에 치즈가루를 뿌리면, 완성!”
환상적인 비주얼의 마약 옥수수가 만들어졌다.
비주얼은 괜찮은데, 과연 맛은 어떨까?
나는 참지 못하고 한 입 물어먹었다.
잘 구워진 옥수수알이 버터와 마요네즈와 어울려서 짠맛을 잘 내고 있었다.
동시에 설탕이 단맛을 낸다.
단짠단짠. 맛이 없을 수 없는 법칙이다.
치즈의 담백함도 느껴졌고 말이다.
“크으, 너무 맛있어. 음.”
나는 콜라도 만들어 먹었다.
이런 군것질에는 콜라다.
정신 없이 먹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멍멍멍
왈왈왈
월월월
우선 옥수수를 먹을 수 있는 견종 삼총사의 눈길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군침을 흘리며 보고 있는 이들은 따로 있었다.
“저 아저씨 또 맛난 거 먹는다.”
“이번엔 직접 만들어 먹는 거 같은데.”
“그럼 직접 만들어 먹지 누가 만들어줌?”
“내 말은 요리 스킬을 쓰지 않은 거란 말임. 아저씨 평소에 선술집에서 파는 건 요리 스킬에 의존한 거였음. 그런데 저건 직접 만든 거 같네.”
“아, 그런 차이가 있었음? 몰랐네. 그나저나 저 옥수수 존맛일 것 같다.”
구경꾼 유저들이 숙덕이고 있었다.
이제 내가 스킬을 쓰고 만드는 것인지 아닌지도 구분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나를 구경하면서 분석한 모양이었다.
흠, 딱히 기분 나쁘거나 한 것은 아닌데······ 단순히 구경에만 그치지 말고 생활 스킬을 직접해보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내 경쟁자가 생기는 것일수도 있지만, 골렘과 했던 대화가 생각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느긋한 재미’를 알아줬으면 했다.
그러면 죽어버렸다는 골렘의 창조주, 그러니까 개발자도 기뻐할 것이지 않는가?
어쩐지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공진씨! 저 왔습니다!”
“앗, 시화씨. 오셨군요.”
다음 옥수수를 맛나게 먹고 있었는데, 시화가 구경꾼들 사이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옥수수에 정신이 팔려서 모르고 있다가 시화가 나타나자 환호성을 질렀다.
“와 랭크 1위 흑태자잖아?”
“군신 길드의 길드마스터!”
“최고의 프로게이머!”
“여기 오면 자주 구경할 수 있다던데, 레알이었네.”
“잘생겼다!”
그들은 시화에게 길을 터주면서도 그런 반응을 보였다.
시화는 곧바로 (갑옷을 입었다고 믿기 힘든 움직임으로) 울타리를 넘어 들어왔다.
그는 손님으로 인정받은 상태라 실버도 짖기 보단 오히려 혀를 헥헥 거리며 환영하고 있었다. “제가 너무 늦었나요?”
“아뇨 적당히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갈까요?”
“네, 여긴 이목이 좀 많군요.”
나는 곧바로 그를 선술집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그에게도 군옥수수를 콜라와 함께 대접했다.
“이건 스킬을 안쓰고 직접 만들어본 겁니다. 먹어보니 맛은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화는 군옥수수를 먹기 시작했다.
흠,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프로게이머가 아니라 모델 같은 사람이다.
게임이라 외모를 고친 것일까? 하지만 내가 알기로 원판의 10%이상은 변형할 수 없는 걸로 안다.
장애인의 결손부위는 예외지만 말이다.
즉, 현실에서도 제법 잘 생긴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 사람이 군옥수수를 먹는 모습은 꽤 그림이 나왔다.
뭐, 어쨌거나 나도 그 앞에서 체면 차리지 않고 군옥수수를 냠냠쩝쩝 먹었다.
“오늘도 정수랑 강화석을 주러 오셨습니까?”
“네, 하지만 오늘은 더 특별한 것을 가져와 봤습니다. 우선 그 두 개부터 받으시죠.”
시화는 곧바로 교환창으로 아이템을 넘겼다.
[스켈레톤의 정수 50개]
[슬라임의 정수 50개]
[그리즐리베어의 정수 50개]
[흑우의 정수 2개]
[강화석 7개]
“평소처럼 일곱 가지로 만들어드리면 됩니까?”
“네, 하지만 오늘은 이걸 가져와 봤습니다.”
시화는 그렇게 말하며 하나를 더 보여주었다.
[만티코어의 가죽 20장]
“혹시 가죽이 더 좋다면 더 좋은 방어구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시화는 기대어린 눈길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