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트로페 마을 >
“슬슬 가야겠군.”
바다를 마음껏 즐겼다.
나뿐만 아니라 애들도 재밌게 시간을 보낸 모양이니, 이제 돌아갈 때였다.
막상 떠나려니 아쉽기도 하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니 다음을 기약하고 해변을 떠났다.
해변을 나오니 트로페 마을의 입구가 바로 보였다.
목책과 경비병들이 있는 것은 내가 왔던 마을인 하펜 마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의 전체적인 풍경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리스 로마의 해안가 마을 같네.”
해안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흰색 집들의 미관이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한 번쯤 교과서에서라도 보았음직한 그리스나 이탈리아 쪽의 해안가 마을의 풍경 같았다.
아예 이곳의 컨셉이 지중해나 열대지방 같은 남국 컨셉인 듯했다.
나는 눈이 즐겁다고 생각하면서 마을 안을 구경하려고 입구로 다가갔다.
“처음 오는 이방인인가? 정령사인가? 드문 직업을 가진 이방인이군. 트로페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하네.”
“네, 안녕하세요.”
입구에 다가가자 경비병 NPC가 살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인사에 답하면서도 마을을 둘러보았다.
하펜 마을과는 또 다른 점이, 이곳에서 보이는 유저들은 갑옷이나 옷이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이곳의 사냥터는 평균 레벨이 훨씬 높은 곳인 모양이었다.
“혹시 궁금한 거라도 있나?”
“음, 방금 저 해변에서 오는 중인데······ 꽤나 한적한 곳이더군요. 그렇게 좋은 곳에 사람들이 왜 없는 걸까요?”
“하하, 특이한 것을 묻는 친구군. 거긴 안전지대라 몬스터도 없어서 이방인들이 찾질 않는다네. 사냥에 열을 올리는 이방인들이 그곳에 한가롭게 해수욕이나 즐길 리는 없으니까.”
“저는 방금 그곳에서 실컷 놀다 왔는데요. 그런 멋진 곳을 두고 사냥만 한다니, 그 쪽이 더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정말 특이한 친구군! 하지만 나도 솔직히 그렇게 생각한다네, 우리 마을은 멋진 풍경이 많은데도 이방인들은 사냥만 바쁘게 하는 편이지.”
“안타까운 일이군요.”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껴서 말했다.
그 좋은 해변의 느긋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니, 물론 그 덕분에 나는 한껏 한적함을 즐겼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또 아니었다.
모두가 나처럼 게임에서 욜로 라이프를 즐기는 것은 아니니까, 사냥터가 아닌 빈 해변은 인기가 없을 법도 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선 거기까지 생각하고, 경비병에게 대화를 나누는 김에 마을의 지리에 대해 물어보았다.
“저쪽으로 가면 광장이 있다네, 대부분의 상점이나 길드는 그쪽에서 찾을 수 있을 걸세.”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잘 가게.”
경비병과 헤어지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멋지고 아름다운 미관들이 곳곳에서 보였지만, 유저들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수해동굴 트라이 할 사람 구합니다! 70이상 탱커, 힐러 우대, 도적 사절!”
“85레벨 격수 놉니다, 아무 곳이나 파티 사냥 감.”
“강화석 삽니다. 강화석 좀 팔아주실 분?”
다들 파티원을 구하거나 장사를 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거기서 그들과 나의 괴리감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낙원 같은 곳에 있어도 저 사람들이 찾는 즐거움과 내가 찾는 즐거움이 크게 다른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광장의 상점가를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호객행위를 하듯 각종 과일을 가판대에 둔 곳이었다.
분명히 그곳이 식료품점일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십시오, 손님.”
“여기가 식료품점이 맞나요?”
“네, 보시다시피 이곳에서 나는 식료들을 모두 취급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십시오.”
이곳의 식료품점 주인은 피부가 조금 까만 건장한 청년이었다.
NPC라서 당연히 연예인 같은 미남이었고 말이다.그는 친절하고 호감 넘치는 말투로 내게 답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가판대에 놓인 과일과 채소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지중해나 열대 지방의 과일과 작물들이 많았다.
코코아, 커피, 바나나, 레몬, 망고, 후추, 파파야, 파인애플······ 눈에 익은 것만 해도 그런 것들이었다.
“음? 이건 고추냉인가요?”
“네, 그것도 여기서 나는 작물입니다.”
“오······.”
초장과 고추냉이 간장을 만들고 싶었는데, 마침 고추냉이가 이곳에서 팔리고 있었다.
나는 고추냉이를 꼭 사기로 생각하면서도 앞서 본 과일과 작물들 중에 무얼 함께 살지 고민해봤다.
물론 씨앗으로 살 생각인데, 밭의 면적을 고려해보았다.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 과일인데, 과수를 할 수 있는 면적은 이제 작물 100개 정도만 심을 수 있는 넓이 뿐일 것 같았다.
농장을 넓혀 버릴 수도 있지만, 지금 농장은 상당히 커졌다.
아직 빈 땅이 많긴 하지만 무작정 마구 심어서 늘리면 나중에 낭패가 될지도 모른다.
사실 사과, 포도, 딸기도 조금 그런 편이고 말이다.
그 3가지 과일은 인벤토리에 이제 무진장 쌓여서 처분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식료품점에 헐값으로 다 팔아버릴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나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식료품점 청년에게 말했다.
“여기 씨앗도 팔죠?”
“네? 아, 네. 씨앗도 팝니다만, 그건 왜 찾으시죠?”
“물론 심으려고 하는 거죠.”
“심는다고요? 농부이신겁니까? 이방인이신데······.”
“아, 네. 농부입니다. 하하······.”
하펜 마을의 식료품점 아가씨가 처음 보인 반응을 보이는 청년이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농부라고 밝혔고, 그는 신기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생활 스킬을 하시는 이방인님은 처음 뵙는 것 같군요. 이곳에 밭이 있으셨던 겁니까?”
“이곳은 아니고 하펜 마을이라고······ 초보자 마을에 있습니다.”
“이곳보다 북쪽에 있는 곳 말이군요. 혹시 거기서 심으실 생각이신지요?”
“당연히 제 밭이 거기 있으니까, 거기서 심을 생각이죠.”
“그럼 아마 작물은 자라지 않을 겁니다.”
“네? 어째서······ 아 혹시, 기후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내 짐작을 말하자,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아차!’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긴 완연한 여름이나 지중해, 열대 같은 기후다.
하펜 마을은 춥진 않지만 봄 정도의 기후, 그러니 이곳의 작물이 잘 자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가 낭패라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가 말했다.
“혹시 모르지만······ 온실을 만들 수 있다면 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힘들겠죠.”
“온실이요?”
“네, 하지만 그러려면 건축 스킬과 유리를 만들 수 있는 대장기술 스킬이 필요한데, 그러실 리는······.”
“있습니다.”
“네?”
“둘 다 있습니다. 흠, 그럼 키울 수 있을 것 같네요.”
“농부신데······ 건축에다가 대장기술도 하신다고요?”
“네, 생활 스킬은 전반적으로 다 해요.”
“······정말 특이하신 분이시군요.”
“자주 듣는 말이에요. 그보다 씨앗을 사죠. 후추 씨앗 25개, 고추냉이 씨앗 25개, 그리고 바나나, 파파야, 레몬, 망고 씨앗 각각 10개씩 주실래요?”
“45000골드입니다.”
“한 개당 500골드인가요? 씨앗이 꽤 비싸네요?”
“지금 다른 곳은 모두 봄이고, 말씀하신 씨앗의 과일과 작물들은 이곳 특산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어······ 그런데 특산품이라면, 혹시 여기에 사과나 포도, 딸기를 팔면 더 비싸게 팔립니까?”
“네, 혹시 가지신 게 있으십니까? 비싸게 사드리겠습니다.”
“······.”
대략 4000개씩 있는 것들을 판다고 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리라고 하면 별 수 없지만, 이 쌓인 과일들을 처분하고 싶긴 했다.
게임이나 썩는 것은 아닌데도, 괜시리 팔리지 않는 작물을 둔 농부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나는 결국 그에게 그것을 말했다.
“수, 수량이 터무니없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죠.”
“어떻게 이렇게 많으신 거죠? 아무리 이방인님이 농사를 지으시면 작물이 빨리 자라도······ 하루 종일 수확만 하고 계시진 않으실 텐데······.” 물론이다.
회사에 나가야하니, 나는 하루의 반 이상을 그곳에 있다.
대신 골램이 잔뜩 수확해주는 것이지만 말이다.
“말씀드리기 복잡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런 겁니다. 사는 것은 곤란합니까?”
“······이렇게 많이 파신다면 가격 폭락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감안하고 파신다면 살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곳보다 이곳에 파는 것이 더 좋겠죠? 다른 지역의 과일이니까요.”
“그렇죠, 포도는 다소 우리 지역에서도 나긴 하지만요.”
“그럼 가격을 협상해보죠. 등급과 상관없이 개당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그럼······ 사과는 개당 500, 포도는 300, 딸기는 400에 사겠습니다.”
“각각 2000개씩 판다면 골드는 충분히 내실 수 있으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그렇게 팔죠.”
“그럼······ 240만 골드입니다.”
“고맙습니다.”
거래가 성사되면서 악성재고(?)였던 과일을 한층 줄일 수 있었다.
뭔가 농부로써의 부담감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이걸로 안마의자를 산값을 그대로 벌어들였다.
선술집의 하루 매출에 절반 정도를 한 번에 번 것이다.
농산물 직매도 돈이 안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내일도 여기서 사과와 포도, 딸기를 팔아야할 것 같다.
폭락을 감안하더라도 여기선 그나마 하펜 마을에서 파는 것보단, 값을 더 쳐주니 말이다.
나는 그 점을 물어보고 싶어져서 식료품점 청년에게 물어보았다.
“내일도 와서 팔아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가격은 더 쳐드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대로만 사주셔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억지로 가격 협상을 할 수도 있었지만, 돈 욕심을 그리 내지 않기로 하고 수긍했다.
이미 240골드씩 버는 것만으로도 현실의 240만원을 번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면, 과욕일 것 같아서 적당히 하기로 했다.
돈 버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어디까지나 게임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마법사 길드는 저곳인가요?”
“네, 텔레포트 서비스를 받으시려는 것이군요?”
“바로 아시네요.”
“하펜 마을로 돌아가시려는 것 같으니까요.”
“네, 그럼 나중에 또 뵙죠.”
“안녕히 가십시오.”
식료품점 청년의 인사를 뒤로하고, 나는 마법사 길드로 향했다.
그곳의 카운터······ 그러니까 하펜 마을의 마법사 아가씨가 있는 곳에는 조금 마른 청년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남자 NPC들이 많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말투는 무례하진 않지만 조금 냉정한 듯했다.
나는 마법사 청년에게 말했다.
“하펜 마을로 텔레포트 서비스를 받고 싶습니다. 여기 있는 애들 모두랑요.”
멍멍!
음머어어어어
꼬꼬꼭
내 말에 실버와 옥스, 호크가 울음소리로 답했다.
마법사 청년은 어쩐지 그 아이들을 차갑게 내려다보곤 말했다.
“4만 골드입니다.”
“네.”
“그런데······.”
“네?”
“조금 만져도 괜찮겠습니까?”
마법사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실버와 아이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생각보다 부드러운 성격인 모양이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고, 그는 곧 풀어진 얼굴로 동물과 정령 친구들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