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플레이어-77화 (77/239)

< 59화 5일차 로그인 >

슬럼프라는 것은 회사원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운동선수나 작가도 아니고 회사원에게 무슨 슬럼프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유독 일이 잘 잡히지 않는 날이 있는 것은 회사원도 마찬가지다.

사실 없다고 주장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주말 구분도 없이 출근하고 일하고, 야근하는 것을 반복하면 말이다.

웃긴 생각이긴 하지만 <마일스톤>이 어쩌면 그런 슬럼프의 원인이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쉬고, 먹고 마시면서 노는 것만으로도 돈을 더 버니, 현실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런 치기어린 생각으로 4년 동안 버틴 대기업 사원직을 내팽개칠 생각은 없지만, 뭔가 의욕 없는 하루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용자 신원 ‘사공진’확인

<마일스톤>에 접속하시겠습니까?]

“한다.”

게임 5일째, 오늘은 어쩐지 처음 게임을 할 때 같은 생각으로 접속하고 있었다.

목마른 자가 오아시스를 찾는 기분으로 말이다.

곧 주변의 풍경이 내 농장으로 바뀌었다.

회사일로 굳어진 기분이 풀어지면서, 가장 먼저 보이는 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골램아, 안녕!”

“오셨습니까, 주인님.”

우뚝이 서 있는 골램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그는 항상 같은 기계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골램에게 가까이가서 그의 갑옷 몸체를 두들기며 말했다.

“반갑다. 보고 싶었어.”

“저와 실버, 호크도 보고 싶었습니다.”

“아참! 호크야, 실버야!”

꼬꼬꼬

멍멍!

골램의 말에 호크와 실버를 불렀다.

그러자 호크와 실버가 멀리서 뛰어오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실버가 뛰어가 나에게 안겨선 얼굴을 핥아대었고, 호크는 양반처럼 걸어왔다.

그런데 호크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

“호크가 이렇게 컸었나?”

꼬꼬꼭

못 본 사이에 호크의 크기가 분명히 커진 것 같았다.

칠면조보다 좀 더 큰 정도로 말이다.

새치고는 꽤 커서 대머리 독수리 정도는 될듯했다.

닭이 그 정도 크기가 되면 위엄이 상당하다.

어쩐지 철의 대화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제가 경비를 대신할 수 있게 되면서 호크는 실버를 호위견으로 사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호크는 레벨이 50이 되어서 ‘싸움닭’이 되었습니다. 이제 전투능력이 크게 올랐습니다.”

“그렇구나! 확실히 발톱토 날카롭고, 부리도 더 위협적이야.”

꼬꼬꼭

[호크가 당신의 칭찬에 기뻐하지만 지능이 낮아서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지능은 그대로인 모양이구나.”

“아직 닭의 개체에서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진화를 거듭하면 지능도 개선될 것입니다. 다음 진화는 100레벨에 이루어집니다.”

“기대가 되는데? 음, 일단 다른 애들도 불러야겠는데······.”

정령들을 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난 그 전에 내 정신력을 확인해보았다.

[정신력 83]

“지능이랑 정신력 음식을 먹고 부르는 게 좋겠다.”

정신력이 100이 되면 중급정령을 3마리 부를 수 있을 것이다.그럼 태산이나 바람이를 중급정령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누굴 중급 정령으로 부를까?

그것도 조금 고민이 되었다.

게으르고 늘 의욕없지만 그래도 바람이보다 일찍 공헌한 태산이?

아니면 좀 늦게 합류했지만 충직한 바람이를?

“주인님, 수확물을 보고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 그래.”

“사과 2387개, 포도 2227개, 딸기 2167개······.”

“자, 잠깐. 뭐라고?”

“다시 불러드리겠습니다. 사과······.”

“아니 잘 들었어. 근데 수확량이 너무 많잖아?”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골램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주인님이 부재중이셨던 64시간동안 8시간마다 50그루의 과일 나무에서 수확한 양입니다. 양봉의 효과에 의해 평균 6개의 수확량이 있었습니다. 이 수확량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렇구나······.”

“계속 보고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응.”

“양털 320개, 계란 80개, 우유 64리터, 꿀 64리터, 마나 물망초 32개, 송로버섯 32개를 얻었습니다. 또한 나무수액을 3000개 채취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수, 수고했어.”

나는 규모가 다른 수확량을 보고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자동으로 수확해주는 존재가 생긴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의 크기가 다르단 것이 느껴졌다.

음, 정말 대단해. 골램, 대단해.

마음속으로 박수를 친 나는 얼른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 정신력이 올라가는 음식을 먹기로 했다.

사과파이나 사과타르트가 있으면 좋겠지만 불돌이가 필요하다.

기왕이면 한꺼번에 다 소환하고 싶어서 사과주스를 마셔보기로 했다.

나는 요리 스킬로 사과주스를 만들곤 거기에 꿀까지 타서 마셨다.

[요리 스킬 레벨 업!]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를 마셔서 갈증이 해소됩니다.]

[포만감이 약간 차오릅니다.]

[활력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꿀이 추가 재료인 설탕을 대체합니다.]

[양질의 꿀이 더해져서 추가효과가 강화됩니다]

[추가효과, 지능 + 17, 정신력 + 17]

정신력이 딱 100이 되었다.

원래는 14 정도 오르던 것인데, 꿀이 더해져서 3이 더 오른 모양이었다.

여하튼 정령 친구들을 모두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거 없이 정령술을 사용해 모두 소환했다.

[불돌이가 중급정령으로 소환됩니다.]

[물방울이 중급정령으로 소환됩니다.]

[바람이가 중급정령으로 소환됩니다.]

[태산이가 하급정령으로 소환됩니다.]

결국 태산이를 하급 정령으로 소환했다.

바람이는 밭을 일군 후 비료를 뿌릴 때 중급 정령이면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태산이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사실 태산이는 신경쓰지 않을 것 같다.

멍멍!

왈왈!

“불돌이가 반가운 모양이구나, 실버.”

멍멍!

실버는 불돌이가 나타나자마자 불돌이와 이리저리 서로의 꽁무니를 쫓으며 놀았다.

꼬옥 꼬꼬

냐아아아아

“물방울은 호크가 마음에 들어?”

냐아아옹

물방울은 호크 곁에 병아리처럼 머물렀다.

덩치가 커진 호크인데도 전혀 겁먹지도 않는다. 물에서 자신을 태워준 일 덕분인지 호크와 친한 모양이었다.

삐이이이익

[바람이가 당신의 어깨에 앉습니다.]

“바람아!”

삐이익

바람이는 작은 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작지만 눈매가 매처럼 날카로운 모습이 용맹하다.

[바람이가 당신을 보고 경례를 합니다.]

“응응, 그래그래.”

경례를 한다는 표현을 이제 더 이상 글로만 볼 필요가 없었다.

바람이는 직접 날개 하나를 들어 올려 경례를 했기 때문이었다.

바람이는 내 어깨가 좋은지 거기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앉아있지만 전혀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불돌이를 만져도 뜨겁지 않은 거랑 비슷한 이유인 것 같았다.

[태산이가 당신을 보며 꾸벅꾸벅 좁니다.]

“태산아, 너만 하급정령으로 불러서 미안해.”

[태산이가 꾸벅거리면서 괜찮다고 합니다.]

태산이는 자신만 하급 정령인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오늘도 바위 같은 몸체를 꾸벅꾸벅 흔들며 졸 뿐이었다.

이 녀석······ 중급 정령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거북이? 나무늘보?

아 참, 그러고 보니 잊은 것이 있었다.

“골램아, 어제 묻는 걸 잊었는데, 정령술로는 속성강화를 할 수 있다며?”

“그렇습니다. 중급 정령부터 정령술을 이용해 아이템에 속성강화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법의 인챈트와 유사합니다. 다만······.”

“다만?”

“강화석을 정령강화석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강화석은 어디에서 나와?”

“이 근처에선 나오지 않습니다. 본래 강화 사용되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고레벨 광산 사냥터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한 마디로 여기선 얻을 생각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보는 얻었으니 시화에게 한 번 말해볼 것은 될 것이었다.

“아, 그래. 그 사람이 접속하면 귓속말해달라고 했었지.”

자연스레 시화가 한 말이 떠올라서 귓속말을 했다.

“시화씨, 접속했습니다.”

[공진씨군요! 기다렸습니다.]

“늦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뭐 시간을 정하고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닌데요.]

“네, 그런데 말씀드릴 것이 몇 개 있습니다.”

[뭐죠?]

“일단 가죽이랑 양모가 꽤 많습니다. 정수만 가져다주시면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정수라면 이것저것 모아놨습니다. 가면 보여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속성강화란 것도 가능하게 된 것 같습니다.”

[속성강화요? 그게 뭐죠?]

“정령술을 이용한 강화 같습니다.”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시화는 속성강화란 것에 관심을 보였다.

“저도 말로만 설명을 들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강화석을 들여서 정령의 속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뭔지는 정확히 해봐야 알겠죠. 하지만 저한텐 강화석이 없어서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그 강화석이란 것이 한 개에 얼마죠?”

[10만 골드입니다만······.]

“······저렴하진 않네요.”

[그래도 저는 어쩐지 흥미가 동하는군요. 사실 정령술은 정령 육성과 전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너무 과소평가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성강화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죠. 제 감이긴 하지만 공진씨가 만드는 것이니 분명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만나 뵙고 이야기

하도록 하죠.]

“네.”

시화와의 귓속말은 거기서 끝났다.

그럼 시화가 오기 전까진······ “놀자, 얘들아!”

······놀고 싶어졌다.

농사를 지을게 있긴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놀고 싶었다.

멍멍!

왈왈!

꼬꼬꼭

삐이이이익

야오오옹

[꾸벅꾸벅]

불돌이와 실버는 나한테 혀를 핥으며 애정표현을 했고, 호크는 물방울을 등에 태우고 호수를 둥둥 떠다녔다.

바람이는 그런 호수 위를 날아다녔고, 태산이는 여전히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그런 모두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오늘 하루 종일 느꼈던 무기력함을 떨쳐버렸다.

시화가 오고 나서 이야기를 나눈 뒤,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어보고, 선술집을 열어 장사도 하고, 또 시화가 물건을 사가고, 그런 식으로 오늘도 ‘내가 하고 싶을 것을 하면서’ 이 소중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현실에선 일의 산에 파묻혀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말이다.

[수상한 쪽지가 빛을 냅니다.]

그때, 이젠 어쩐지 반가운 메시지가 떴다.

나를 이런 즐거움으로 이끌어 준, 작은 종이쪽지······ 히든 피스가 빛나고 있었다.

[히든 일일 도전과제 퀘스트 발동!]

[퀘스트, 식료를 아무거나 100개 만들어라.

당신은 이제 어엿한 생활의 달인이다. 튜토리얼 격인 히든 퀘스트들을 제대로 했다면 아무 식료나 100개 만드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클리어 조건 : 가공품으로 아무 식료를 100개 만들기

클리어 보상 : 500 업적 점수]

[이 퀘스트는 24시간 이내에 다시 발동하지 않습니다.]

골램이 말해준 히든 일일 도전과제 퀘스트였다.

식료 100개라, 쉬운 퀘스트다.

밀가루만 100개 만들어도 완료가 가능하다.

이런 수준의 퀘스트들이라면 이제 더 이상 퀘스트에 끌려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뭔가를 하다보면 자동으로 깨져 있을테니 말이다.

나는 메시지창을 닫곤 좀 더 휴식을 취했는데, 얼마 후 시화가 도착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