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매운탕 - 무료 마지막 분 >
“시화씨, 저입니다.”
[안녕하세요, 공진씨. 무슨 일이십니까?]
귓속말을 하자, 시화에게서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시화님, 방금 제가 레더아머를 만들었습니다. 이번엔 오크의 정수를 써서 만들었는데, 좀 봐주셨으면 하는군요.”
[그렇습니까? 옵션이 어떻죠?]
“그러니까······.”
시화의 물음에 나는 레더아머의 방어도와 내구도, 그리고 세트효과를 설명했다.
그러자 시화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런······.]
“왜 그러시죠? 별로인가요?”
[아닙니다. 너무 성능이 좋아서 이건 또 얼마에 사야할지 걱정이 되어섭니다.]
“······.”
[사실 지난번 양모 옷들도 저희 길드의 탱커와 딜러들이 갑옷 안의 이너아머로 입어서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이건 갑옷이라 이너아머로는 못 쓰겠지만 가죽옷을 입는 딜러에게 주면 DPS가 폭등할 것 같군요.]
“DPS는 뭡니까?”
[초당 대미지······ 그러니까 Damage Per Second라는 의미입니다. 딜러들의 역량 차이를 구분 짓는 기준이죠. 전투력이 30프로나 올려주는 옵션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보다 강한 적을 상대 할 때란 조건이 붙어 있는데요?”
[그건 보통 레이드몹을 겨냥한 아이템들에 자주 붙어 있는 조건입니다. 보통 기준이 레벨이죠. 레이드몹은 유저 개개인보다 강하기 때문에 그걸 사냥할 땐 그런 옵션이 항상 붙어 있는 격입니다.]
“그렇군요.”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사고 싶을 정도입니다.]
“저를 속일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으시는군요?”
[그게 장기적으로는 바보짓이란 걸아니까요. 제가 공진씨를 속인다면 공진씨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저와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게다가 만약 공진씨가 다른 길드와 거래를 트게 된다면 오히려 막심한 손해겠죠. 여하튼 오늘도 부디 저희에게 팔
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또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뭐죠?]
나는 레더아머 외에도 말할 것이 있었다.
어제까진 붉은 석양초를 이용한 체력회복의 물약을 만들었는데, 오늘은 마나 물망초로 마나회복의 물약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곧바로 시화에게 말했다.
“······그러니 혹시 마나 물약은 필요 없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당연히 필요합니다. 레이드할 때 마법사 계열은 특히 마나 물약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물론 탱커나 다른 딜러들도 마나를 소모하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조금씩 필요하죠. 만들어 주신다면 사겠습니다만······ 전 좀 더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것이요?”
[네, 공진씨가 만든 것은 다 특별하니까요. 체력 회복의 물약도 추가 회복량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아하.”
[만약 비슷한 효과가 나온다면 체력 회복 물약과 똑같이 비싸게 사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만들고 나면 또 연락드리죠. 오늘도 비슷하게 찾아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그때 말씀을 나누죠.”
[알겠습니다.]
시화와의 귓속말은 거기서 끝냈다.
그러자 골램이 나에게 알렸다.
“주인님, 농작물이 전부 자랐습니다.”
“오! 드디어.”
이것저것하다보니 4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매운탕 곁재료를 위해 심은 채소들, 마늘, 깻잎, 콩나물, 쑥, 파, 사탕무들이 다 자란 것이다.
현실에서도 텃밭으로 자주 키우는 채소들!
나는 얼른 보고 싶어서 밭으로 뛰어갔다.
“우와!”
곧 감탄사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쫙 펼쳐진 녹색의 밭.
귀농을 꿈꾸는 이들이 곧잘 떠올리는 광경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사탕무 50개가 전부였는데······ 어느새 600개라니, 정말 감개무량한데.”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고작 사탕무 50개를 키울 때와는 눈으로 보는 스케일이 달랐다.나는 당장이라도 모두 수확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사탕무부터 달려들어서 뽑기 시작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주인님.”
“잠깐만! 이걸 다 손으로만 하려면 힘들 거야. 호미 같은 거 좀 없나.”
“있습니다. 목공 스킬이나 대장기술 스킬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알겠어, 찾아볼게.”
이런 채소류는 대낫으로 베어 수확할 수도 없고, 다 손으로 캐려니 힘들 것이 분명했다.
나는 목공 스킬에서 호미를 검색해보았다.
[목공, 호미(나무)
한국의 전통적인 농기구. 농사에 다용도로 사용된다. 이건 나무로 만들어서 일회용에 가깝다.
필요한 재료 : 목재 1개
필요한 도구 : 망치, 목공 스킬 Lv1 ]
이것을 두 개 만들어서 하나는 골램을 주고 서로 반대쪽에서 수확을 시작했다.
쪼그려 앉아 채소들을 캐는 것은 느리지만 흙장난하는 기분이라 재밌었다.
주말농장 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대낫으로 곡류를 베어서 추수하는 것과는 뭔가 달랐다.
원래 이 게임을 하기 전에 귀농하면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비록 허황된 꿈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전원주택을 사고 거기에 작은 텃밭을 마련해 이런 소소한 채소들을 심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르고 추수하면서 사는 것이 귀농을 꿈꾸는 회사원들의 로망이다.
현실에선 그런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포기하거나 아니면 주말농장 정도로 만족할 따름인 것이다.
냐아아앙
[물방울이 땀을 흘리는 당신에게 시원한 물을 뿌립니다.]
[바람이가 당신에게 시원한 바람을 불어 땀과 물을 말립니다.]
“고맙다, 이 녀석들.”
귀농한 기분에 취해 열심히 추수를 하는 나에게 물방울과 바람이가 물을 뿌리고 말려주었다.
땀이 시원하게 말라서 더위가 가셨다.
나는 가정을 차리진 못했지만, 꼭 가족들과 함께 주말농장에 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더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추수를 이어나갔다.
어느새 사탕무를 다 수확했고, 파를 파내었다.
그 다음엔 무수하게 많이 자란 콩나물들을 조심스럽게 수확했고, 당장이라도 고기쌈을 해먹고 싶은 깻잎도 추수했다.
그 동안 마늘과 쑥을 골램이 추수했다.
“어마어마하게 많네!”
인벤토리를 확인하면서 나는 탄성을 자아냈다.
몇몇 작물들은 고추처럼 한 번에 얻는 수확량이 달랐다.
마늘은 457개, 깻잎은 239개, 콩나물은 876개, 쑥은 322개, 파와 사탕무는 100개씩이었다.
맛 좋은 채소들로 들어가 있는 인벤토리는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이제 만들 수 있는 요리의 범위가 어마어마해졌을 것이다.
매운탕은 그저 하나의 예일 뿐이다.
고추장을 만들었으니, 그냥 불고기를 만들어서 고추장에 깻잎을 사먹어도 맛있을 것이다.
나는 절로 입이 귀에 걸렸다.
하지만 더 좋은 소식이 들렸다.
“주인님, 고추장의 숙성이 완료되었습니다.”
“드디어······.”
골램이 고추장의 숙성이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고추장을 만들기 위해서 보리와 고추를 심었고 그걸로 메주와 고춧가루를 만들었다.
메주를 통해 전통적인 체험도 해봤고, 고추도 말려보았다.
어쩐지 꽤 긴 장정을 거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매운탕을 만들 재료가 다 모인 셈이다.
나는 얼른 고추장이 있는 항아리로 달려갔다.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니 매우면서도 향기로운 고추장 냄새가 났다.
군침을 참지 못하고 한 손가락 퍼서 먹어보니, 사먹는 고추장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못 참겠다. 빨리 만들어야지.”
나는 요리 스킬 제작 카탈로그를 열었다.
그리고 서둘러서 매운탕을 검색했다.
[요리, 매운탕
고추장과 생선을 이용해 만드는 얼큰한 찌개. 웬만해선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필요한 재료 : 물고기 종류 1마리, 콩나물 1개, 사탕무 1개, 고추 1개, 고춧가루 1개, 소금 1개, 고추장 약간, 마늘 1개, 적당한 양의 물
추가 재료 : 적당한 곁재료
필요한 도구 : 적당한 가열도구, 냄비, 요리 스킬 Lv3]
"이거다!“
당연하게도 매운탕은 제작 카탈로그에 있었다.
나는 정령술로 만든 가열기 하나를 꺼내서 넓은 냄비를 그 위에 두었다.
물방울을 시켜 냄비에 물을 채웠고, 요리 스킬을 썼다.
그러자 인벤토리에서 메기 한 마리가 나왔다.
그리고 필요한 재료에 속한 재료들이 함께 나와서 적당하게 썰렸다.
요리 스킬에 의해 저절로 요리되는 요리들!
나는 가열기를 작동시켜서 물을 끓였다.
곧 다듬어진 메기가 들어갔고, 고추장과 고춧가루, 소금, 마늘로 이루어진 양념이 투하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콩나물과 무가 투입됐는데, 이걸로 만족할 내가 아니었다.
“쑥, 깻잎, 파를 추가재료로 넣는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쑥과 깻잎, 파도 인벤토리에서 나와 냄비 속으로 들어갔다.
보글보글 소리를 내면서 끓는 매운탕······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아까 타르트를 먹어서 배가 부른데도 어쩐지 밥을 먹고 싶어졌다.
“밥······ 밥을 지어야 해.”
나는 정령술로 만든 밥솥을 꺼냈다.
[요리, 밥
한국인의 얼과 혼이 담긴 주식. 밥이다. 설명은 더 이상 필요 없다.
필요한 재료 : 벼 1개, 적당량의 물
필요한 도구 : 솥, 가열 도구, 요리 스킬 Lv1]
“취사!”
매운탕을 끓이면서 밥도 지었다.
매운탕이 끓는 냄새와 밥 짓는 냄새가 섞여서 위를 더욱 굶주리게 만들었다.
“뭐지, 이 맛있는 냄새는?”
“저기 끓이고 있는 건 설마······.”
“매운탕! 매운탕이다!”
“이 게임에서 매운탕도 만들 수 있었어?”
“게다가 밥냄새도 나는데?”
구경꾼들도 맛있는 냄새에 숙덕이고 있었다.
흐흐흐흐,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란다.
나는 선술집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찾는 것은 바로 술!
숙성통에 들어 있는 스카치 위스키!
매운탕은 술과 마시기 아주 좋은 안주다.
물론 외국에는 안주 문화가 한국처럼 있진 않기에 외국인 바이어가 보면 기겁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선 그런거 신경 쓸 필요가 조금도 없다.
나는 오늘 만든 유리잔에 쪼르르 술을 따르고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다 됐나?”
매운탕은 이미 완연하게 붉어져서 맛있게 익고 있었다.
밥도 때맞춰서 익는 듯했다.
뜸을 좀 들여야 맛있겠지만, 공기밥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먹기로 했다.
나무 그릇을 즉석에서 만들어 밥을 담고 오늘 만든 수저를 꺼내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매운탕의 국물을 먼저 한술 떠먹어보았다.
“크으······ 마, 맛있어!”
얼큰하고······ 짭짤하고······ 생선의 기름 때문인지 기름지기도 한 국물.
끝내주는 조합이었다.
나는 얼른 한 술 더 뜨고 밥도 한술 더 먹었다.
배고프다고 외치던 위가 드디어 만족하는 기분이었다.하지만 매운탕의 묘미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건 메기 매운탕, 메기는 통째로 매운탕이나 찜으로 익혀 먹는 물고기다.
당연히 살을 발라 먹는 맛으로 먹는 물고기.
하지만 이 게임에선 구이로 해먹어도 될 만큼 잔가시가 없기 때문에 젓가락으로 살을 뜨니 아주 노릇노릇한 메기의 살이 잡혔다.
나는 그 큼지막한 흰 살을 꿀꺽 먹었다.
그리곤 스카치 위스키를 한 모금 했다.
그 맛은 정말이지······
“하아······ 죽을 것 같다. 너무 맛있어서.”
······먹으면 천국에 갈 것 같은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