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보리메주 >
그 후 나는 얼마간 수영하는 물방울을 보면서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호크와 골램이 물고기를 10마리 가량 낚았다.
나는 그것들을 인벤토리에 챙기면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고 생각하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골램아, 이제 낚시는 좀 이따 하자.”
“예, 주인님. 이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음······.”
나는 잠시 생각했다.
식당 오픈을 위해 요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사과파이 외에 메뉴를 늘리기로 했는데, 일단 안주용 과일 모둠은 요리 스킬을 쓸 것도 없이 사과 정도만 깎아서 주면 될 것이었다.
그 외에 만들기로 계획한 요리는 호수의 물고기를 이용한 매운탕.
그걸 위해서 고추장을 만들려고 했고, 그것에 필요한 재료들을 샀었다.
밀, 쌀, 보리, 고추.
내 생각대로라면 이걸로 고추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고추장을 만들어야 해.”
“제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현재 가진 작물로 고추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만드는지 한 번 말해볼래?”
나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골램의 지식과 대조해보려고 물어보았다.
현실과는 달리 고추장을 만드는 과정에 게임적 허용이 있을지도 모르니 필요한 일이었다.
“먼저 조합 스킬로 고추를 고춧가루로 만들어야 합니다.”
“밀가루를 만들 때처럼 직접 빻을 필요는 없구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1시간 정도 고추를 햇볕에 건조시켜야 합니다.”
“그건 어렵지 않겠네.”
“그런 다음 메주가루를 만들기 위해 메주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메주는 보리를 이용해 보리 메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메주를 만드는 데엔 일련의 간소화된 제조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건데?”
“가마솥 따위를 만들어 그곳에 물을 담고 조합 스킬을 이용해 보리 알곡을 그 안에 넣습니다. 그 후 푹 삶은 뒤 삶은 보리 알곡을 꺼내 담아서 발로 으깹니다. 반죽이 된 보리 알곡을 모형에 따라 반죽하면 자동으로 메주가 완성됩니다. 한 번의 스킬을 통해 4개의 보리
메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완성된 보리 메주는 발효가 필요하기 때문에 발효통에 넣어 2시간 동안 발효시켜야 합니다.”
“복잡하네. 하지만 이런 편이 현실적이긴 할 것 같다.”
다만, 이런 현실성이 생활 스킬의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음식이 사과주스처럼 스킬만 써도 ‘짠’하고 나타나도록 만들면 뭔가 생활 활동을 ‘체험’하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하면 훨씬 편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개발진은 아마도 그런 의도에서 이런 요소를 만들어둔 것 같다.
“그럼 또 가마솥을 만들어야겠네. 냄비로는 많은 양을 못 만들테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만 만들면 되니까, 골램은 잠시 기다리고 있어. 불돌아! 다시 용광로 지피러 가자!”
왈왈!
나는 불돌이를 데리고 다시 대장간으로 향했다.
가마솥도 대장기술 제작 카탈로그에 있었다.
별 특징은 없고 크기가 크기인지라 철괴가 5개 들었다.
20번 두들겨 만들고 나니 인벤토리가 아니면 운반이 불가능할 정도인 전통 가마솥이 만들어졌다.
그걸 가지고 다시 골램에게로 돌아왔는데, 문득 알아차린 사실이 있었다.
“그런데 가마솥을 쓰려면 또 가마솥용 화덕을 만들어야 하잖아?”
“그렇습니다. 벽돌과 황토를 조합하여 가마솥용 화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과파이를 굽는 화덕은 오븐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마솥을 사용할 순 없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태산이를 부르지 않아도, 여분의 황토가 많이 있어서 불돌이를 이용해 벽돌을 구울 수 있었다.
그리고 건축 스킬을 이용해 전통적인 냄새가 나는 가마솥용 황토 화덕을 만들 수 있었다.
“가마솥을 올려볼까, 골램아 도와줘.”
“네, 주인님.”
가마솥의 크기와 무게가 상당했으므로 화덕 위에 올리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골램이 도와줘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올릴 수 있었다.
가마솥을 올린 나는 조합 스킬의 제작 카탈로그를 열어서 보리 메주를 찾아보았다. [조합, 보리 메주
보리의 알곡을 이용해 만든 메주. 보리로 대두를 대신하여 만든 메주로, 보리된장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된다.
필요한 재료 : 보리 4개, 충분한 양의 물
필요한 도구 : 가마솥, 조합 스킬 ]
[보리 메주는 간소화된 제작 과정이 요구됩니다. 제작하시겠습니까?]
나는 바로 제작 버튼을 눌렀다.
골램의 말대로 바로 만들어지지 않고 제작 과정이 있다는 시스템 메시지창이 떴다.
나는 ‘그렇다’는 커맨드를 입력하곤 제작을 실행했다.
제작을 실행하자 물방울에게 부탁해 물을 채워둔 가마솥에 4개 분량의 보리 알곡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불돌아, 장작에 불 좀 떼워줘.”
왈왈!
화덕의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돌이에게 불을 부탁했다.
불돌이가 힘껏 짖으면서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면서 얼마지 않아 보리 알곡이 구수하게 삶아지는 냄새가 났다.
“저기 뭘 하는 중이지?”
“뭔가 구수한 냄새가 나는데.”
“구린 냄새 같기도 하고······.”
“전통적인 무언가를 하는 거 같음.”
구경꾼들은 내가 뭘 하는지 의아해하면서 쑥덕이고 있었다.
아무도 메주를 쑤는 중이란 것을 모르는 듯했다.
문득 어쩌면 좀 이따가 메주를 보란 듯이 만들어도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젊은 친구들이라면, 아니 사실 28살인 나 정도 나이여도 21세기 중반인 지금은 많은 전통 지식이 잊힐 시대였다.
“보리 알곡은 30분 정도만 삶으시면 됩니다.”
“그럼 그동안 대야 같은 걸 만들어야겠다.”
삶은 보리 알곡을 건져 올리고 담을 대야가 필요했다.
나는 목공 스킬의 제작 카탈로그에서 넓은 통을 찾을 수 있었다.
대야 대용으로 딱이었고, 주저할 것 없이 망치를 들어 모형을 두들겼다.
나무 대야는 금방 만들었고 보리 알곡을 풀 수 있는 바가지 두 개도 만들었다.
그 후 나는 가까이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실버를 쓰다듬어 주는 걸로 시간을 때웠다.
사실 현실이라면 삶는 시간이 좀 더 길어야겠지만, 아마 이것도 게임이라서 간소화된 시간일 것이다.
“다 삶아졌습니다.”
“그럼 여기에 퍼 담자.”
“예, 주인님.”
바가지 하나를 골램에게 건네주고 함께 삶아진 보리 알곡을 가마솥에서 대야로 퍼 담았다.
물을 빼고 삶아진 보리 알곡만 담았는데, 이제 이걸 발로 으깨어 메주 반죽을 만들면 될 것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었다.
“물방울아 발 좀 깨끗하게 씻겨줄래?”
냐아아아아
물방울이 귀엽게 울면서 내 발을 향해 물줄기를 발사했다.
발에 맞는 물줄기의 느낌이 간질간질한 가운데, 우수한 세척력을 가진 물방울의 물은 내 발을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야의 보리 알곡에 발을 디뎠다.
“40회만 골고루 밟으시면 반죽이 완성됩니다.”
“그냥 밟기만 하면 되는거지?”
“그렇습니다.”
“다행이네, 베틀로 방적할 때처럼 리듬게임이라도 해야 하면 어쩌나 싶었어.”
만약 그랬으면 꼴이 좀 우스웠을 것이다.
그리고 DDR이나 펌프는 몸이 안 따라주어서 잘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나는 김장하는 기분으로 보리 알곡을 밟았다.
알곡이 으깨어져 메주 반죽이 되는 느낌이 발에 그대로 전해졌다.
불편한 전통적인 방식이지만 뭔가 민속촌에서 민속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반죽이 완성되었습니다.”
곧 반죽을 완성했다. 나는 대야에서 내려와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았다.
대야 위에는 메주 모양의 파란색 모형이 생겨져 있었다.
“모형을 따라 반죽을 뭉치시면 완성됩니다.”
“그럼 만들어 볼까.”
“저도 돕겠습니다, 주인님.”
나는 찰흙 공작하듯 보리 메주 반죽을 뭉쳤다.
전통적인 메주처럼 직육면체의 모양으로 말이다.
메주 고유의 구수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윽, 이 냄새는 뭐야?”
“누가 방귀꼈어?”
“저기 만드는 거에서 나는 거 같은데.”
“뭘 만들고 있는 거지?”
좀 전에 내가 생각했던 대로 구경꾼들은 메주를 쑤고 있어도 그게 뭔지 못알아보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우리나라의 전통의 소실과 단절이 느껴져서 입맛이 썼다.
지금도 고추장을 먹고, 된장을 먹지만 다들 그걸 어떻게 만드는지, 예전에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꼭 알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한 민족이 자신들의 전통을 모르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다.
흔히 얼이라고 하던가? 그런 것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저건 메주여, 젊은이들.”
“아저씨, 저거 뭔지 알아요?”
“너들도 된장찌개 먹잖여, 쌈장도 먹고. 예전에 그거 만들 때 쓰는 게 바로 메주여. 요즘은 공장으로 바로바로 만들어서 메주를 쑤진 않지만.”
“아, 맞아. 교과서에서 배운 적이 있어.”
하지만 그 와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투리가 심한 것을 보니 연배가 좀 있는 사람인 듯했다.
“어릴 즉에 시골에서 살 때 할매가 쑤는 걸 봤는디······ 이걸 여기서 또 보게 되네.”
“아저씨 울어요?”
“울긴! 메주 냄새가 매워서 그렇구먼! 허허허!”
그 사람은 옛 추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저 게임으로 구현된 메주를 쑤었을 뿐인데, 그래도 한 사람의 추억을 돌이켜 주었다니, 뭔가 훈훈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곧 골램과 4개의 메주를 완성했다.
“이걸 이제 발효통에 넣으면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전통 방식대로라면 천장에 매다는 걸 텐데.”
“메주의 경우 매달아 놓아도 2시간 동안 자동으로 발효됩니다. 하지만 공간적 효율을 따져볼 때, 발효통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이득입니다.”
“흠······.”
4개의 메주, 확실히 골램의 말대로 하나의 발효통에 넣어버리는 것이 간편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메주를 쑤어도 모르는 젊은 구경꾼들을 잠깐 보았다.
그러자 가끔은 비효율적인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일 때가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매달아 두는 게 좋겠어.”
“그렇다면 매달아 둘 곳과 끈이 필요합니다.”
“끈은 멧돼지 힘줄을······ 아니, 밀을 이용해서 만들어야겠다.”
기왕이면 전통방식을 최대한 구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밀의 짚단을 조금 써서 메주용 밧줄을 만든 뒤 전통방식대로 메주를 묶었다.
그리곤 그것을 농가의 처마에 묶었다.
농가가 서양식 나무집이긴 하지만, 최대한 전통방식을 따른 모습이었다.
“허허허, 저 사람 아주 똑같이 허는구먼! 진짜 메주여 메주!”
메주를 처음 알아 본 남자가 기쁜 듯이 웃었다.
메주를 처음 본 구경꾼들도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거나 영상을 찍었다.
“저걸로 된장, 고추장, 쌈장을 만든다고?”
“확실히 된장찌개랑 비슷한 냄새가 좀 나는데.”
“바보들, 수능 공부만 하지 말고 저런 상식도 아셈. 나도 메주는 알고 있음.”
“민속촌에서 볼 수 있던 것을 여기서 보는군요.” 구경꾼들이 늘어나면서 메주를 알아보는 이들도 늘어났다.
전통이 점차 잊혀 가는 이 세상에서도 그래도 전통은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조금 기뻤다.
그것을 기억하는 주체 중 하나가 현대기술의 정점인 가상현실이란 것이 아이러니할 따름이지만 말이다.
나는 이런 것을 구현한 개발진에게 묘한 감사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