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군신길드 시화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상당히 치밀하신 분이시군요.”
“회사원이다 보니 직업병 같은 겁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실 저도 제가 공진씨를 설득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매우 공손한 어조로 답했다.
유명세를 타고 있는 모양인데도, 매우 겸손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천성인지, 아니면 비즈니스적인 가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라도 겸손할 줄 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길드에 가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데는 성공했다.
곧 그가 말했다.
“일단 저희 길드에 가입하시면 레벨 업을 어느 정도 손쉽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 길드원 분들과 사냥을 할 수 있으니까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흰 철저한 실력주의로 길드원들을 뽑기 때문에 누구와 사냥을 하더라도 도움이 될 겁니다. 저희 길드가 찾아낸 좋은 사냥터 같은 정보도 공유하고요. 어떻습니까?”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제안은 내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에겐 그리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군요.”
“네? 제가 혹시 실언이라도 한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다른 분들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에겐 그렇지 않군요.”
“어,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선 저는 레벨 업보단 이 농장에서 농사나 다른 생활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느긋하게 농사짓기도 바빠서 레벨 업 하러 사냥을 다닐 여유는 없을 것 같군요. 느긋한데 바쁘다니, 조금 말이 이상하긴 하군요.”
“······.”
그는 나의 대답에 조금이지만 황당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의 입장이 조금 이해는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게임을 하면 레벨 업을 더 중요시 하지, 그냥 노는 걸 중요시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좀 이상하게 보이시긴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노는 게 더 재밌습니다. 히든 클래스를 찾지 않았어도, 그런 식으로 게임을 즐겼을 겁니다. 혼자서 조용히 농사를 지으면서요. 그게 제가 게임을 하는 이유입니다.”
“특이하시군요.”
“솔직하다고 해주십시오.”
나는 살짝 웃으면서 답했다.
그의 황당한 표정은 없어지고 다시 진지한 모습이 되었다.
직감적으로 그는 아직 나를 더 설득할 모양인 듯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게임을 즐기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다 하더라도 저희 길드가 제공해드릴 수 있는 이점은 많습니다. 이를테면 좀 전에 파신 사과파이를 저희가 더 비싸게 사드릴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마법사 계열 길드원들에게 도움이 될 터이니 누구라도 사고 싶어 할 테니까요.”
“조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요. 그런데 길드원이라고 서로 공짜로 해달라거나, 그러진 않는 모양이군요?”
“저희 길드 방침이 그렇습니다. 길드원끼리의 거래에도 대가지불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 규칙을 만들기 전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 길드 신입에게 금전을 지급받고 같이 사냥을 해준다거나, 아이템을 받는다거나 그런거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갑질은 완전히 없앴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불문곡직 추방조치를 취하고요.”
상당히 귀가 솔깃한 말이었다.
유명세가 높아서 오만하거나 뭔가 구린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진취적이고 깨끗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조직적 쇄신이 없다면 어지간해선 정상을 달리긴 힘들다.
그저 게임 길드에 불과하더라도 부패는 가장 두려워해야할 내부의 적이니 말이다.
“구미가 당기는군요. 하지만 아이템을 파는 것은 유저들이나 마을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게임머니에 그리 욕심을 부리지 않아서요.”
“······실례지만, 혹시 게임머니, 그러니까 골드가 현금이 된다는 것은 아시고 계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뉴스에서 본 정도는 됩니다. 예전엔 그런 거래가 불법이었는데, 요즘은 합법인 모양이더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돈이 되는지는 모르시는 모양이시군요.”
“네,”
나는 이점에 관해선 숨김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나는 정말로 게임머니의 현금화, 그러니까 ‘현질’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로 돈을 번다는 말은 여럿 들었지만, 나는 돈은 현실에서 일을 하여 벌어야한다는 주의라서 그렇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들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일스톤>의 경우는 아직 거래장이 열리지 않았지만, 다른 게임과 마찬가지로 1:1 시세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1:1? 골드와 현금이 같은 값으로 거래 된다는 말입니까?”
“예. 아마 변동은 없을 겁니다만.”
“······.”
이번엔 내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내가 가진 골드는 521000골드, 이것마저도 마법사 길드에 사과파이를 팔지 않은 값이다.
여하튼 이 돈이 곧바로 52만원 상당의 현금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이 게임을 한지 나는 겨우 이틀이 되었다.
하루에 26만원을 번 격이다.
내 월급이 보통 300에서 400 정도이니, 일급으로 치면 10만 원가량.
그것의 두 배를 벌었다는 계산이 서버렸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 그에게 물어봐야만 했다.
“혹시 52만 상당의 골드를 여기선 벌기 쉽습니까?”
“네? 쉽다곤 말씀 못 드리죠. 물론 열심히 하면 토끼만 잡아도 모을 순 있겠습니다만, 토끼로 모으려면 1만 마리 정도는 잡아야겠군요. 정상적으로 모으면 100레벨을 넘겨도 못 모을 돈입니다. 지금 제 레벨이 143에 개인적으로 모은 돈은 20만 골드 정도입니다. 원래는 더 벌었지만 장비를 맞추고 소모품을 사는데 많이 썼죠.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셨습니까?”
“제가 가진 골드가 521000골드입니다.”
“네? 저, 정말입니까?”
“네, 농사만 지어서 이것저것 NPC나 사람들에게 팔다보니 이렇게 모였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드물게 매우 경악한 모습이었다.
반면에 나는 조금 이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내가 자정까지 회사에서 일한 것보다, 8시간동안 수면모드로 게임해서 번 돈이 더 많다.
그것에서 조금 허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궁금한 것도 많이 생겼다.
“그래서 여쭙는 겁니다만, 왜 1:1 비율이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상식적으로는 그런 환율이 나올 것 같지 않은데요.”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현금거래를 합법화 하는 대신 환율을 1:1로 고정하였습니다. 사행성을 막기 위한 조치였죠.”
“말이 안 되는군요. 이래선 저 같은 사람은 돈을 너무 쉽게 만지게 되지 않습니까?”
“보통은······ 이런 경우가 드뭅니다. 아니, 없었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1:1 환율의 가치 정도로 게임 내의 경제가 유지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무래도 공진씨가 그 판을 깬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 게임의 농사라는 생활 스킬이 생각 이상으로 돈이 된다던가요.”
“제 생각엔 둘 다 일 것 같군요. 여하튼 이런 경우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강제로 1:1 환율로 고정시키다니, 법안 발의자가 누군지 알고 싶을 지경이군요.”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죠.”
내가 득보는 상황이긴 하지만, 경제학을 배운 나는 이게 의미하는 것이 뭔지 알기에 다소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1:1로 환율이 고정되면서 생기는 가치불일치에 의한 거품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별종이라곤 하지만, 1:1의 가치에 어긋나게 내가 골드를 너무 쉽게 번다는 의미였다.
만약 이것에 대한 대비책이 없다면, 나는 떼돈을 벌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이 게임이 그 전에 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게임에서 힐링과 재미를 찾고 있는 나로선 그걸 전혀 원하지 않았다.
나와 그는 서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쩌다가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버렸다.
본래는 길드 가입에 대해서 말했었는데 말이다.
곧 그가 말했다.
“사실 금전적 지원을 미끼삼아 공진씨를 설득하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요. 저희가 아니더라도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으실 것 같으니까요.”
“돈 버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닙니다. 저도 돈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는 게임에선 어디까지나 재미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말이죠.”
“굉장히 유쾌하신 분이시군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절 그렇게 길드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시는 겁니까? 이쯤 되면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본래는 그가 날 설득하면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내가 호기심이 생겨서 물어보게 되었다.
그는 곧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가능성 때문입니다.”
“가능성?”
“제가 길드원들을 받을 때는 보통 가능성을 봅니다. 저희들은 당연히 최고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것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보는 것이죠. 무조건 레벨이 높다고 가입을 권유하진 않습니다. 레벨이 높아도 게으르거나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보는 것이 가능성입니다.”
“저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단 말입니까?”
“네, 솔직히 말씀드려서 길드원이 먹었다는 음식이나 사과파이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길드에 공헌이 될 수준이지만, 아마 숨기신 역량은 그것 이상이라고 생각되는군요.”
“······.”
그의 말대로, 그것 외에도 숨겨진 역량은 더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본래는 제가 설득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호기심에 질 것 같군요. 제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럼 잠시······.”
나는 그렇게 말하곤 인벤토리와 장비창을 열어서 양모 옷과 초보자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곤 양모 옷을 그에게 건네었다.
“이 아이템을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이건······ 대단하군요. 그린스킨 족에게 10% 공격력 증가라니, 강화한 아이템입니까?”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강화가 아니라 그냥 만든 겁니다. 강화용 소재를 집어넣었을 뿐이죠.”
“생산직이 활성화 되지 않아서, 이런 것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갑옷이 아니라 방어도가 좀 낮지만, 옵션은 그린스킨 족을 상대하는데 최상입니다. 마법사들에게도 적용되는 옵션이라 가치가 더 높고요. 혹시 이런 것을 더 만들 수 있습니까?”
“광산의 고블린들을 죽여서 얻는 고블린의 정수가 강화용 소재입니다. 제 수준에서도 쉽게 구하는 것이죠. 재봉은 저도 한지 얼마 안 되어서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이런 걸 여러 개 만들게 되겠죠. 제가 내킬 때만 이겠지만요.”
“굉장합니다! 당장 이것만 양산해주셔도 저희가 다 사겠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길드를 가입하는 편이 좋겠군요?”
“······그렇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다소 초조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잠시 마지막으로 생각을 하다가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가입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우선 제 게임 플레이에 간섭이 없어야 할 겁니다. 저는 회사를 관둘 생각은 없습니다. 이대로 밤이나 저녁에 접속하는 걸로 만족합니다. 사냥이나 레이드나 뭐 그런 걸로 절 강제로 부르진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거래의 우선권은 드리겠습니다만, 거래권 자체는 엄연히 저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시화씨나 길드에서 부르는 값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거나 다른 이유가 있다면 저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물건들을 팔 겁니다. 예를 들어 이번 사과파이를 만들어도 길드에만 독점적으로 팔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서 제 사과파이를 사주시는 분들이나 마법사 길드에 팔 생각이니까요.”
“상관없습니다. 공진씨의 조건에 최대한 만족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염치없는 말이지만 이런 조건을 내걸어도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건 구체적인 상황은 말씀 드리기 힘들겠군요. 제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달라고 말씀드리는 수밖에는······.”
“당연히 도와드릴 겁니다. 길드원을 도와주지 않으면 길드의 존재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는 내 조건을 모두 수용하는 듯했다.
그만큼 내 가치가 높은 것일지도 모르고, 그의 성격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길드에 가입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와 그는 악수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