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가끔 일탈을 꿈꾼다.
대단한 일을 저지르거나, 굉장한 여행을 떠나는 그런 일탈이 아니다.
평범한 회사원이 꿈꿀만한 아주 작은 일탈.
예컨대 시적인 풍경이 펼쳐진 전원에서 밭을 가꾸는 망상, 흔히들 귀농욕구라 부르는 것 말이다.
물론 실제로 귀농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그저 하루 쯤, 혹은 마음 내킬 때 흙냄새를 맡으며 뭔가를 키우고 싶다는, 아주 이기적인 바람이다.
현실성 없는 망상에 불과하지만 일에 치여 사는 삶 속에서 꿈꾸게 되는 사막의 오아시스인 셈이다.
그런 덧없는 꿈을 바라던 어느 날, 우연히 스크린 광고를 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바라던 오아시스가 있었다.
아름다운 호수와 작은 농가가 있는, 그림 같은 풍경.
잠깐이지만 그런 장면이 지나갔다.
어느 가상현실 게임의 광고였기에, 곧 이어서 화려한 전투가 펼쳐지는 영상이 나왔다.
하지만 그 그림 같았던 조용한 풍경이 잊히지 않았다.
그곳이 마치 나의 이상향이었던 것처럼.
야근으로 지쳤지만, 집에 돌아가 그 광고의 게임을 찾아보았다.
<마일스톤>, 그 게임의 이름이었다.
1화 게임 접속 (1)
여느 도시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틀에 박힌 삶 속에서 살고 있다.
쫓기듯 경쟁하며 공부하고, 유명한 S모 대기업의 정직원으로도 입사했다.
신입사원으로 4년을 보내고, 나는 어느덧 첫 승진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삶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일탈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탈을.
[사용자 신원 ‘사공진’ 확인.
<마일스톤>에 접속하시겠습니까?]
<마일스톤>, 우연하게 알게 된 가상현실 게임이다.
이 게임을 홍보하는 광고 영상에서 나는 호수가의 작은 농가를 보았다.
이유 따윈 없지만, 내 마음이 그 잠깐의 풍경에 동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흥미 없었던 가상현실기기도 샀고, 어느새 그 게임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늘도 야근으로 늦게 퇴근했지만 이 게임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가상현실 게임은 자면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보다 시간도 4배 빨라서, 아침까지 느긋하게 할 수도 있다.
나는 접속을 묻는 인공지능의 메시지에 주저 없이 ‘예’를 입력시켰다.
[시작 마을을 선택 하십시오]
“아무데나.”
[임의의 장소로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래.”
어릴 적에 잠깐 했던 PC게임의 시작처럼 외형이나 이름 같은 것을 정하는 자잘한 커스터마이징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현실의 외형 그대로로 설정했고 캐릭터 이름도 현실의 이름인 ‘사공진’으로 정했다.
시작 마을을 정하는 물음에도 아무 곳이나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하펜 마을에서 시작합니다, 이정표가 당신을 이끌기를······.]
온통 하얗기만 했던 주변이 바뀌었다.
가상현실을 다루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사방에 사람들과 중세 시골풍의 건물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있는 곳은 유독 독특한 곳이었다.
사람 모형의 허수아비들이 늘어서 있고, 나와 똑같은 흰색의 평범한 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목검을 휘두르며 열심히 그것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저것이 ‘초보자 튜토리얼’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예전에 잠깐 했던 PC게임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말이다.
그러던 중, 나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허수아비를 치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한 건장한 서양인 남자였다.
바이어를 만나는 일이 있어서 외국인이 서툴지 않은 나지만, 그는 한국말로 나에게 물었다.
“새로 온 이방인인가?”
“이방인이 뭐죠?”
“자네처럼 마일스톤의 인도를 받고 온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네.”
이방인, 단어 뜻대로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다.
추측컨대 나 같은 유저나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NPC가 부르는 호칭인 듯하다.
그러니까 눈앞의 이 서양인 남자는 NPC다.
유창한 한국어도 그렇고, 나를 이방인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이곳의 사람, 나는 바깥의 현실을 사는 사람.
이방인이란 표현이 참 적절하다는 느낌이었다.
“난 처음 온 이방인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라네. 자, 인벤토리에서 목검을 꺼내서 허수아비를 쳐보게나.”
띠링
[퀘스트, 허수아비를 때려 전투감각을 익히자.
클리어조건 : 허수아비를 50회 때릴 것
보상 : 보리빵 10개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인벤토리창을 열려면 ‘인벤토리’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면 된다네. 거기서 목검을 꺼낼 수 있지.”
“······.”
나는 그의 말대로 인벤토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투명한 인벤토리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인벤토리창에는 목검만 휑하게 있었다.
나는 아이템을 꺼내는 연습 삼아서 그것을 클릭해보았고, 곧 손에는 목검이 쥐어졌다.
기본적인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목검을 꺼냈군, 잘했네. 자, 퀘스트도 떴을텐데, 어서 수락하고 자네도 가서 치게나.”
그의 말에 나는 목검을 들고 허수아비를 열심히 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뭔가 ‘이건 아니다.’라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이곳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다시금 잊히지 않는 풍경이 떠올랐다.
호숫가의 작은 농가.
그 그림 같았던 풍경.
나는 그런 자연을 맛보고 싶었지, 또 다른 경쟁을 하려고 비싼 가상현실기기를 산 것이 아니었다.
[퀘스트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퀘스트 선택 창에서 ‘아니오’를 눌렀다.
그리곤 이곳을 떠나려 했다.
“아니, 자네 어디 가는가? 퀘스트는 깨고 가야지?”
“퀘스트는 거절했습니다.”
“뭣?”
“그럼.”
나는 그에게 짧게 목례하곤 울타리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다소 당혹해하는 것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마을을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다.
중세풍의 마을 배경.
시골 냄새가 물씬 풍겼다.
NPC로 보이는 사람들이 진짜 사람처럼 생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고, 유저로 보이는 사람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숨 쉴 틈도 없이 북적대는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든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구밀도라면 도시의 거리가 더 높건만, 나는 이곳에서 생동감을 느끼니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마을의 목책까지 나서게 되었다.
목책의 문에 서 있던 경비병 NPC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초보 이방인이군. 마을을 나갈 생각인가?”
“네.”
“조심하게, 근처에는 온순한 동물들만 있지만 너무 멀리 가면 난폭한 동물이나 몬스터도 있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친절하게 말하는 경비병에게 친절한 말투로 대답하곤 목책을 나섰다.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든 가벼운 친절이었다.
마을을 나서니 사람들이 목검을 휘두르며 토끼를 쫓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뒷짐을 지고 느긋이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이 게임을 즐기는 모습처럼 보이면서도, 현실의 아등바등함을 피해 온 나에겐 맞지 않는다는 기분도 들었다.
적어도 아직은 저런 ‘사냥’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좀 더 조용한 자연 속으로.
하지만 경비병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너무 멀리 가면 위험한 녀석들이 나온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마을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는 곳을 둘러보았는데, 유독 내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