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다녀왔어
제니퍼 퀘이드를 죽인 후.
나는 그저 몇 가지 본능에 충실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
그리고 허기와 갈증을 채우는 것.
제아무리 ‘초 재생’이 있어도 생리적인 욕구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딘지도 모를 차원에 제대로 된 식량이나 식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때문에 나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크륵-!
차원에 널려 있는 몬스터.
녀석들의 피를 갈아 마시고, 살을 뜯어 먹었다.
그렇게라도 살아남고자 했다.
희망이 남아 있어서라기보단,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이 목숨은 녀석이 지켜 준 거니까.’
언젠가 그림자는 내게 말했다.
반드시 내 생을 보장해 주겠다고 말이다.
이는 최종 결전에서 녀석이 보인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목숨을 걸 각오를 했던 게 틀림없어.’
사실 제니퍼 퀘이드를 쓰러뜨릴 방법은 기존의 전략을 제외하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그림자 대신 내가 목숨을 걸고 ‘앞서간 자의 그림자’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녀석이 마무리를 짓는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다.
즉, 서로의 역할을 바꿀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편이 훨씬 합리적이었지만, 그림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끝까지 기회를 만들어 주는 일에만 집중했으니까.’
내가 희생하는 일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림자는 남은 생명을 불태워가며 내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심지어 녀석은 의식이 소멸해 가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부디 마무리를 부탁한다. 너를 믿는다.
언제나 그랬듯, 마지막까지 나를 격려해 준 것이다.
거기에 부응하여 제니퍼 퀘이드를 죽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가 무사히 살아남아야 비로소 녀석에게 도리를 다하는 거겠지.’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
무사히 탈출하여 현실로, 현생으로 복귀하는 것.
그게 바로 녀석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대로 죽으면 낙일에 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녀석들은 소멸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승리하고 싶었다.
그런 일념으로 나는 버티고, 또 버텼다.
…
…
…
더 이상 시간을 헤아리지 않았다.
이젠 스마트 워치도 고장 나버린 탓에 시간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다만 몬스터를 먹은 영향으로 새하얗게 색이 바랜 머리 길이를 보며 어렴풋이 유추할 뿐이었다.
‘야인이 따로 없네.’
피식 웃으며 몬스터의 힘줄로 새하얀 뒷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오늘도 별다른 수확은 없겠지만…….’
이를 알면서도 나는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이제는 탈출구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하나의 본능이 된 듯싶었다.
‘오늘은 어디로 가 볼까.’
나는 본격적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미구현 특성, ‘앞서간 자의 그림자’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스르륵-
지금껏 내가 거쳐온 길들이 짙은 음영으로 표시됐다.
이런 식으로 매번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길을 골라서 움직였다.
그러니 아예 탈출을 포기한 셈은 아니었다.
“어디 보자…….”
시야가 온통 짙은 음영으로 가득한 가운데, 유난히 빛나 보이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마음이 이끌렸다.
‘어디든 안 가 본 길이라면.’
딱히 상관없었다.
때문에 나는 주저 없이 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얼마나 걸었을까. 모르겠다.
구분 자체가 쉽지 않은 까닭이었다.
때문에 보통은 지칠 때까지 걷다가 대충 드러누웠다.
본래라면 그랬겠지만.
‘저 빛은…….’
오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걸으면 걸을수록 특성에서 비롯된 음영은 옅어졌다.
그 대신, 밝은 빛이 보였다.
이는 곧 내가 가 보지 않은 길을 의미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잠깐만.”
오래지 않아 나는 눈앞의 빛이 단순히 특성의 효과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빛무리가 일렁거렸다.
‘설마…….’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쳐 갔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마른침이 절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럼에도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다.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저벅저벅-
빛무리로부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나를 발견했는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일, 한?”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
듣는 순간.
“아…….”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단지 그뿐으로,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드디어 내가 미쳐 버린 건가……?’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눈앞에 있을 리가 없었다.
생각을 채 이어 나가기도 전에.
척-
어느샌가 그녀는 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 스승이 되어 A급으로 인도해 준 사람이자, 전우로서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한 사람.
그녀는 특유의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찾았다.”
오윤진.
세월이 흘러 외견은 조금 더 성숙해 보였지만, 목소리만은 그대로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진짜였어.’
지금 이 순간이 허구가 아닌 실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손짓했다.
“한참 찾았잖아.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따라오렴?”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벅저벅-
그녀를 따라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빛무리 속에 발을 내디딘 순간, 눈부신 빛무리가 시야를 뒤덮었다.
차츰차츰 본래의 색채를 되찾을 무렵.
그토록 그리던 현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현실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이름 모를 야산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지 않은 풍경,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하늘이 푸르고 태양이 하나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커다란 위안이 됐다.
무엇보다 다른 차원과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하아.”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윤진은 딱히 나를 채근하지 않고 잠자코 곁에서 기다려 줬다.
* * *
나는 현실로 돌아왔음을 충분히 만끽하고 나서야 그녀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운을 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죠……?”
흘러간 세월에 관한 질문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마지막으로 도대체 무슨 수로 나를 찾았는지 등.
쏟아내는 질문에 오윤진은 침착하게 대답해 줬다.
“그때 이후로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흘렀어.”
“……그렇군요.”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전부 무사해. 다만 피해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어.”
오윤진은 침중한 표정으로 연후가 당시의 전투로 인해 양팔을 잃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과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준 이후.
마침내 그녀는 나를 찾아낸 방법에 관해 운을 뗐다.
“그리고 널 찾아낸 방법이라……, 그건 틀림없이 기적이라고 생각해.”
오윤진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한편.
주머니 속에서부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보자마자 두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저건…….’
분명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티팩트였다.
아니나 다를까.
“맞아. 침식 현상에 대비해 윤진호 박사님께서 발명한 아티팩트야.”
“……역시 그렇군요. 여분이 남아 있었나요?”
“응, 운이 좋았지.”
아무래도 내 마나를 추적하는 아티팩트를 활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전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지만 전 아예 다른 차원에서 표류 중이었는데, 외부에서 마나를 감지하는 게 가능한가요?”
나는 지금껏 다른 공간을 넘어 다른 차원에 머물렀다.
제아무리 성능이 빼어나다 한들, 다른 차원을 추적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이는 오윤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불가능하지.”
“그럼 대체…….”
“윤 박사님과 논의 하에 계량을 거쳤어. 솔직히 가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행했지. 티끌이라도 감지할 수 있도록 말이야.”
오윤진의 말에 따르면, 균열을 발견했을 때를 대비해서라도 일을 진행시킨 모양이었다.
그녀는 외부에서 찾을 게 아니라 직접 균열로 들어가서라도 나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예상치 못한 현상이 더해졌어.”
“예상치 못한 현상이요?”
“정확히는 상상도 못 한 일을 겪었지, 내가.”
오윤진은 뜸 들이지 않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름 아닌 그녀의 미구현 특성, ‘재앙 예보’가 발동된 것이다.
“낙일의 몰락 사태가 끝난 이후, 내 특성은 단 한 번도 발동된 적 없었거든. 근데 지금으로부터 불과 한 달 전에 발동된 거야.”
“……무엇을 보셨나요?”
“균열과 너. 두 가지를 봤어.”
“……?”
“정확히 말하자면, 측정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가 균열을 통해 빠져나오는 재앙을 목격했지.”
오윤진은 알 수 없는 설명과 함께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는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하아, 아직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네.”
“어떤 말씀이신지…….”
“너에게 엄청난 기운이 느껴져. 초인의 그것이 아니라 몬스터 특유의 기운 말이야.”
“……설마!”
오윤진의 설명을 듣는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쳐 갔다.
‘생존을 위해서 몬스터의 피를 마시고 살점을 뜯었던 일 때문에 체내에 녀석들의 기운이 쌓인 건가?’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친 결과, 나는 몬스터와 유사한 기운을 띠게 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하얗게 물든 머리가 바로 그 증거인 듯했다.
“난 재앙을 접한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이 일대를 탐색했어.”
“일단 균열이 발생해야 들어와서 저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맞아. 사실 재앙 예보로 목격한 몬스터의 존재는 뒷전이었어. 이건 너만 알고 있어야 된다?”
오윤진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새끼손가락을 드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하늘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기적이지.”
진실로 그랬다.
그제야 모든 게 납득이 되는 한편.
가슴 속에서부터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건 다름 아닌 오윤진을 향한 고마움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린 한 팀이잖아?”
여명 말이야, 그녀는 나직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명색에 우리들의 리더인데.”
오윤진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저으며 웃음으로 말을 맺었다.
이윽고 그녀는 뭔가 생각났다는 양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지? 이건 진짜 신기하네?”
“네?”
“어디 보자, 지금 시간이…….”
오윤진은 별안간 시간을 확인하려는 양,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내 손을 붙잡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따라와! 지금 당장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걸음을 서두르는 오윤진.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녀에게 끌려갔다.
* * *
두 시간 후, 대강당.
“이것으로 국립 초인 아카데미 제51회 졸업식을 모두 마치겠…….”
지루한 목소리가 대강당 내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끼이익-!
별안간 대강당의 입구가 벌컥 열렸다.
내부에 있던 교직원은 물론, 생도들의 시선까지 전부 우리에게 꽂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곁에 선 오윤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네, 그치?”
“아하하, 그러게요.”
멋쩍게 웃음 짓는 순간.
“……!”
가장 먼저 교직원, 특히 진태진 교관과 고태식 교관이 입을 쩍 벌리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뒤이어 생도들 쪽에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 일한이-!”
다름 아닌 임강철이었다.
그는 소리를 내지르며 무소처럼 인파를 뚫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를 시작으로, 몇몇 생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입구를 향했다.
심지어 보법과 순간 이동 마법까지 쓰는 가운데.
“안일한!”
“일한아!”
가장 먼저 도착한 두 사람.
윤설하와 백유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나를 껴안았다.
두 명에서 그치지 않고 차은월과 임강철, 거기에 심인욱과 오윤서까지.
한꺼번에 내게 달려들었다.
와락-
양손으로도 감당하기 벅찬 까닭에 나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다 함께 뒤엉킨 채로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는 가운데.
나는 친구들을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