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내 보여 주지, 생명의 무게감을 말이야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 제정신인가?”
김재학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런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녀석들의 대처는 이상했다.
네 명이 전부 덤벼도 모자랄 판에 인원을 나누기까지 한 것이다.
‘연후와 진태진, 어째서 나서지 않는 거지?’
다른 이들과 달리 한 발짝 물러선 채로 상황을 관망하듯 지켜보는 연후.
저항할 의지조차 잃었다고 생각하면, 그의 행동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반면 진태진의 경우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도망치듯, 자리를 이탈한 까닭이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목숨이 위태로워져서 본성이 드러난 건가?’
하도 어이가 없어 찌푸린 눈으로 진태진이 향하는 곳을 지켜봤다.
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가 갑작스럽게 전선을 이탈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생도를 챙긴다, 라…….’
진태진은 그의 힘으로 강화된 몬스터 무리에 신음하는 생도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저들의 대처를 납득할 수 있었다.
‘나에게 대적하는 것이 가망 없는 일이라는 걸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로군.’
현재 전력으로는 무의미한 전투가 될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생도들이라도 살려서 도주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현재 남아 있는 두 사람의 목적까지도 단번에 이해가 됐다.
‘생도들을 살리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
진태진이 생도들을 피신시키는 사이.
고태식과 오윤진은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남은 듯했다.
즉, 미끼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모든 걸 깨달은 김재학은 속으로 조소를 지어 보였다.
‘어리석긴.’
정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이 공간의 주인은 김재학이었다.
그러니 그가 살아 있는 한 탈출은 불가능했다.
저들에게 남은 결말은 하나, 전멸(全滅)뿐이었다.
그럼에도 저들의 얼굴, 특히 시간을 벌기 위해 전면에 나선 고태식과 오윤진의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큭! 정말이지 걸작이로군!”
미끼를 자처했다는 건 결국 죽음을 각오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이를 악착같이 외면하며 필사즉생의 각오를 불태우는 모습은 그야말로 희극이 따로 없었다.
벌써부터 강렬한 쾌감이 온몸을 관통했지만, 김재학은 감정을 추슬렀다.
‘아니지, 이 정도로 만족해선 안 돼.’
이전의 치욕을 생각하면 갚아 줘야 할 건 아직도 많고 많았다.
즉,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 정도로 생각을 갈무리한 채 김재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마음껏 저항해 보거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
그럼에도.
“…….”
오윤진은 지금까지와 달리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심각하게 굳은 낯빛으로 마나를 전개했다.
말싸움으로 소모되는 심력조차 아쉬운 것이리라.
이는 고태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화아앗-!
황금빛 마나가 고태식의 전신을 두텁게 뒤덮었다.
A급 마법사와 A급 권사가 발휘하는 전력.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하찮게 보일 뿐이었다.
이는 단순히 오만함의 발로가 아니었다.
스윽-
텅 빈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김재학.
더는 무기가 필요 없어진 까닭이었다.
그대로 무심하게 내리긋는 순간.
쿠구구궁-!
검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망치의 형상으로 화하며 쇄도해 갔다.
갑작스러운 공세에 고태식은 권격으로, 오윤진은 마법으로 즉시 응수했다.
그대로 격돌하는 순간.
“크, 읏!”
“커흑……!”
두 사람의 표정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격의 차이를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어지는 공방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콰광! 쾅-!
오윤진은 ‘재앙의 마녀’라는 이명에 걸맞게 가히 재앙을 연상케 하는 마법을 잇달아 구사했다.
고태식 또한 ‘맹호’라는 이명이 부끄럽지 않은 수준의 공세를 매섭게 퍼부었다.
하지만.
“가엾을 정도로 약하군……!”
마녀의 마법은 김재학의 손짓에 허무하게 흩어졌다.
맹호의 권격은 김재학을 둘러싼 기파에 흠집조차 내지 못한 채 튕겨 나갔다.
전투는 그야말로 일방적이었다.
그래서일까, 김재학은 오히려 흥이 식어 버렸다.
‘어울려 주는 건 여기까지 하는 거로.’
격차를 만끽하는 건 이 정도면 족했다.
이제는 유린할 시간이었다.
누구부터 치욕을 안겨 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쩌-엉!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기파가 느껴졌다.
이는 S급에 도달한 그조차도 흠칫할 만큼 강렬한 기세였다.
‘대체 누가…….’
김재학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파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연후였다.
정체를 확인한 순간 김재학은 눈매를 좁혔다.
‘……전의를 상실한 게 아니었나.’
지금껏 사태를 관망하듯, 한 발짝 물러서서 지켜보던 연후.
그가 마침내 전면에 나섰다.
그것도 S급에 도달한 그조차 흠칫하게 할 정도의 힘을 갖춘 채로 말이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새로운 힘을 갖추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더구나 연후는 그처럼 아티팩트나 다른 무언가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닌 듯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문스러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힘, 예사롭지 않다.’
연후의 힘이 범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이만한 능력을 얻고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꼬웠지만, 그렇다고 방심하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심기가 불편했지만, 김재학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힘의 출처를 확인할 때까지는.’
조금 더 진지하게 임하기로 말이다.
판단 즉시 그는 양손을 휘저었다.
단순한 손짓에 요사스러운 검붉은 기운이 또다시 형상을 이뤄 갔다.
화아앗-
그 상태로 두 사람, 오윤진과 고태식을 향해 쏟아내며 움직임을 차단하는 한편.
슬슬 움직이려는 연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타닷-
지금껏 가만히 선 채로 농락하던 것과는 다르게 직접 움직여서 그런지.
“……!”
연후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반응했다.
하지만 이내 좀 전의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바탕으로 대응에 나섰다.
반격의 시작은 다름 아닌 진각이었다.
쩌-엉!
굉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회색빛 마나.
보는 것만으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가운데, 김재학은 가볍게 주먹을 내지르며 응수했다.
꽈릉-!
허공에서 그대로 맞닥뜨리자 어마어마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서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힘을 겨루는 가운데.
그제야 김재학은 예사롭지 않은 힘의 출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나치게 정순하다. 그렇다는 건…….’
고귀함마저 느껴지는 듯한 정순함.
이러한 기운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모든 생명체가 탄생과 동시에 지니게 되는 기운이자,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힘.
바로 생명력이었다.
‘……어쩐지 불쾌하다 싶더니.’
생명력은 현재 그의 무한한 힘의 원천이 되는 성질과 완전히 상극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성질의 문제일 뿐.
실제로 누가 더 우위를 점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생명력에는 한계가 있다.’
생명력은 타고난 기운인 만큼 사람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한계가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생명력의 한계는 곧 소멸, 죽음을 의미했다.
반면 그가 가진 힘은?
아티팩트를 매개체로 하여 침식 현상 특유의 불가해한 에너지가 바로 그 출처였다.
적어도 이 공간이 유지되는 한, 완전히 소모될 걱정은 없는 것이다.
‘자칫 힘에 집어 삼켜져 이지를 상실한 마물로 전락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김재학은 그런 우를 범할 정도로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더욱이 근래에 이르러 무수한 개량을 거친 아티팩트인 만큼 최악이 펼쳐질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김재학은 거침없이 쇄도했다.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마음껏 발악해 보도록!”
그가 광소를 터뜨리자 거기에 호응하듯, 파괴적인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이에 맞서 연후는 다시 한번 진각을 밟으며 본격적으로 권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무극삼권 제1초, 진천이었다.
쩌엉! 쩌-엉! 꽈릉-!
상극의 두 기운이 맞물려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특히 맞닿은 지점 이외에도 두 사람의 기운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서로를 압박했다.
김재학은 온몸이 저려 오는 고통 속에서도 광소를 터뜨렸다.
“목숨을 불태워서 고작 그 정도라니, 아주 가엾기 짝이 없구나!”
“……크윽!”
거친 신음을 흘리면서도 연후는 안간힘을 다해 맞섰다.
그사이.
지이이잉-!
오윤진의 마법과 고태식의 권격이 양쪽에서부터 날아들었다.
김재학은 코웃음을 치며 걷어내듯 오른팔을 휘둘렀다.
“어림없다!”
단순한 행동만으로 두 사람의 공세 정도는 충분히 파훼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후욱-!
교묘한 타이밍에 연후의 일격이 쇄도해 왔다.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었기에 김재학은 눈살을 찌푸리며 가일층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 여겼지만, 이번에도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오윤진과 고태식이 그가 가한 압박을 걷어내는 대신.
‘……도리어 공격해 온다고?’
연후의 일격에 대비하여 끌어올린 기운을 향해 공세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공격은 표면을 두드리며 흩어내는 수준에 불과할 뿐, 직접적인 타격은 전무했다.
하지만 거기에 연후의 일격이 더해지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쩌-엉!
연후의 일권에 담긴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티팩트의 힘을 바탕으로 S급에 도달한 이후, 처음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것이다.
“……커, 헉!”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후의 권격이 뭉게뭉게 피어나더니, 삽시간에 구름처럼 주위를 에워쌌다.
겪어본 적 있는 무공이었다.
‘애송이 놈의 무공……!’
무극삼권 제2초, 천라였다.
유성우처럼 빗발치는 권격에 검붉은 기운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물론 예전처럼 마나 순환이 어그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공세에 파훼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의 새로운 기운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좋지 않았다.
‘……아까 전과 같은 수모를 반복할 수는 없다!’
치욕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조금 전의 상황을 답습하지 않는 쪽이 훨씬 중요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었으나 김재학은 최대한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마녀와 맹호부터 확실하게 죽인다.’
거슬리는 두 사람을 처리한다면, 연후 한 명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실제로 연후의 상태는 처음에 비해 눈에 띄게 초췌해 보였다.
생명력을 소진하는 대가를 실시간으로 치르는 것이다.
즉, 오윤진과 고태식만 죽이면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판단과 동시에 김재학은 순식간에 간격을 벌렸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들어 두 사람을 향했다.
“이제 그만 죽어라……!”
서슬 퍼런 목소리.
마치 사형을 선고하는 듯한 발언에 검붉은 기운이 반응했다.
스르륵-
꿀렁거리며 급속도로 형태를 갖추더니, 이윽고 두 개의 형상이 나란히 나타났다.
망치와 쐐기.
망치는 고태식을 전신째 짓뭉갤 것이고, 쐐기는 마녀의 전신을 그대로 찢어발길 것이다.
흔들리지 않은 믿음으로 기운을 발출한 순간.
“지금입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름 아닌 진태진이었다.
고개를 돌려서 진태진 쪽을 확인하는 순간, 김재학은 두 눈을 부릅떴다.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진태진뿐만 아니라 수십에 달하는 인파가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저자들은 파견 나온 초인? 그렇다면 설마!’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몬스터 무리 쪽을 살폈다.
어느새 몬스터의 개체 수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남아 있는 몬스터라곤 생도들의 힘만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숫자였다.
“이런 일이……!”
그제야 김재학은 깨달았다.
진태진이 돌연 자리를 이탈한 이유를 말이다.
증원을 위한 것이다.
물론 한 명 한 명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수십에 달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쩌엉-!
십시일반 힘을 모아 맞서는 초인들.
그 결과, 무려 S급 수준에 달하는 공세를 막아냈다.
믿을 수 없는 저력에 오윤진과 고태식은 무사히 몸을 빼냈다.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갈 무렵.
“고작 그 정도라 했었나?”
연후가 이질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김재학은 악귀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빠득 소리 나게 깨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수단을……!’
또다시 무력하게 당할 수는 없다.
그런 일념으로 아티팩트에 과부하를 주려는 찰나.
다시금 연후로부터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보여 주지, 생명의 무게감을 말이야.”
연후의 두 눈에서부터 새하얀 광망이 폭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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