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전장의 매
제니퍼 퀘이드와 안일한.
둘 다 단신으로 전황을 좌우하는 S급 초인들이었다.
그런 파격적인 존재들이 서로를 마크하기 위해 사라진 지금, 상황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윤진은 판단과 더불어 머릿속으로 상대와 아군 측의 전력을 한번 가늠해 봤다.
‘남아 있는 전력을 따져 보면…….’
A급 초인 김재학과 최소 A급은 돼 보이는 몬스터 대군으로 이루어진 낙일.
반면 2백이 채 안 되지만, A급 초인 셋과 다수의 B급 초인으로 구성된 여명.
전력을 비교했을 때 숫자에선 밀릴지언정, 질적인 측면에선 우위였다.
‘무엇보다 우리 쪽에는 나를 포함해서 A급 초인이 셋이나 있으니.’
애초에 A급 몬스터는 B급 초인 두세 명 정도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A급 초인에 이르러서는 혼자서 A급 몬스터를 휩쓸어 버리는 수준이었다.
질적인 우위라는 판단도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윤진은 생각을 정리하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두 분, 우선 진정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두 사람, 고태식과 진태진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다만 이는 반응한 것뿐으로 둘의 표정은 여전히 낭패스러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
특히 고태식의 경우, 대놓고 살기를 뿜어내는 까닭에 압박감이 상당했다.
오윤진은 이를 지적하는 대신, 조용히 코어를 활성화시켜 압박감을 해소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생각해야 해요. 현실적으로 그 아이가 제니퍼 퀘이드를 전담하는 게 최선이에요.”
오윤진의 말에 진태진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다만 그뿐으로 별다른 반발은 없었다.
냉철한 성격답게, 그녀의 설명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고태식은 조금 달랐다.
“……자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기껏해야 핏덩이에 불과한 녀석이 적들의 수장을 맡아? 애당초, 그래야 하는 상황이 정상이라 보는 건가?”
안일한이 제니퍼 퀘이드를 맡는 것.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는 오윤진 또한 뼈저리게 통감하는 부분이라 대답할 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때문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했다.
바로 그때.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은 확실하지만, 한 가지는 정정해야 할 것 같소만.”
등 뒤에서부터 이질적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다름 아닌 연씨세가의 2집사, 연후였다.
그의 대답에 고태식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비교적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무래도 당신의 기억 속의 녀석과 지금의 녀석 간에 괴리가 있는 것 같아 덧붙이자면 제자 녀석, 그러니까 안일한은 일찍이 나를 넘어섰소.”
“……!”
“한 가지 더. 녀석은 현 상황을 정확히 예측했소. 우리가 녀석을 찾는데 활용한 아티팩트가 바로 그 증거요.”
“그렇다는 건…….”
“꽤나 오래전부터 예측하고, 이 사태를 혼자서 준비해 온 거겠지.”
“…….”
연후의 설명에 충격을 받았는지, 고태식은 입을 굳게 다물며 침묵했다.
이는 곁에서 듣고 있던 진태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윤진은 둘의 반응을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정 설명이 부족했구나.’
앞서 안일한과 의논했을 당시.
두 사람은 교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최대한 늦게 알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들에겐 실습 전날에 최소한의 정보만 공유한 만큼, 안일한에 관해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후 집사님이 도와주셔서 살았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돌연 연후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에 오윤진은 그가 의도적으로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한편.
서둘러 고태식에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녀석에게 과한 짐을 짊어지게 한 건 저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래서 더더욱 저희가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둘러야 한다?”
“빠르게 김재학을 제압하고, 그 녀석을 도와주러 가는 거죠.”
오윤진의 제안에 고태식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자조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너무 머리에 피가 몰려 있던 모양이구먼.”
“불민한 모습을 보였군. 면목 없다.”
진태진 또한 고개를 한차례 털어내며 진중하게 답했다.
두 사람의 긍정적인 반응에 오윤진은 마지막으로 짤막하게 덧붙였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이네요. 계획은 간단해요. 저희 넷이 김재학을 제압하고, 생도들을 도와 상황을 정리할 거예요.”
“그리고 김재학을 추궁하여 애송이 녀석이 있는 곳으로 가자는 건가?”
“정확해요.”
“좋아, 그렇게 하지.”
고태식은 대답과 함께 남아 있는 불안한 감정을 전부 털어냈는지, 곧장 김재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태진과 연후도 마찬가지로 무기를 늘어뜨리며 전투를 준비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오윤진은 판단 즉시 세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는 어딘가를 향해 순간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타닷-
그녀가 나타난 즉시 상대방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반응했다.
“어, 언니?!”
다름 아닌 그녀의 친동생, 오윤서였다.
오윤서가 무어라 질문을 쏟아내기 전에 오윤진은 신속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용건만 말할게. 네 친구들과 함께 최대한 버텨 줬으면 해. 가급적이면 다른 생도들도 신경 좀 써 주고. 할 수 있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부탁에 오윤서는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노력해 볼게.”
“고마워, 동생.”
오윤진은 별안간 오윤서의 머리를 꼬옥 안았다.
화들짝 놀라 떨어지려는 순간.
스슷-
그보다 한발 앞서 오윤진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오윤서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잠깐 응시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치면 가만 안 둘 거야.”
그걸로 감상을 끝내겠다는 듯, 오윤서는 곧바로 코어의 출력을 끌어 올렸다.
* * *
같은 시각.
“어떻게, 이야기는 잘 끝내셨는지.”
김재학은 워 해머를 쥔 오른손을 늘어뜨린 채 나직하게 물었다.
그의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A급 초인 셋과 B급 초인 하나가 진득한 살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연후 2집사에 고태식 선배, 진태진 선배, 그리고 오윤진이라…….’
분명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심지어 이는 B급에 불과한 진태진 선배마저도 그랬다.
‘전장의 매라는 이명은 결코 허명이 아니니.’
이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김재학은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를 고수했다.
이미 그의 주인, 제니퍼 퀘이드가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점이 더 컸다.
‘이곳은 결코 내가 죽을 자리가 아니다.’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바로 그 덕분이었다.
그 근거는 그의 주머니 속에 있는 아티팩트였다.
침식 유발 아티팩트, 이 물건의 효과는 단순히 침식을 유발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힘을 사용한다면…….’
제아무리 상대가 예사롭지 않다고 한들, 그는 멀쩡히 이 자리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었다.
그걸 충분히 가능케 할 역량을 안겨다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침식 유발 아티팩트에 내재되어 있는 또 다른 효과였다.
하지만 그는 도주할 준비를 하는 대신.
스윽-
네 사람을 향해 워 해머를 슬쩍 들어 올렸다.
이는 항전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김재학은 네 명의 초인들을 상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티팩트의 힘에 잠식되지 않게 제어하는 데 심력이 꽤나 소모되겠지만.’
그만큼 아티팩트는 눈앞의 네 사람을 압도할 힘까지도 안겨 줄 터였다.
김재학은 이를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의외로 감정적인 요소였다.
‘……하나같이 보는 눈이 마음에 안 들어.’
특히 오윤진의 눈빛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그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느낌을 진하게 풍기는 까닭이었다.
이유는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그분께서 데려간 안일한, 그 건방지기 짝이 없는 애송이를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어쩌면 한시라도 빨리 자신을 쓰러뜨리고, 안일한을 구하러 가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를 떠올린 순간.
꽈악-
김재학은 워 해머를 쥔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정말이지, 가소롭기 짝이 없는 탓이었다.
슬슬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가운데.
때마침 눈앞에서 오윤진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말이야. 각오는 됐겠지?”
역시나,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느낌은 한낱 기분 탓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이를 깨달은 순간.
“……건방지군. 가장 먼저 죽여 주지.”
김재학은 내면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거기에 호응하여 코어의 출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성휘의 화신’으로 이어졌다.
화아앗-!
새하얀 성광(星光)이 전신은 물론.
워 해머 전체를 두텁게 뒤덮어 갔다.
그대로 달려나가려는 찰나.
타닷-
두 개의 신형(身形)이 엄청난 속도로 닥쳐왔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허리춤과 어깻죽지에 묵직한 일격이 날아들었다.
쩌-엉!
일격의 무게감을 증명하듯, 저항할 틈조차 없이 전신이 주르륵 밀려났다.
그 속에서 김재학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확인했다.
‘……고태식, 그리고 연후인가.’
A급 권사 둘이 합이라도 맞춘 듯, 일제히 선공을 취한 것이다.
일찍이 성휘의 화신으로 전신을 보호한 덕분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권격에 담긴 위력 때문인지, 피격당한 부위에서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다.
“……크윽!”
김재학은 혀를 짧게 차며 곧바로 몸을 비틀었다.
상대는 권사들이었다.
한 번 간격을 내준 만큼, 자칫 잘못하면 속수무책으로 주도권을 빼앗길지도 몰랐다.
사전에 이를 차단하고, 나아가 이번 전투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김재학은 워 해머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대로 내리찍는 순간.
콰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거룩한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성휘의 화신’과 더불어 그의 절기라 할 수 있는 ‘빛의 심판’이었다.
코어의 마나가 순식간에 빠져나갔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이를 증명하듯, 거룩한 빛무리가 적들을 향해 해일처럼 짓쳐들었다.
콰과과광-!
고태식과 연후, 두 권사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빛의 심판’에 맞섰다.
그게 바로 김재학이 원하는 바였다.
‘제아무리 A급 초인이라 해도 똑같이 절기를 꺼내 들지 않는 이상 쉽게 막을 순 없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빌어 처먹을!”
“한 수 재간은 있는 모양이군……!”
두 명의 권사, 고태식과 연후는 동작이 큰 무공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성질의 마나를 머금은 일권을 내지르는 순간.
콰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빛무리의 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하지만.
‘어차피 빛의 심판은 막히게 되어 있어.’
김재학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상대도 A급 초인인 만큼, ‘빛의 심판’은 막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상대방을 압도할 생각 대신, 처음부터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
김재학은 이를 되새기며 곧바로 지면을 박찼다.
타닷-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에는 오윤진이 표정을 굳힌 채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를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김재학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이는 실제로도 그랬다.
애초부터 동등한 상대, 그것도 다수를 상대해야 할 때의 기본은 각개격파에 있는 까닭이었다.
‘더는 외면할 수 없을 거다.’
속으로 되뇌며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는 사이.
오윤진의 양손이 다급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그녀 역시 A급에 해당하는 마법사답게, 마법 전개 속도가 엄청났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처음부터 시종일관 오윤진을 노리고 설계한 김재학의 움직임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그는 워 해머를 횡으로 휘두르며 생각했다.
‘이걸로 남은 건 세 명…….’
아티팩트의 힘을 빌릴 것도 없겠다.
그리 생각하는 찰나.
스슷-
문득 목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A급 초인쯤 되면 오감을 넘어서 육감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감각의 첨예함이 남달랐다.
결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김재학은 워 해머를 짧게 쥐는 한편.
“흐읍……!”
있는 힘껏 궤도를 비틀었다.
그러자.
콰앙-!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검 하나가 튕겨져 나갔다.
그 직후, 눈앞에서 시퍼런 스파크가 튀었다.
그제야 김재학은 조금 전 서늘한 감각을 유발한 대상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진태진 선배.’
‘전장의 매’라 불리는 B급 초인.
진태진이었다.
- 19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