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지옥을 맛볼 준비는 됐나?
연소소가 내 곁에 다가올 무렵.
그간 침묵하던 제니퍼 퀘이드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지만…….”
투덜거리는 듯한 내용과는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제니퍼 퀘이드는 한차례 손짓과 함께 말을 이어 갔다.
“슬슬 거슬렸는데, 피를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피를 보겠다.
이는 혈투의 서막을 알리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손짓이 끝나는 순간.
쿠구구궁-
그녀 주위에 형성되어 있던 균열들이 일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침식 현상으로 강화된 몬스터 대군(大軍).
녀석들이 마침내 진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확인한 순간, 가장 먼저 오윤진이 반응했다.
“포위당하면 승산이 없는 거, 다들 아시죠?”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신속하게 항전 의사를 전달하는 한편.
균열을 겨냥하여 대단위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구먼! 마침 주먹이 근질거렸는데 말이지……!”
벌써부터 입가가 사정없이 꿈틀대는 고태식 교관부터.
“우연이군요, 고태식 교관. 저도 마침 녀석들의 골통이 박살 내기 딱 좋게 생겼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한마디를 거들면서 마찬가지로 전면에 나서는 연후.
“두 선배님들, 그리고 오윤진 길드장. 생도의 안전은 제가 책임질 테니, 후방에 관해선 안심하고 싸워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진태진 교관까지.
일행의 주축이 되는 네 사람을 시작으로, 파견된 초인들이나 생도들, 그리고 내 친구들까지도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그사이.
“연 당주님, 준비됐습니까?”
나는 본격적으로 동기화율 작업에 착수하기에 앞서 연소소의 의사를 물었다.
그녀는 긴장 어린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바로 시작해요……!”
연소소는 대답과 함께 내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대로 작업에 착수하려는 순간.
“고작 장기 말 몇 마리를 상대한답시고 너무 기고만장한 거 아니야?”
제니퍼 퀘이드의 야릇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발언이 향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일행의 주축이 되는 네 사람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나선 이는 이번에도 역시 오윤진이었다.
“여러분들은 그대로 몬스터를 맡아 주세요. 저는…….”
그녀는 빠르게 요청을 전파하는 한편.
조금 전에 전개한 대단위 공격 마법의 표적을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제니퍼 퀘이드였다.
“저자는 제가 맡을 테니까요……!”
그녀가 말을 끝맺은 즉시 대단위 공격 마법이 쏘아져 나갔다.
운석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화염구.
규모며 위력까지, A급 마법사답게 첫 마법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네?”
제니퍼 퀘이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눈빛에 어린 흥미는 한층 더 짙어졌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치잇!”
오윤진은 혀를 짧게 차며 즉시 추가적인 공격 마법을 전개했다.
눈부신 속도였지만, 제니퍼 퀘이드의 손짓보다 빠를 순 없었다.
그 결과, 허공에 칠흑같이 어두운 점 하나가 찍혔다.
단순한 손짓, 그저 허공을 가볍게 휘젓는 동작 한 번에 불과했다.
하지만 거기서 비롯된 현상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슈와아악-!
검은 점은 마치 블랙홀처럼 주위의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렸다.
그 여파로 인해 오윤진의 공격 마법은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다.
후속 공격으로 전개한 마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블랙홀은 그렇게 모든 마법을 집어삼킨 다음에야 소멸했다.
“……이건 영 좋지 않은데.”
오윤진은 심각하게 굳은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단 한 번의 교환.
아니,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교환이라 이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마법과 마법의 격돌이 아닌, 단순히 상대방의 마법에 집어 삼켜진 거나 다름없는 까닭이었다.
가히 좋지 않은 징조, 이를 느낀 건 비단 오윤진뿐만이 아니었는지.
“……가세하지.”
“몬스터 무리는 태진 교관과 파견 초인들에게 맡기는 쪽으로…….”
남은 세 사람은 신속하게 대응 전략을 수정했다.
결국 오윤진, 고태식 교관, 연후 2집사까지 해서 A급 초인 셋이 제니퍼 퀘이드를 상대하기로 합의를 마쳤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겠어?”
셋이서 대응해도 제니퍼 퀘이드 한 사람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물론 조금 전처럼 완전히 압도당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응하거나, 반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제니퍼 퀘이드의 상식을 벗어난 마법 세례를 막아내기에 급급한 가운데.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서둘러 연소소와의 작업에 착수했다.
그녀 또한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한편.
즉시 ‘계승’을 발휘했다.
“……!”
계승 특유의 격통이 물밀 듯 밀려오는 가운데.
눈앞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재 동기화율…… [100%]
-특성이 구현됐습니다!
고작 두 줄에 불과할 뿐인 짤막한 메시지.
하지만 거기서 비롯된 여파는 심상치 않았다.
‘대체 이건…….’
시야가 달라졌다.
정확히는 눈에 들어오는 세계가 이상했다.
세상이라는 도화지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선들이 종횡무진하며 명멸하는 것이다.
‘……이게 내 특성이라고?’
대체 어떤 능력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 가운데.
나는 곧바로 특성을 확인했다.
[특성]
-앞서간 자의 그림자
계승 4단계 -완전한 링크-
드디어 동기화율 100%를 달성했음을 증명하듯, 동기화율이라는 항목 자체가 사라진 채였다.
그 대신, 물음표로 가려져 있던 미구현 특성의 진정한 실체가 드러나 있었다.
‘……앞서간 자의 그림자.’
묘한 울림을 주는 명칭이었다.
그런 감상을 떠올리는 한편, 머릿속으로 특성의 효과를 궁리했다.
속으로 특성의 명칭을 곱씹으며 사고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려는 찰나.
“……일한 님, 안일한 님!”
눈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연소소의 것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상념에서 깨어나 급박한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이대로 가다간……!”
연소소는 외침과 함께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에는 세 사람이 제니퍼 퀘이드의 마법을 사력을 다해 막아 내고 있었다.
‘……내가 나서야 해.’
인식하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대로 달려나가려는 찰나, 머릿속에서 그림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선 내게 맡겨 줄 수 있겠나?
‘맡겨 달라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이젠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마지막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녀석의 제안 자체는 간단했다.
현 상황을 자신이 맡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추가로 덧붙인 설명은 어딘가 이상했다.
‘남은 시간이 없다고? 게다가 마지막이라는 말은…….’
문득 불안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으나, 거기에 매달릴 틈은 없었다.
때문에 나는 곧바로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방법을 물어보려 했으나,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마음을 먹은 순간 자연스럽게 의식이 넘어간 것이다.
제3자의 시점으로 눈을 뜨는 사이, 그림자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두 눈에 새겨둬라. 그게 곧 저자의 숨통을 끊을 비수가 될 테니까.”
말을 마친 즉시 그림자는 지면을 박차고 나갔다.
내디딘 걸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칠흑빛 안개가 일어나는 가운데.
녀석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세 사람을 지나쳐 갔다.
“……너!”
오윤진을 시작으로 고태식 교관, 진태진 교관 그리고 연후 2집사까지.
반 박자 늦게 반응하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에게 무어라 설명하는 대신, 그림자는 묵묵히 제니퍼 퀘이드와 마주 섰다.
바로 그때.
스슷-
그녀로부터 공간째로 절단하는 마법이 날아들었다.
이를 향해 그림자는 크게 한 발짝, 발을 굴렀다.
쩌-엉!
무극삼권의 시작을 알리는 진천이었다.
그림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코어의 출력을 가일층 끌어냈다.
그러자 제니퍼 퀘이드의 마법을 둘러싸듯, 허공으로부터 무형의 권격이 생성됐다.
다름 아닌 무극삼권 제3초, 무극이었다.
후웅-!
진각의 기파와 백은색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권격.
무극삼권이 제니퍼 퀘이드의 마법을 향해 쇄도해 갔다.
마침내 맞닥뜨렸을 때.
콰직-!
그녀의 마법은 말 그대로 짓뭉개졌다.
최초로 제니퍼 퀘이드의 마법을 받아낸 건 물론, 심지어 정면에서부터 아예 박살 내 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호라.”
제니퍼 퀘이드의 눈빛에 다시금 이채가 감돌았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림자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내게 용건이 있는 거 아니었나?”
당돌하기 짝이 없는 태도.
목소리에도 주저하거나, 떨리는 기색 따윈 전무했다.
그 점이 역으로 재밌게 다가왔는지, 제니퍼 퀘이드는 웃음을 터뜨리며 반응했다.
“그 말은 얌전히 나를 따라오겠다는 거로 받아들여도 되겠니?”
“단둘이서 결착을 내지.”
“결착? 설마 네가 그만한 존재라는 거야? 대단한 자신감이네?”
비아냥 섞인 말투로 되묻는 제니퍼 퀘이드.
하지만 그림자는 언제나처럼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나를 갖고 싶나? 그렇다면 마음껏 시도해 봐라.”
“감당할 수 있겠어?”
“오히려 내 쪽이 묻고 싶은 말이군. 지옥을 맛볼 준비는 됐나?”
“……재미있네, 진심으로.”
제니퍼 퀘이드의 미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 순간, 그녀의 신형(身形)까지도 따라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간 이동 마법.
이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찰나.
“어디 한번 보여 줘 봐, 그 지옥이라는 거 말이야.”
바로 등 뒤에서부터 야릇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식 상태로 존재하는 나조차도 등골이 오싹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했다.
그림자는 이어지는 현상 속에서도 그랬다.
지이이잉-
제니퍼 퀘이드의 손짓 한 번에 새로운 균열이 일었다.
거기서 또 한 번, 가볍게 허공을 휘저은 순간 그림자의 몸이 모종의 힘에 빨려 들어갔다.
그대로 균열 속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의식 상태로 세계가 일변해 가는 과정을 보고 있을 때.
-작전을 설명하지. 시간이 촉박하니 질문은 접어두고 일단은 들어주길 바란다.
느닷없이 그림자 녀석의 설명이 시작됐다.
들으면 들을수록 경악스러운 감정이 치솟는 가운데.
마침내 시야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 상태로 눈에 들어온 광경은 어딘지도 모를 폐허의 한가운데였다.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갖추는 가운데.
앞서 도착한 제니퍼 퀘이드가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준비됐니?”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해 줄게.”
살벌한 문답.
이를 짤막하게 주고받은 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공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 * *
비슷한 시각.
“……이런!”
오윤진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혹성을 터뜨렸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사람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애송이 녀석, 함부로 나서기는……!”
고태식의 말마따나 안일한이 제니퍼 퀘이드의 술수에 휘말려 버린 까닭이었다.
진태진 또한 고태식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균열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제니퍼 퀘이드가 안일한을 데리고 사라져 버린 균열.
슬슬 소멸하려는 광경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소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선배님들, 유감이지만 멈춰 주시지요.”
그들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정체는 바로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던 김재학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네 이놈-!”
고태식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노호성을 터뜨렸다.
진태진 또한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며 김재학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속.
‘……냉정하게 생각하자.’
오윤진은 두 교관들과는 달리 속으로 평정을 되뇌었다.
실제로 그녀는 두 사람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일개 생도에 불과한 녀석에게 의지해야 하는 현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안일한이야말로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서 가장 강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직 녀석만이 제니퍼 퀘이드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유감스럽지만, 현 상황은 최악 속의 최선이나 다름없었다.
판단과 함께 오윤진은 사고를 거듭했다.
‘즉, 이쪽도 구심점이 사라졌지만 반대로 상대도 수장이 자리를 이탈한 건 마찬가지야.’
여명과 낙일.
피차간에 상황은 엇비슷했다.
‘그렇다면…….’
현 상황, 충분히 해볼 만할지도 모른다.
- 196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