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두고 봐야 알겠죠
“그렇게 티를 내서야, 원.”
김재학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
일순간 등골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드는 한편,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역시 모조리 꿰뚫고 있었나.’
예상대로 김재학은 현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 물론.
알면서도 자신감을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를 증명하듯.
“두려워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설마 내가 도주하는 걸 걱정하고 있는 건가?”
김재학은 비아냥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나는 마음을 다스리며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대로 차량에 탑승하려는 순간 김재학이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이로군. 이런 걸 두고 동상이몽이라 하는 건가.”
동상이몽.
현 상황을 이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단어였다.
그도 그럴 게, 김재학은 틀림없이 나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반면.
‘우리는 김재학을 넘어서 제니퍼 퀘이드까지 한꺼번에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즉, 서로의 의도를 꿰뚫고 각자의 목적을 관철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다가오는 가운데.
나는 다시금 차량에 올라타며 한마디를 남겼다.
“어느 쪽이 어처구니없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김재학은 대답 대신 묘한 기색으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를 지나쳐 친구들 곁에 착석했다.
그러자.
“……괜찮은 거지?”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나와 김재학의 짤막한 문답을 전부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 문제 없어.”
나는 물론이고, 낙일 측도 피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모든 건 잠시 후.
실습용 게이트의 전면전에서 결착이 나게 될 터였다.
그거라면 차라리 자신이 있었다.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해 두었으니까.’
새삼스럽게 각오를 다지는 사이.
모든 생도가 탑승을 끝마치고 차량이 출발했다.
게이트 부근에 도착하기까지 대략 2시간.
결전이 머지않았다.
* * *
2시간 후.
“다들 질서를 갖춰 하차하도록.”
진태진 교관의 경직된 지시 아래 생도들은 천천히 차량에서 하차했다.
내 차례가 되어 차에서 내리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오늘은 느낌이 조금 다르네.’
한적한 도로, 무성한 수풀, 그리고 이름 모를 야산까지.
게이트는 보통 이러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만큼,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본래라면 별다른 감흥 없이 게이트 부근으로 이동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생도들이 접근 중에 있습니다.”
“다들 경계 태세를 유지하도록.”
숲의 초입부터 길드를 비롯한 단체로부터 파견된 초인들로 가득했다.
게이트는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건만, 마치 일대 전체를 감시하에 두려는 듯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단 한 사람, 김재학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도 김재학은 여전했다.
저벅저벅-
적진의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가로지르는 것이다.
김재학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사람들은 긴장감 어린 기색으로 주시하는 한편.
그중 일부는 그를 둘러싸듯,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뒤따랐다.
마침내 게이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호오.”
김재학은 완전히 인파에 둘러싸였다.
심지어 그를 포위하는 인원들 중에는 수호자 길드 소속 초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김재학의 부하이자 팀원으로서 활동했던 초인들은 배신감이 대단했는지.
찌릿-
대놓고 김재학을 향해 적개심을 뿜어냈다.
저력 있는 단체들의 초인들과 아카데미의 교관들에게 포위된 상황 속.
남아 있는 퇴로라고는 그가 등지고 서 있는 게이트뿐이었다.
그럼에도.
씨익-
김재학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포위하고 있는 초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마치 수라장의 개막을 알리듯.
게이트를 향해 정중하게 안내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그 모습에 몇몇 초인이 발끈하려는 순간.
타닷-
김재학은 눈 깜빡할 사이 게이트 너머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순간적으로 혼란이 찾아왔지만, 몇몇 인원들로 인해 금방 정리됐다.
다름 아닌 진태진 교관, 고태식 교관, 그리고 연후와 오윤진이었다.
“대열을 유지해!”
“생도들은 나를 따르도록!”
각자 사전에 합을 맞춰 놓은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나 또한 대열에 섞여 게이트 입구 앞에 마주 섰다.
그 상태로 수많은 인파가 차례차례 게이트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걸음을 뗐다.
‘가자.’
그대로 게이트에 발을 내디딘 순간, 특유의 이질적인 감각이 전신에 엄습해 왔다.
지금껏 충분히 겪어 본 까닭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게이트 진입 이후에 펼쳐질 상황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스스스-
서서히 시야가 본래대로 돌아오는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게이트 내부의 풍경도, 몬스터 무리도 아닌, 한 사람이었다.
‘김재학.’
그는 바깥에서와 마찬가지로 게이트 한복판에 오연하게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못 보던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렸다.
‘침식 유발 아티팩트.’
아무래도 가장 먼저 게이트에 진입한 만큼, 벌써 일을 벌일 준비를 끝마친 모양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김재학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지켜볼 뿐이었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진입이 끝나고, 심지어 다시 포위망을 구축하는 상황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김재학, 순순히 투항해라!”
“조금이라도 저항한다면 그 자리가 네놈의 무덤이 될 거다!”
초인들의 대부분이 전투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각자의 창끝으로 김재학을 겨누고 있는 가운데.
저벅저벅-
그를 둘러싼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다름 아닌 오윤진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나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완전히 입장이 바뀌었네?”
“글쎄, 과연 어떨까.”
김재학 역시 여유로운 태도로 응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내 묫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뭐, 저마다 생각은 자유니까. 하지만 이 정도면 지나치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쪽 같은데?”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그건 내가 할 말인걸?”
오윤진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치는 한편.
돌연 안색을 진지하게 고치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제니퍼 퀘이드는 어디다 숨겨 뒀지?”
“그게 궁금했나? 과연, 그래서 내가 도주할지도 모른다는 되지도 않는 걱정을 한 거로군.”
김재학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별안간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가소롭기 짝이 없어.”
오만한 발언.
이를 듣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움직인다.’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거란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생각을 떠올린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끝까지 말이 안 통하는 작자네……!”
오윤진은 혀를 짧게 차면서 순식간에 공격 마법을 전개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초인들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김재학을 향해 일제히 공세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콰과과광-!
마법과 참격 세례가 노도와도 같이 김재학을 덮쳤다.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화아앗-!
일순간 먼지구름을 뚫고 성스러운 광휘가 솟구쳤다.
김재학의 성명절기나 다름없는 ‘성휘의 화신’이었다.
그는 특유의 두터운 방어력으로 모든 공세를 받아내는 한편, 손에 쥔 아티팩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 순간.
꿀렁꿀렁-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보랏빛 기운이 아티팩트로부터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마치 진득한 늪과 같은 형태로 삽시간에 주위를 잠식하는 검보랏빛 기운.
이를 보자마자 오윤진이 나서서 소리쳤다.
정확히는.
“다들……!
그녀의 말은 이어질 틈조차 없이 검보랏빛 기운에 집어 삼켜졌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은 항거할 틈도 없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 결과, 나 혼자 외따로이 놓이게 됐다.
“……크, 윽!”
전신 곳곳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 속, 나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어 맸다.
그 상태로 코어를 활성화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명료해졌다.
“후우…….”
나는 한차례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불과 몇 초 전의 풍경은 말 그대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야에는 검보랏빛 기운만이 가득했다.
‘지형지물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농도라니…….’
지금껏 여러 차례 침식을 겪어봤지만, 단언컨대 이만한 농도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와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침식 현상.
그 속에서 나는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평정을 되뇌며 현 위치를 고수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결국 낙일의 목표는 나니까.’
본래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었다.
저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이상, 내 쪽에서 구태여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알아서 나타날 터. 그런 믿음 아래 나는 컨디션 관리에 집중했다.
침식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조차 모호한 상황 속.
쩌저적-!
돌연 눈앞이 일그러졌다.
거기에 반응하여 코어의 출력을 끌어올리려는 찰나.
사박사박-
균열로부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30대 남성과 4·50대로 추정되는 금발의 서양 여성.
외견을 확인한 순간, 저들의 정체까지도 알 수 있었다.
‘김재학, 그리고 제니퍼 퀘이드.’
낙일의 사도와 수장.
마침내 최후의 적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둘중 금발의 중년 여성, 제니퍼 퀘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예언자라고?”
통역용 아티팩트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이질적으로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재학은 그녀를 향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호오, 이건 생각 이상인데?”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리는 제니퍼 퀘이드.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오한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싹-
분명 제니퍼 퀘이드는 지금껏 마나를 일으키기는커녕, 어떠한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만한 압박감을 준다는 건, 딱 하나였다.
‘존재 자체의 위압감……, 이게 진정한 S급 초인인가.’
즉, 조금 전의 위압감은 단순히 그녀의 존재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새 손이 땀으로 흥건해진 가운데, 제니퍼 퀘이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녀로부터 흘러나온 말은 완전히 내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이야, 네게 선택권을 줄게.”
선택할 권리를 주겠다.
뜻밖의 선언에 자연스럽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설마 회유하려는 건가?’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 정확히 예상했던 말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낙일로 들어오렴. 나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거야.”
“…….”
“흐응, 반응이 없네? 나에 관해서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려나?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아닌데 말이지.”
제니퍼 퀘이드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뭐, 너는 특별한 존재이니 한번 보여 줄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게 아니라 ‘보여 준다’.
그 말은 곧 뭔가 일을 벌인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작에 불과했으나, 거기서 비롯된 여파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스르륵-
검보랏빛 기운으로 물든 대지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곳곳에서 짙푸른 새싹이 돋아났다.
새싹들은 그대로 뻗어 나가 울창한 초목으로 변모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니퍼 퀘이드의 손짓마다 공간이 절단되거나, 특정 지점의 시간이 유리되는 등.
감히 이적(異蹟)이라 일컬어도 이상하지 않은 현상들이 눈앞에서 구현됐다.
이 모든 게 불과 수십 초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이 능력들은 대체.’
이 정도면 마법이 아니라 ‘창조’의 영역이었다.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뭐, 대충 나는 이런 것들이 가능한 사람이야.”
뉘앙스로 보아 좀 전에 선보인 능력들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반대로 네가 내 제안을 거부한다면…….”
제니퍼 퀘이드는 평이한 말투와 함께 또다시 손을 휘저었다.
손짓에 반응해 순식간에 그녀의 주변 곳곳에 큼지막한 균열이 일었다.
그 너머를 들여다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헛숨을 삼켰다.
‘몬스터가 수십……. 아니, 수백 마리…….’
대군(大軍)이라 이를 만한 수준의 몬스터가 균열 너머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까닭이었다.
불현듯 꿈에서 목격했던 재앙이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제니퍼 퀘이드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이런 짓도 가능한 사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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