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생도는 일취월장이란 말을 알고 있나?>
182 생도는 일취월장이란 말을 알고 있나?
“그럼 스승님, 진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내 몸이 면서도 마치 내 것이 아닌 듯한 감각 속.
그림자 특유의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 나시야 비로소 상념에서 깨어났다.
‘……와.’
사실 나는 지금껏 여운에 젖어 있었다.
다름 아닌 조금 전, 그림자와 연후가 벌인 대련 때문이었다.
‘엄청났지.’
두 사람의 역량부터, 대련 내용에 이르기까지.
둘의 접전은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대단했다.
특히 경악스러웠던 건 다름 아닌 그림자 녀석이었다.
‘사제지간이라더니……'
녀석의 움직임과 상황 판단, 그리고 대처는 전부 연후의 그것을 쏙 빼닮아 있었다.
그것도 나처럼 하위호환이 아닌,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말이다.
거기시 끝이 아니었다.
A급 권사를 상대로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건 물론.
동일한 무공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가이 사실을 모른다는 심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그 결과.
‘A급 권사를 상대로 사실상 동수를 넘어 압도할 줄은.’ 그림자 녀석은 옛 스승을 상대로 청출어람을 몸소 보여 줬다.
일련의 과정을 전부 숨죽이며 지켜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그 결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지금의 성취에 안주하고 있었을지도.’
물론 내 역 량에 자만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림자 녀석과 완전히 의식을 공유하게 된 순간.
은연중에 녀석의 역량이 마치 온전히 나의 것이 된 양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두 눈으로 직접 녀석의 활약을 목격하고 나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거니까.’
게다가 방금 연후와의 대련, 그 과정에서 의식 공유를 통해 배운 것이 적지 않았다.
더 중요한 점은 아직 그림자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우선 무극삼권의 체화를 도와주려는 모양인데.’
대련만큼은 아닐지언정,이 또한 충분히 내게 도움이 될 듯싶었다.
내가 아닌 녀석의 무극삼권에 관한 이해도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나는 집중력을 한층 끌어올리며 눈앞에 집중했다.
‘녀석의 조언대로,이 기회를 통해 최대한 많은 것들을 얻어 가야지.’
새삼스럽게 다짐하는 찰나.
때마침 그림자가 걸음을 옮겼다.
다가간 즉시 녀석은 망설임 없이 연후의 신체 곳곳을 짚었다.
“진천의 마나 순환은 이러한 경로를 따릅니다.”
무극삼권 제 1 초, 진천의 마나 순환로를 공유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상태로 진각을 펼치고, 이어서……' 진천의 기본적인 투로와 응용까지 한꺼번에 설명했다.
상당히 빠른 어조였음에도 연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
설명하는 내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녀석이 설명을 마치고 별안간 물러설 무렵.
쩌-엉!
연후는 느닷없이 진각을 밟더니, 몇 차례 권법을 펼쳐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거로군.”
“바로 그렇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연후와 그걸 또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그림자 녀석까지.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진천만 체득하는 데 몇 주 정도 걸리지 않았나?’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그림자는 변함없이 무덤덤한 어조로 다음 초식.
무극삼권 제2초 천라를 조금 전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했다.
연후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스스......
진천에 이어 천라까지.
단 한 번의 설명만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다.
‘……원래 A급은 다 저런 건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찰나.
-스승님은 특별하다.개의치 말고 이제부터는 집중하는 편이 좋을 거다.
때마침 그림자 녀석이 말을 걸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긴, 지금 중요한 건 저분의 말도 안 되는 습득 속도가 아닐 테니.’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의식 공유를 통해 최대한 많은 걸 얻어가는 것이었다.그런 일념으로 마음가짐을 바로 할 무렵, 연후가 어깨를 슬슬 돌리며 운을 뗐다.
“이제 기본은 대충 알 것 같으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머지는 손을 섞으면서 소화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연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다소 어처구니없었는지.
“하,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을 다 해보는군.”
연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는 한편.
입꼬리를 슬쩍 올리 며 말했다.
“오냐, 한번 제대로 놀아 보자.”
연후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또다시 두 사람의 대련이 시작된 가운데.
나는 온 신 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눈앞에 집중했다.
다음 날, 오후.
실기 수업이 시작된 가운데.
“준비됐나?”
“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교관님.”
나는 진태진 교관과 마주 섰다.
2학기부터 시작된 생존 수업, 그 일환인 실전 대련을 벌이기 위함이었다.
첫 수업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비롯한 최상위권 10인은 계속해서 진태진 교관이 맡게 됐다.나는 대련 준비를 갖추며 생각했다.
‘때마침 잘됐군.’
지난밤에 있었던 연후와의 대면.
거기서 얻은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상대가 진태진 교관이라 더더욱 그랬다.
‘어제 배운 건 주로 상황 판단이나 대처와 같은 노련함이니까.’
그런 디테일을 파악하는 데 있어 진태진 교관은 더할 나위 없는 상대였다.
이유는 당연히 그의 뛰어난 전투력 때문이었다.
‘힘에서 밀리더라도 얼마든지 상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실 정도니까.’
단련된 기교와 축적된 경험.
두 가지를 무기로 가진바 역량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바로 진태진 교관이었다.
더욱이 그가 가진 이능형 특성, ‘무기 통찰’로 인해 이러한 강점은 배가됐다.
‘대처법은 그렇다 쳐도,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은 진태진 교관님이 유일하시니까.’
실제로 진태진 교관은 지난 수업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창이 아닌 검을 들고 있었다.
전투 양상은 무기의 차이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판이하게 달라질 터.
거기서 비롯되는 까다로움, 난해함이 곧 진태진 교관의 전투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황 판단이나 대처와 같은 노련함이 빛을 발하게 될 테고.’
즉, 어젯밤 성과의 시험은 물론.
이를 온전히 내 것으로 체화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셈이었다.
새삼스럽게 생각을 정리할 무렵.
“그럼 먼저 가지.”
진태진 교관은 짤막한 선언과 함께 곧바로 짓쳐들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자세를 취하는 한편.
나는 기억 속의 감각을 더듬으며 속으로 이번 대련의 방향성을 정했다.
'최대한 지난밤의 감각을 재현하는 쪽으로 가 보자.'
가닥을 잡을 무렵.
쩌-엉!
진태진 교관과 격돌했다.
무기가 달라져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내 움직임은 거칠어졌다.
하지만 빠르게 적응했고, 지난 수업과 마찬가지로 내가 우위를 점하게 됐다.
그렇다고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역시나 쉽지 않네.’
전투는 매 순간이 판단의 연속이었다.
찰나에 모든 게 결정되는 만큼, 일일이 기억 속 감각을 적용하기란 꽤나 버거웠다.
그래서인지, 종종 어설픈 움직임이나 대처가 나왔다.
하지만 반대로 평소 이상의 날카로운 판단이나 대처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
그때마다 진태진 교관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반응했다.
말 그대로 시행착오에 가깝게 대련에 임한 결과.
“그만.”
“고생하셨습니다.”
기대에는 살짝 못 미치긴 해도 그럭저럭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대련을 끝마쳤다.
‘대략 30초가량 단축시켰나?’
진태진 교관을 제압하는 데 조금이나마 시간을 단축시킨 것이다.
기억 속의 감각과 견주어 조금 전 대련을 머릿속으로 갈무리하고 있을 때.
어느새 호흡을 정돈했는지,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진태진 교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도는 일취월장(日就月將)이란 말을 알고 있나?”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을 때.
그는 옅은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단어가 꼭 생도를 두고 하는 말 같더군.정말 훌륭했다.”
일취월장.
이는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극찬이었다.
그만큼 내 실력이 어제보다 나아졌다는 의미였으니까.
‘……교관님께선 내 생각과 움직임의 변화를 전부 꿰뚫어 보고 계셨구나.’
그래서일까, 자연스럽게 공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이 마음 그대로 진태진 교관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더 정진하겠습니다.”
이는 그를 향한 감사의 표현이자, 내 자신을 향한 다짐이었다.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꼈다.
실제로 어젯밤 부족함을 깨달아서 그런지, 더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젠 진짜로 모든 게 시작된 셈이니까.’
연후와의 수련은 물론.
그 이후 연소소의 도움으로 동기화율 상승 작업도 시작했다.
또한 녀석은 내게 의식을 넘겨주기 전에 오윤진에게 연락을 취했다.
김재학의 탐색에 혼선을 주는 전략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위함이었다.
즉, 최종 계획을 준비하는 데 있어 이제야 제대로 된 첫걸음을 떼게 된 셈이었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속으로 몇 번씩 되뇌는 한편.
다시금 조금 전 대련의 피드백에 깊이 빠져들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것 참 공교롭군.’
김재학은 무표정한 채로 그간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정확히는 예언자로 추정되는 여섯 명의 유력한 후보, 그들의 행적에 관해서였다.그는 가장 먼저 ‘공교롭다’라는 감상이 떠올랐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여섯 명 모두 비슷한 움직임을 보일 줄이야.’ 지난 일주일간, 여섯 명 모두 여명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는두 사람.
재앙의 마녀 오윤진과 연씨세가의 2집사 연후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거의 동시에, 늦은 밤 시간대에 움직인 것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들의 목적은 딱히 수상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수련이라……'
수련, 즉 오윤진과 연후가 그들의 수련을 돕는 것이다.
거기다 인원 분배의 측면을 고려해도 그리 이상하다곤 할 수 없었다.
오윤진이 봐주는 백유진, 심인욱, 오윤서.
이들 모두 애초부터 서로 간에 친분을 가진 상태였다.
더욱이 오윤진은 오윤서와 자매이니만큼, 동생과 동생의 친구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었다.
연씨세가 측도 비슷했다.
안일한, 윤설하, 차은월의 경우 지난 국제 대회 대참사 때 연소소와 함께 휘말렸다.
거기서 인연을 맺었다고 가정하면, 그리고 만일 연소소가 따로 연후에게 부탁했다면.
연후가 저들의 수련을 위해 기꺼이 움직이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후보 여섯 명의 움직임과 오윤진, 그리고 연씨세가의 움직임까지.전부 납득이 돼.’
그래서 더더욱 이상했다.
마치 저들이 입을 모아 자기들에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강하게 어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그 결과.
‘설마 여섯 명 전부 여명과 엮여 있는 건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내 김재학은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한차례 고개를 털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설령 다 엮여 있다고 해도, 여섯 명 전부를 손에 넣을 순 없으니까.’
그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납치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불필요한 일이었다.무엇보다 낙일에 필요한 존재는 오직 한 명, 예언자뿐이라 더더욱 그랬다.
“……흐음.”
뾰족한 소득 없이 생각만 깊어지는 가운데.김재학은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만일 지금까지 후보들이 보인 움직임을 누군가가 의도한 거라면……
의도적으로 예언자의 존재를 특정하려는 그의 시도에 훼방을 놓고 있는 거라면.
지난 일주일간 수집한 후보들의 행적이나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는 점까지 전부 납득할 수 있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의도된 전략 쪽으로 무게가 기울어 갔다.
그래서일까.
씨익_
김재학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누군지는 몰라도 꽤나 머리를 굴릴 줄 아는군.’
도대체 누구의 작품인지, 진심으로 궁금할 정도였다.
예언자의 존재 특정 및 회수라는 가진바 소임 이상으로 흥미가 깊어지는 가운데.김재학은 슬슬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다시 수호자 길드의 팀장이자, 생존 교과의 부교관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