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이놈에겐 자격이 있다 >
181 ……이놈에겐 자격이 있다
연후는 문득 며칠 전, 연소소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연후 집사님, 예정된 파멸을 막기 위해선 그분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예정된 파멸부터 이를 막기 위해 미래에서 찾아온 존재까지.그야말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연후는 경악하기보단 반신반의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개 개인이 예정된 파멸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물론 연소소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연씨세가의 직계로서 ‘계승’을 이어받은 그녀의 총명함은 세가 내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그녀가 강조한 ‘그분’이란 존재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소소 아가씨와 같은 나이 또래인 것 같은데.’
그 말은 곧 일개 생도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그 녀석은 한국의 유력 가문이나, 길드와 같은 거대 단체와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모양이었다.이는 결코 선민의식의 발로가 아니었다.
‘실제로 파멸이 예정되어 있다면……'
세계의 운명을 고작 청소년에게, 아직 여물지도 못한 존재에게 맡기게 되는 셈이었다.
연후는 바로 그 점이 탐탁지 않게 다가왔다.
‘거참, 기껏해야 시커먼 꼬맹이에게 모든 걸 맡겨야 한다니.’
거듭 생각해 봐도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
그렇다고 연소소에게 무어라 불평을 늘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저 속으로 구시 렁거리고 있을 때.
집사님께서 그분의 수련을 도와주셨으면 해요.아직은 필요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거든요.
연소소가 꼬맹이를 대신하여 도움을 요청해 왔다.
처음엔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기가 막혔으나, 연후는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옳거니, 직접시험해 보면되겠구먼.’
때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세계의 명운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격을 시험해 보면 되는 것이다.
‘소소 아가씨는 믿으면서 정작 아가씨가 부탁한 꼬맹이를 믿지 못한다는 점이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연후는 이미 자신의 마음이 문제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입장을 고수했다.
내키지 않은 상태에서 가르치는 시늉을 하기보단, 진심으로 임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까닭이었다.그런 일념으로 입장을 통보했건만, 돌아온 대답이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그, 얼마든지 받겠다고 전해 달라고.
상대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파멸의 예방이란 무거운 짐을 짊어졌으면 젠체할 법도 하건만, 생각 외로 소탈했다.
‘당돌하기 짝이 없군.’ 그런 자신감, 싫지는 않았다.
분명 미덥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싹수가 노란 것 같진 않은 꼬맹이.
묘한 이미지를 가진 채 녀석과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 연후는 깨달았다.
“먼저 가겠습니다.잘 부탁드립니다.”
녀석이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당돌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면한 상태에서도 이런 자신감이라니, 제법 놀라우면서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경악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까닭이었다.
‘……복마구권?거기에 탈혼지까지?’
녀석은 정확히 같은 무공을 구사했다.
심지어 무공만 동일한 게 아니었다.
‘탈혼지의 저 활용은……
단순히 지법이나 구명절초로 활용하는 대신.
상대의 맥을 끊기 위해 권법과 섞어서 구사하는 식의 운용까지.
즉, 디테일한 무공의 활용까지도 그와 동일했다.
심지어 상황에 따른 대처에선 노련함마저 느껴졌다.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건가?’
저 나이대에 A급은 드물긴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육체적인 역량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노련함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세월에 따라 축적된 경험을 벌써 갖추고 있다니,정녕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적어도 무수한 실전을 거쳐 쌓아올린 그 자신의 노련함과 동수를 이룬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연후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전심전력을 발휘하게 됐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에겐 자격이 있다.’ 아니,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그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한번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나니 순수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제대로 배웠구나!”
더불어 문득 뇌리에 연소소가 했던 말이 스쳐 갔다.
-그분은 미래에서 온 존재예요.
예정된 파멸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온 존재.
즉, 녀석은 존재부터가 이미 상식을 초월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에 맞지 않은 노련함 정도는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일말의 미혹마저 깔끔하게 털어낸 다음, 연후는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는 찰나.
“한 가지 더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느닷없이 녀석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더 논할 게 있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호기심이 강하게 동했다.
이에 연후는 걸음을 멈춰 세운 채 나직하게 물었다.
“……무엇이지?”
“무극삼권입니다.”
“……!"
무극삼권.
그건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주 전에 얻은 유물에 담긴 무공이었다.
또한 체득은 했지만, 난해함으로 인해 활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보류해 둔 무공이기도했다.
그게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올 줄은, 연후는 상상조차 못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 녀석이 나직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진정한 무극삼권, 지금 보여 드리겠습니다.”
“……!”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녀석이 별안간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내리찍은 순간.
쩌-엉!
어마어마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저릿저릿, 피부에 닿는 감각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마나 순환 체계에 끼치는 여파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급하게 코어를 활성화시키고 있을 때.
“이것이 무극삼권 제1초, 진천입니다.”
녀석이 나직하게 설명했다.
그러고는 또 다른 무공을 펼쳤다.
스스슷……
마치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권영.
무수히 불어난 권영은 이윽고 백은의 권격으로 화하여 빗발쳤다.
장엄하기까지 한 광경.
그 위력 또한 피부에 와닿는 수준이었다.
“이게 무극삼권 제2초, 천라입니다.”
“천라……"
천지를 뒤흔드는 진각과 하늘을 뒤덮는 그물과도 같은 권격.
두 초식 다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명칭이었다.
음미하듯 나직하게 되뇌던 중, 연후는 문득 무극삼권의 마지막 초식에 신경이 가닿았다.무어라 질문하려는 찰나, 녀석이 한발 빨랐다.
“마지막 초식은 무극입니다.”
“……무극이라, 그것 또한 엄청나 보이는군.그래서?그건 보여 주지 않는 건가?”
연후의 질문에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응이 의아하여 미간을 살짝 찡그릴 무렵.
녀석은 옅은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그건 스승님과 함께 완성시켜 나갈 생각입니다.”
예상치 못한 호칭에 연후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스승님이라니, 난데없는 호칭뿐만이 아니라 이어지는 말도 웃겼다.
‘가르쳐 달라는 것도 아니고, 함께 완성시켜 보자고?’
이 나이에 시커먼 꼬맹이와 함께 배움을 추구하다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스승이라……'
스승님.
나쁘지 않은 울림이었다.
그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녀석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일까, 연후는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웃어 버렸다.
“오냐, 내 기꺼이 어울려 주마.”
스승님, 연후의 인정을 받고 난 후.
그림자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밝혔다.
물론 지금까지 그랬듯, 이전 생에 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핵심만 간추려 말했다.
연후에겐 그 정도로 충분했다.
“……어쩐지.무공은 물론이거니와, 수법마저 동일하여 이상하다 싶었거늘.참으로 고얀 녀석이로군.”
투덜거리는 말투와는 달리 연후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그림자의 놀라운 역량이 전부 자신에게서 비롯됐음을 알고, 거기에 뿌듯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나마 만족감을 드릴 수 있어 기꺼웠다.
그림자는 그가 감정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끔 가만히 기다려 줬다.
다행히 기다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크흠.그래서?네 녀석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거지?”
연후가 헛기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 녀석은 더 이상 가르침이 필요 없는 수준이다.차라리 실전 대련이라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연후는 솔직하게 제 생각을 밝혔다.
가감없는 평가, 그야말로 스승님다운 직설적인 발언이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한편, 그림자는 미리 생각해 둔 바를 입에 담았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 스승님께서 무극삼권의 완성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 초식, 무극을 말하는 거냐?”
“바로그렇습니다.”
그림자의 즉답에 연후는 이마를 짚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
“이런 말하긴 그렇다만, 나는 첫 번째 초식조차 제대로 체화하지 못한 상태다.”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놈이 그런 부탁을 해?”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연후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림자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뭐라?”
“진천과 천라를 온전히 체화하시는 데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체화를 거들어준다.
이는 곧 역으로 그림자가 무극삼권의 두 초식을 가르쳐 주渼募? 뜻이었다.
연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터뜨렸다.
다만 그뿐으로, 연후는 노발대발하는 대신 침착한 어조로 이유를 되물었다.
“……하, 그래.네 녀석에게 배운다고 치자.그럼 대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무어냐?”
“마지막 초식, 무극을 체득하고 나아가 온전히 활용하기 위해선 무리(武理)를 논하는 과정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입니다.”
“무리를 논해야 한다?”
“네, 설명드리자면……"
그림자는 가장 먼저 무극에는 형(形)이나 초식이 없다는 점부터.
마치 마법을 운용하듯, 유형화를 이룬 특수한 마나로써 권법을 구현해야 한다는 점.
그렇기에 무극의 활용 방식에 관한 논의는 물론, 직접 다양한 형태로 활용해 봐야 비로소 극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 등.
무극에 관해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과연, 심오한 무공이로군.”
연후는 탄성과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해한 만큼 개세적인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죠.”
“함께 완성시키자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었구먼.”
“네.애초에 혼자서는 닿을 수 없게끔 설계된 무공이니까요.”
그림자의 대답에 연후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운을 뗐다.
“구태여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다만, 이건 네 녀석이 말한논의에 필요한 것 같으니 물어보마.”
“말씀하시지요.”
“이전 생에서의 나는 무극의 극의에 닿았느냐?”
그림자는 순간 멈칫했다.
잠깐 속으로 생각해 본 결과,이 정도는 딱히 상관없을 것 같았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수련에 필요한 내용이니.’
그림자는 결정을 내린 즉시 입을 열었다.
“닿으셨습니다.”
“그리고 네 녀석은 그걸 배우지 못했고?”
“네.가르침을 받긴 했지만, 온전히 소화시키기엔 제가 지나치게 부족했던 터라.”
“겸양은 필요 없다.네 녀석 정도면 필히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연후는 손을 휘저으며 딱 잘라 단언했다.
평가에 가감이 없으며, 한 번 인정한 상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정하는 것.
딱 스승님다운 반응이었다.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그럼 별 문제 없겠군.진천이라 했던가?”
연후가 재차 입을 열었다.
“ 네.”
“그것부터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무극삼권의 수련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이 역시 스승님다운 모습이었다.
결국 그림자는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연 당주, 동기화율 작업은 수련이 끝나고 난 다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여태 가만히 기다려 준 연소소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녀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얼마든지요!”
그렇게 연소소의 동의를 구한 후.
“어 디 한번 같이 끝장을 보자꾸나, 제자야.”
본격적으로 연후와의 수련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