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이 괴물 같은 녀석 >
170 이 괴물 같은 녀석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오윤진은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한 채 되물었다.
반면 그림자는 변함없이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정확히는 미래에서 온 존재라기보단 미래에서 과거로 전송된 의식이 되겠지만
“존재라느니, 의식이라느니.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것보다 정말로 가능한 이야기니……?”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다는는 듯,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뭔가를 깨달았는지, 문득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그림자에게 되물었다.
“그럼 설마 지금까지 네가 밝힌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
“살아생전 내가 직접 겪었거나, 당시 타인에게서 건네받은 정보를 그럴듯하게 이야기한 것뿐이다.”
“……확실히 그렇네! 맹점이었어.”
미래 예지 계열의 미구현 특성으로 미래를 접한 것이든, 아니면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해 왔든.
사실 어느 쪽이든 간에 미래를 알고 있다는 점은 동일했다.
이미 미래 예지라는 상식 밖의 능력을 가진 그녀로서는 딱히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회귀라니……"
그림자가 밝힌 '의식 회귀’는 그녀의 생각보다 당혹스럽게 다가왔다.
물론 미구현 특성의 불가해한 점을 고려하면 의식 회귀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다만 혼란스러운 건 회귀라는 능력이 미래 예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식을 벗어난 까닭이었다.
그녀는 이마를 되짚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알겠어. 믿을게.”
마음속은 여전히 반신반의했음에도 그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눈앞의 존재를 겪어본바, 그는 결코 허언을 늘어놓을 위인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동안 접했던 여러 증거들을 생각하면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회귀했다, 다음은? 그게 전부는 아닐 거 아니야?”
“물론이다.회귀를 밝힌 건 어디까지나 원활한 대화를 위한 포석에 불과하니까.”
“그럼 뜸 들이지 않고 말해 줄래?”
회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자연스럽게 온갖 의문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과연 그녀가 특성을 통해 접한 재앙이 실제로 미래에 일어나게 되는지.
또한 재앙으로 인해 세상은 어떤 식으로 변하고, 미래의 자신은 어떻게 되는지 등.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눈앞에 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가운데, 그림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대를 채워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밝힐 수 있는 부분은 설명하도록 하지.”
그림자는 가장 먼저 예정된 파멸을 맞이한 미래에 관한 이야기부터.
재앙 이후의 세상과 이를 초래한 낙일의 움직임.
진정한 멸망을 앞둔 상황 속에서 탄생한 최후의 계획 ‘여명’에 관한 내용까지.
그중에는 안일한의 비범한 능력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SS 급 스킬이라고?”
“그래.내겐 과분하지만 계획을 위해 필수적인 능력인 만큼 익힐 수 있었다.”
“하기야, 상대도 정상은 아니니까.진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넘어온 거구나.그나저나 SS급이라니, 그만한 등급이 실존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는데.”
그제야 오윤진은 여태 느꼈던 안일한의 이해할 수 없는 역량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런 감상들과는 별개로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존재했다.
이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지?”
“묘하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피하는 것 같아서.혹시 이유가 있는 거니?”
그림자의 이야기는 철저히 낙일과 그 자신에 국한되어 있었다.
반면 그 외의 것들, 이를테면 그녀나 주변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축소하거나 누락했다.
즉, 가장 기대하고 있던 내용을 듣지 못한 것이다.
이를 콕 짚어 묻자 그림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건."
기계와도 같은 무표정에 한 줄기, 기이한 기색이 서린 것이다.
오윤진은 그의 표정에 서린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다름 아닌 아련함이었다.
다만 그러한 감정이 정확히 무엇을 향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
오윤진은 커져 가는 의문과 함께 자연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무어라 질문하려는 찰나, 그림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어째서?”
“더 이상존재하지 않는 일이자,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물음에 답할 무렵에는 이미 좀 전의 감정은 씻은 듯 자취를 감춘 뒤였다.
단호함마저 느껴지는 대답에 오윤진은 일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사이, 그림자는 반론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양 화제를 전환했다.
“이걸로 필요한 정보들은 전부 전달한 것 같군.최종 계획은 앞서 말했듯, 기본적으로 낙일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식으로 갈 테니 그때그때 상황을 공유하겠다.”
무미건조한 어조에 오윤진은 샐쭉한 표정으로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결국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어.이야기는 그걸로 끝?”
“한가지 더 있다.”
끝난 줄 알았으나 예상과는 달리 그림자는 추가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녀석의 대련을 잘 부탁하지.”
“녀석이라면, 안일한?”
“그래.사정을 봐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호오, 그건 좀 괜찮은 제안이네.”
오윤진은 대답과 함께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깔끔하게 그지없는 행동과는 다르게 그녀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 때문에 복잡했다.
‘……대체 그런 표정은 왜 보여주는 거야?괜히 신경 쓰이게 말이야.’
다름 아닌 그림자가 보인 이상한 표정 때문이었다.
이미 그가 딱 잘라 거부한 만큼 더 이상의 추궁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에 걸렸다.
“하아, 오늘 밤에 푹자기는 글렀네.”
오윤진은 한숨과 함께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안일한과의 첫 번째 대련 이후.
본격적으로 그를 돕는 사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오윤진에겐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다.
정확히는 한마디가 입에 붙어 버렸다.
“……이 괴물 같은 녀석.”
“네???????”
“하아, 아무것도 아니야.고생했어, 옷 갈아입고 와.”
“네.”
괴물 같은 녀석.
안일한이 보여 주는 불가해한 역량 탓에 탄식이 입버릇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만큼 녀석의 성장 속도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는 앞서 그림자가 알려준 상식 밖의 능력, 스킬들을 감안해도 그랬다.
‘……분명 천재는 아닌것 같은데.’
무릇 천재란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깨우치고, 별다른 가르침 없이도 번뜩이는 깨달음, 재치를 바탕으로 오롯이 상승하는 족속들이었다.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안일한이 타고난 자질이나 감각 자체는 평범했다.
좋게 봐줘도 평범한 수준보다 살짝 뛰어난 정도였다.
그럼에도 괴물 같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습득과 운용, 그리고 판단력.’
가르쳐 준 것은 결코 잊는 법이 없었고, 또한 제 방식에 맞게 찰떡같이 소화해냈다.
거기다 매 순간 녀석이 내리는 판단과 움직임은 이따금 그녀조차 움씰하게 만들 정도였다.
즉, 타고난 감각은 천재에 미치지 못하나 지닌바 성향이 그 부족함을 메우고도 남는 것이다.
그 점이 바로 ‘괴물 같다’라는 평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천재와 안일한, 둘 중 까다로운 상대를 꼽자면 오윤진은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특히 판단력만큼은 결코 그 나이 또래가 가질 수 없는 요소니까.’
전투에서의 판단력은 다양한 경험과 축적된 연륜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즉, 절대적으로 시간에 좌우되는 능력인 것이다.
이는 천재조차 쉽게 가질 수 없는 재주였다.
그만한 역량을 고작 18살의 나이에 갖췄으니, 그녀가 혀를 내두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림자라 했던가?설마 녀석이 대신해서 대련에 임하는 건 아니겠지?아니면 실시간으로 훈수를 둔다던가.’
시답잖은 문제였으나 오윤진은 진심으로 고심했다.
미간을 찡그려 가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길드장님, 여기 계셨군요.”
그녀의 곁으로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오윤진의 측근 중 한 명인 김수한이었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B十급 초인으로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김수한에게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안일한이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의 모습을 보며 김수한은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죠?천하의 길드장님을 쩔쩔매게끔 만들었다는 애가.”
가벼운 어조로 건넨 농담이었으나 오윤진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쩔쩔매진 않았거든?”
“아하하,죄송해요.그나저나 참 신기하네요.저 녀석, 길드장님 동생분과 같은 나이 또래 아니에요?”
“우리 윤서와 동갑이지.그래서 더욱 괴물 같은 거고.”
오윤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대답했다.
이를 전혀 예상치 못한 건지, 김수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 정도예요?확실히 기세가 남다른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그는 안일한의 역량보단 그녀의 반응이 좀 더 놀라운 모양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오윤진은 무어라 설명해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녀는 묘한 기색의 미소를 띤 채 김수한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렇게 저 아이의 실력이 궁금하면 한번 직접 겪어 보는 건 어떻니?”
“제가요?에이, 아무리 제가 길드장님에게 못 미친다고 해도 아카데미 생도와 손을 섞을 시기는 지났죠.”
그의 대답에 오윤진은 확신했다.
김수한은 단순히 그녀가 아카데미 생도의 수련을 도와준다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안일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무했다.
그래서일까, 재밌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오윤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손을 섞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귀여운 후배에게 한 수 가르침을 내린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니?”
“……끄응, 남자는 전혀 귀엽지 않은데 말이죠.”
김수한은 미간을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내뱉는 말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안일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윤진에겐 그 정도 반응만으로도 충분했다.
“얘, 이리 좀와 볼래?”
곧장 안일한을 호출한 것이다.
이에 그는 천천히 다가와서는 오윤진과 김수한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뭔가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괜찮아.그보다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들어 볼래?”
안일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대답을 채근했다.
반면 김수한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거 나 말거 나, 오윤진은 본론을 꺼 내 들었다.
“이 친구랑 한번 붙어볼래?나름 괜찮은 마법사거든.”
그녀의 제안에 안일한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김수한을 향해 갔다.
반대로 김수한은 오윤진을 향해 빽 하니 소리 쳤다.
“붙는다니요, 길드장님! 제가 한 수 가르쳐 주는 거죠!”
“소리치지 않아도 다 들리니까 조용히 말해줄래?어쨌든, 하겠다는 거지?”
“어휴, 알겠어요!”
김수한은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짐짓 진지한 기색으로 안일한을 향해 말했다.
“난 김수한이야.넌 이름이 뭐지?”
“안일한입니다.”
“그래, 일한아.형이 한 수 가르쳐 줄 테니 부담 갖지 말고 한번 어울려 보자!”
이에 안일한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느닷없이 오윤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빛은 마치 정말 괜찮겠냐고 묻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쿡 하고 웃으며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 갖지 말라고 했으니, 평소대로 하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안일한은 묵묵히 대답하는 한편, 김수한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예의 바른 후배구나!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김수한은 쾌활하게 웃으며 안일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슬슬 대련실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서로를 향해 마주 섰을 때, 김수한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선공은 양보할게.금방 끝날 수도 있으니 가급적이면 전력을 다하는 걸 추천해.”
“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안일한의 나직한 대답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대련이 시작됐다.
오윤진은 흥미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며 속으로 시간을 헤아렸다.
‘10분?아니지, 한 5분 정도려나?’
결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실제로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김수한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