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역시 안일한 님은 눈치가 빠르시네요
여명(黎明).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무렵을 의미하는 단어를 내걸고 나타난 이들.
공교롭게도, 그들의 명칭에 담긴 뜻은 ‘낙일’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저들은 명백히 낙일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그녀가 이끄는 낙일은 여태 양지는커녕, 음지에서조차 제대로 활동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년 전.
낙일의 간부, 사도들을 각종 단체에 침투시켰으니 활동이 아예 없지는 않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는 수년씩이나 투자할 정도로 치밀하게 작업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족적도 남기지 않았다.
지난 몇 년 간 발각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런데 우리를 겨냥한 단체가 나타났다, 라…….’
백번 양보해서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활동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정확히 간부들을 심어 둔 단체만 노려 습격을 가했고, 해당 간부들은 하나같이 즉각 처분했다는 건가?”
“……네. 여전히 믿기 어렵지만, 첩보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그녀의 최측근인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남성이 침통한 어조로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금발의 여성은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저들의 움직임은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이번 사건이 성립되려면 낙일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어야 했다.
이쯤 되면 차라리 낙일에 소속된 누군가가 정보를 넘겼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그만큼 적들의 움직임은 불가해했고, 비현실적이었다.
때문에 금발의 여성은 경악스럽기보단 아이러니한 감정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상대는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품고 있는 대계(大計)까지도.’
금발 여성의 사고는 비현실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단순히 직감이 아니었다.
근거는 이번 소식과 함께 흘러든 한 가지 정보 때문이었다.
“과거와 미래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는 예언자를 보유하고 있다지?”
“이 또한 믿기 어렵지만, 그렇습니다.”
대답하면서도 반신반의했는지, 후드를 뒤집어쓴 남성은 신중하게 답했다.
그런 남성과는 달리, 금발의 여성은 진한 미소를 띤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이미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거는 다름 아닌 미구현 특성이었다.
‘연씨세가의 계승, 그 효과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
계승이란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세월 그 자체를 전수하는 미구현 특성이었다.
알 만한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손꼽히는 특성 중 하나였다.
‘이를 타인에게 전수한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만일 실제로 그러하다면, 과거를 완벽하게 통달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미래.
이 또한 미구현 특성으로써 실존하는 능력이었다.
‘오윤진이라 했던가?’
재앙의 마녀 오윤진.
그녀는 이번에 등장한 정체 모를 집단, 여명보다 앞서 낙일에 대적하는 유일한 초인이었다.
때문에 그녀에 관한 정보는 금발의 여성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분명 완전한 미래 예지는 아니었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비슷한 능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즉, 계승처럼 미래를 온전히 통찰하는 미구현 특성이 존재할 가능성 또한 충분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번 첩보,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본다는 예언자의 존재는 꽤나 신빙성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수년에 걸친 작업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건 꽤나 가슴 아프지만……. 뭐, 이제 와선 상관없으려나?’
깔끔하게 신경을 거둬들인 것은 말이다.
그런 노력조차 예언자의 존재를 알아낸 수확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까닭이었다.
‘결국 중요한 건 대계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 단지 그뿐이니까.’
그리고 예언자의 존재는 다른 어떤 요소보다 그 가능성을 크게 올려줄 터였다.
생각의 가닥을 잡은 즉시 금발의 여성은 후드 남성에게 나직하게 운을 뗐다.
“현재 활동……, 아니지. 남아 있는 사도를 묻는 편이 빠르려나?”
“한국 쪽에 딱 한 명 남았습니다.”
“한국이라면, 김재학?”
“네 맞습니다.”
후드 남성의 대답에 금발의 여성은 묘한 표정으로 탄성을 흘렸다.
첩보에 따르면, 예언자의 소재는 한국이나 중국에 있을 가능성이 큰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도가 한국에서 활동하는 초인이라니,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금발의 여성은 미소를 머금는 한편, 생각을 정리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우선 한국을 집중적으로 살핀 다음 중국 쪽을 수색해 보면 되겠네.”
“수색하겠다는 말씀은 예언자의 존재를 특정하고, 추적하는 걸 우선하시겠다는…….”
“음? 당연한 거 아니야?”
후드 남성은 그녀의 대답을 예상치 못했는지,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아시다시피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전력의 90% 이상이 소실됐습니다. 그 부분은 어떻게…….”
“인원 공백을 메우는 건 당분간, 아니 적어도 앞으로 1, 2년은 힘들겠지.”
그만큼 이번 사태로 인한 피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더욱이 문제는 단순히 전력의 소실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세간에서 그녀가 가진 목표의 일부를 알아차린 탓에 그 어느 때보다 경각심이 커진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원을 뽑고 전력을 보충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예언자만 수중에 넣을 수 있다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잃어버린 전력을 보강하는 건 예언자, 여명의 수장을 손에 넣고 나서도 전혀 늦지 않았다.
그만큼 과거와 미래를 통달하는 능력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와 잠재력을 지녔다.
심지어 금발의 여성은 예언자만 가질 수 있다면 앞으로 5년, 아니 10년을 더 인내할 자신도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능력만 손에 넣는다면.’
전 세계.
아니, 한 차원의 정점으로 군림할 수 있을 테니까.
금발의 여성은 허공을 지그시 응시했다.
마치 시선이 가닿는 곳에 그녀가 원하는 예언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 * *
‘이번에는 꽤나 오래 가네.’
사고가 가능한 거로 보아 어느 정도 의식은 돌아온 듯했으나, 어째선지 깨질 않았다.
그 탓에 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속에서 그저 부유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파악할 수 없어 답답한 가운데.
화아앗-!
어느 순간 의식이 명료해졌다.
천천히 열리는 눈꺼풀.
그 사이로 천장의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으윽.”
참지 못해 신음을 흘리는 순간.
“……@#$%^.”
근처에서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가 흘러나왔다.
내 맞은편, 입구에 서 있는 정체 모를 여성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녀의 복장은 간호사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인식한 순간 나는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병원이구나. 아직 중국인가 보네.’
그렇게 납득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느닷없이 출입문이 벌컥 열리고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일한 생도, 몸은 괜찮나?!”
다름 아닌 국제 대회에 인솔자로 동행한 교관이었다.
그는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가와 내 몸 상태를 살피는 한편, 간호사에게도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이윽고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지.
“……별 이상 없다고 하는군. 고생 많았다.”
인솔 교관은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수척해진 얼굴을 보아하니, 내가 의식을 되찾지 못한 까닭에 꽤나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여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관님.”
“감사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그건 교관으로서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도요.”
그제야 인솔 교관은 사양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나직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아직까진 혼란스럽겠지만 생도가 한 가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부탁 말씀이신가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인솔 교관은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 귀를 기울이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생도가 진술해 줘야 할 부분이 있다.”
“진술이라면……?”
“이번 사건에 관한 거다. 아무래도 생도는 사건의 핵심 관계자…….”
그가 설명하고 있을 때.
끼이익-
느닷없이 출입문이 열리며 몇몇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세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인솔 교관만큼이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연 당주님?’
다름 아닌 연소소였다.
나타난 타이밍으로 미뤄 봤을 때, 아무래도 그녀 역시 내가 의식을 되찾기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내게 가벼운 목례를 건네고는 곧장 인솔 교관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경기장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통역용 아티팩트가 없는 까닭에 나는 연소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기다릴 수밖에 없으려나.’
하는 수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인솔 교관이 문득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몇 초간 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방금 막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되도록 짧게 부탁드리죠.”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연소소가 모종의 부탁을 건넨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인솔 교관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는 한편,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10분 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일한 생도.”
“네.”
“이걸 받도록.”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가 건네는 물건을 받았다.
다름 아닌 통역용 아티팩트였다.
곧바로 아티팩트에 마나를 불어 넣자 조금 전과는 달리 연소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인솔 교관은 연소소의 감사 인사를 뒤로한 채 그대로 병실을 벗어났다.
그렇게 나와 연소소, 그리고 그녀의 수행원 두 명만이 남게 됐을 때.
“안일한 님, 정신이 드셨군요! 다행이에요!”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내게 훅 하고 다가왔다.
나는 순간 흠칫했으나, 다행히 실례되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처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연 당주님.”
마치 해후를 나누듯, 한차례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야 그녀의 방문 목적을 들을 수 있었다.
“드릴 말씀이 많지만, 당장은 시간이 없는 만큼 중요한 이야기부터 전해 드릴게요.”
내게 전달해야 할 중요한 용건이 있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대답을 갈음하자 연소소는 빠른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이미 들으셨을 수도 있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해 안일한 님께도 진술을 요청할 거예요.”
“네, 방금 교관님께 그렇게 들었어요.”
“저는 그림자 님의 요청으로 사전에 안일한 님의 친우분들과 사전에 입을 맞춰 놨고, 당연히 저 또한 거기에 맞게 진술했어요. 그 부분을 알려 드릴게요.”
연소소는 즉시 진술할 내용을 내게 알려 줬다.
가장 먼저 게이트 내부에서 우리의 행동부터, 서문건의 최후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내게 진술하라고 알려 준 내용은 실제로 있었던 일과 다소간의 차이점이 존재했다.
더욱이 설명의 뉘앙스로 봤을 때, 그 속에 담긴 분명한 목적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아니, 나의 활약을 숨기려는 건가?’
자연스럽게 그런 추측이 떠올랐다.
나는 이 가설을 곧바로 입에 담았다.
그러자 연소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역시 안일한 님은 눈치가 빠르시네요. 맞아요, 이번 사건을 통해 안일한 님의 정체가 적들의 귀에 흘러드는 걸 최대한 방지하기 위함이에요.”
“……그렇군요. 그림자가 부탁한 건가요?”
“그때 당시 그림자 님께서 상황 정리를 저한테 맡겨 주시긴 했지만 구체적인 부분은 제 임의로 결정했어요. 혹시 문제가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되묻는 연소소.
나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목적이 내 정보의 누출을 최대한 막는 거라면.’
그녀가 행한 조치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 보였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렇게 속으로 납득하고 있을 때.
-역시 훌륭하군. 어려도 연 당주는 연 당주인가.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