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무모함의 대가는
쐐기 형태의 마기가 빗발치는 상황 속.
처억-
안일한은 기어이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악착같이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서문건은 느긋한 태도로 바라봤다.
이를 지켜보고 있자니, 조금 전 안일한의 접근을 멈춰 세우려 필사적으로 발악했을 때가 떠올랐다.
‘완전히 정반대가 되어 버렸잖아?’
반면 지금, 서로의 입장은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다.
그 사실에 격세지감과 더불어 실소가 흘러나왔다.
온몸을 관통하는 짜릿한 쾌감 속, 서문건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게 맞는 거지.’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녀석과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자신.
지금 상황이야말로 서로에게 걸맞은 위치였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이걸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는 치욕까지 겪은 까닭이었다.
적어도 안일한의 양쪽 무릎 정도는 꿇려 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를 떠올린 즉시 서문건은 허공에다 손을 휘저었다.
스윽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간단한 손짓.
하지만 거기서 비롯된 여파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스르륵-
빗발치던 마기가 빠른 속도로 모여 들더니, 안일한을 둘러 쌌다.
마치 수족의 일부처럼 마기를 자유자재로 제어하는 것이다.
서문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기를 날카로운 가시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안일한을 관통시켰다.
푸욱-!
마기는 무형의 기운에 불과한 만큼 압박감을 가할 수 있을지언정, 물리적인 피해는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체내에 스며들어 내부의 장기를 오염시키는 건 가능했다.
‘오히려 그편이 더욱 고통스러울 테지.’
실제로 저항할 틈조차 없이 관통당한 녀석의 상반신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커, 헉!”
고통을 참지 못했는지 녀석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쯤되니 희열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서문건은 이 감각을 음미하며 녀석을 지긋이 응시했다.
‘자, 어서 꿇어라.’
기대심과 함께 입꼬리를 한껏 들어 올리고 있을 때.
앞으로 고꾸라지던 안일한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그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음?”
서문건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생각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녀석은 제 몸을 관통한 마기 때문에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고요했다. 마치 정지한 기계처럼 말이다.
‘분명 마기는 작용하고 있을 텐데……?’
그의 제어 아래 녀석을 관통한 마기는 여전히 진득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즉, 현재 진행형으로 녀석의 내부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쉬이이익-
별안간 녀석의 상체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증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전 기계와도 같은 반응은 그렇다 치더라도 눈앞의 현상은 명백히 이상했다.
강화된 본능이 계속해서 경종을 울려댔다.
‘……서둘러 숨통을 끊어야겠군.’
아쉽지만, 유희는 여기까지였다.
입맛을 다시며 마기를 제어하기 직전, 안일한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
서문건은 무의식적으로 헛숨을 삼켰다.
녀석의 표정이 기괴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감정은 물론이고, 마기로 인한 고통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그야말로 무표정 그 자체였다.
인간이길 포기한 그보다 더 감정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소름마저 끼칠 지경이었다.
“……감히.”
이를 깨닫자 자존심이 팍 상했다.
그 감정은 빠르게 분노로 치환됐고,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채앵-!
다시금 검을 뽑아든 것이다.
동시에 마나처럼, 진득한 마기가 순식간에 검날을 휘감은 채 하나의 형상을 이뤄 갔다.
그 결과 마기를 품은 검은 하나의 거대한 낫의 형태를 띠게 됐다.
‘이거라면…….’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 있으리라.
그런 일념으로 곧바로 지면을 박찼다.
쩌-엉!
마기로 강화된 육체의 폭발력은 과연 대단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새 녀석의 지척에 도달한 것이다.
어찌나 빨랐는지, 안일한은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서문건은 입가를 비틀며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이만 죽어라!”
상반신째 갈라 버릴 기세로 내리치는 순간.
녀석의 왼손이 순식간에 움직였다.
그 결과.
쩌-엉!
믿기 어려운 소리와 함께 대낫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
정확히는 녀석의 왼 주먹으로 인해 저지당했다.
“……!”
서문건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녀석을 바라봤다.
그제야 녀석의 왼 주먹을 휘감고 있는 백은색 마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대체 어떻게!’
이토록 빠르게 마나를 일으킬 수 있는 건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마기로 강화된 자신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는 건지.
서문건의 머릿속은 삽시간에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것과는 별개로 강화된 본능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쌔애액-!
안일한을 향해 매서운 기세로 검격을 뿌리는 한편.
지이이잉-
의지만으로 마기를 일으켜 눈앞의 적을 옭아맸다.
그 순간.
쿠웅-!
안일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예의 위력적인 진각을 밟으며 대응했다.
하지만.
‘그걸론 어림도 없지!’
명백히 역부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기파는 실시간으로 둘러싼 마기에 갉아 먹혔다.
그대로 끝을 볼 수 있나 싶은 찰나, 또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쿠구구궁-!
안일한의 전신을 둘러싼 백은색의 마나가 실시간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제아무리 마나를 갉아먹고, 베어내도 녀석을 직접 타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 정도면 회복을 넘어 ‘재생’ 수준에 가까웠다.
‘이놈은 대체……!’
과연 사람이 맞기는 한 건지.
이 녀석이야말로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이 아닐는지.
서문건은 고민에 휩싸인 채로 치열한 공방을 거듭했다.
그사이, 그의 마음속에 서서히 조급함이 차올랐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전법을 달리 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은 말이다.
곧바로 일대의 몬스터들을 끌어 들였다.
‘놈을 상대하는 데 몬스터까지 활용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 이상으로 안일한을 향한 살심이 더 컸다.
‘네놈이 마나를 재생시킬 수 있다면.’
그보다 한층 더 빠른 속도로 무너뜨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생각지도 못한 이유 때문에 무너졌다.
“저희가 움직여야 해요!”
“발을 묶는 정도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어요! 은월아!”
“아, 알겠어!”
여태 신경조차 안 썼던 세 사람.
연소소와 나머지 둘이 나서서 다가오는 몬스터 무리의 발을 묶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저들에게 주의를 돌릴 수도 없었다.
눈앞의 적, 안일한이 제 몸의 안위를 도외시한 채 맹렬하게 달려드는 탓이었다.
“……크윽!”
서문건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그의 마기가 소모되는 양보다 녀석의 마나 소모량이 압도적으로 컸다.
즉, 소모전으로 가도 그가 유리해야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재생이 멈추지 않는 건데!’
오히려 밀리기 시작한 쪽은 서문건이었다.
원인은 명확했다.
녀석이 가진 괴물 같은 재생 능력.
심지어 이는 그가 가진 마기의 재생력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결과는 불 보듯 뻔해 보였다.
인식한 순간, 서문건이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다소간의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저 마나를 무력화시킨다.’
일순간, 녀석의 회복력을 능가하는 피해를 가한다.
마나를 무력화시킨 상태에서 속전속결로 목을 치는 것이다.
반격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어지간한 중상 쯤은 이미 한몸이나 마찬가지인 마기가 수복해 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순식간에 마기의 출력을 끌어 올렸다.
쩌-엉!
갑작스러운 폭발에 녀석의 백은색 마나는 물론, 그의 마기까지 일순간 증발했다.
서로 무방비나 다름 없는 상황, 그속에서 둘은 완전히 같은 행동을 취했다.
쌔애액-!
휘익!
서로의 급소를 노리고 필살의 일격을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커, 헉!”
서문건은 심장 어림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녀석의 주먹이 왼쪽 가슴을 강타한 탓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웃었다.
‘……손맛이, 있었어!’
녀석의 주먹은 타격에서 그친 반면, 그의 검은 녀석의 목덜미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이걸로 승부는 결정이 났다.
이제 남은 건 거슬리는 나머지 인간들을 치워 버리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여겼으나.
스윽-
느닷없이 무언가가 솟구쳤다.
다름 아닌 녀석의 오른손이었다.
“……!”
급소를 꿰뚫린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조차 경악할 만한 일이었으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터억-!
녀석이 제 목덜미를 관통한 검날을 붙잡은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서문건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분명 손맛은 확실했다.
심지어 녀석의 관통당한 목덜미에선 시뻘건 피가 울컥울컥 새나오고 있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변함없는 무표정, 이를 보는 순간 서문건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몬스터로 변한 덕분에 어지간한 피해에 무뎌진 그조차도 거동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안일한은 움직였다.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다.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었다.
스윽-
날을 쥔 손아귀에 순식간에 백은의 마나를 일으키더니.
또각-
그대로 검을 동강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안일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목덜미에 박혀 있는 검의 파편을 뽑아냈다.
피가 왈칵 터져 나왔으나, 한순간에 불과했다.
스스스-
알 수 없는 증기와 함께 순식간에 녀석의 목덜미를 관통한 상처가 아문 것이다.
결코 사람 같지 않은 일련의 과정을 목격한 서문건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니었을까.
무모함의 대가는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돌아왔다.
콰직-!
죽음.
심장을 관통당한 것이다.
“커, 헉!”
서문건은 검붉은 피를 왈칵 토해내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녀석의 오른손을 휘감은 요사스러운 기운이 눈에 들어왔다.
보자마자 직감했다.
방금 심장을 박살 낸 일격은 마기의 회복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격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깨달음과 함께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털썩-
허물어진 반동으로 고개가 절로 치켜세워졌다.
시야가 빠른 속도로 희미해지는 가운데.
다급하게 달려오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연소소가 보였다.
끝까지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아…….”
그 사실이 못내 서글프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완전히 꺼져 버렸다.
…
…
…
“일한아!”
“안일한!”
다급하게 외치며 달려오는 두 사람.
그림자는 그들의 접근을 바라봤으나, 초점이 흐릿하니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방금 전투의 후유증은 막심했다.
‘……초재생과 초진화를 한꺼번에 남발했으니.’
보통 인간이라면 진작 정신이 무너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여태 흐릿하게나마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애초에 부서져 있었으니까.
계획을 받아들인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정신과 마음은 마모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는 제 상태를 신경 쓰는 대신, 다른 쪽에 집중했다.
‘의식의 연결은 완전히 끊겼나.’
계승으로 이어진 안일한과의 연결 상태부터 살피는 것이다.
다행히 바통을 넘겨받은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녀석은 줄곧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말은 곧 녀석에게 별다른 피해가 가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이에 안심한 탓인지.
풀썩-
자연스럽게 온몸의 힘이 풀렸다.
계속해서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간 신체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보스 몬스터로 화한 서문건을 죽인 이상, 침식 게이트도 자연스럽게 소멸할 터였다.
‘굵직한 문제는 전부 해결한 셈인가.’
이를 인식하자 의식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와중에.
“아, 안일한! 정신 차려!”
“괜찮은 거야?!”
윤설하와 차은월의 외침이 귓가를 찔러 왔다.
그들에게 무어라 설명하려 했으나 입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왔다.
다름 아닌 연소소였다.
보아하니 서문건의 죽음을 확실히 확인하고 온 모양이었다.
‘연 당주라면…….’
그녀라면 충분히 남은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터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기울이는 연소소를 향해 그림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머지를.”
“예, 믿고 맡겨 주세요.”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답변.
그녀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그림자는 의식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