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림자 녀석의 말에 무어라 되물어보려는 찰나.
“얘, 얘들아 저쪽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차은월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별안간 멈춰 섰다.
반응을 보아하니, 나처럼 서문건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연소소도 이를 느꼈는지, 굳은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안일한 님. 이미 느끼셨겠지만, 저 너머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 역시 재능 있는 마법사답게 차은월 다음으로 마기를 감지한 것이다.
이쯤 되니 윤설하 또한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차은월과 연소소의 시선이 가닿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쪽에 뭔가 있는 거지?”
“……응,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아.”
차은월의 대답에 윤설하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내 쪽을 향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연소소의 시선도 어느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대책을 묻는 듯한 이들의 시선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곧바로 그림자 녀석과의 대화를 재개했다.
‘조금 전에 하던 이야기, 마저 해 줘.’
-그래.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대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속도가 관건이다.
‘최대한 빠르게 잡아야한다는 거지? 그건 지금껏 했던 일과 비슷한 느낌인데?’
-아니, 지금까지보다 더 빨라야한다.
그림자는 빠른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여태 페이스를 끌어 올린 이유와 비슷하면서, 그보다 한층 심각한 상황이니까.
‘더 심각하다?’
-본래 문제는 서문건이 몬스터를 조종한다는 것, 그로 인해 포위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라도 속도를 높였지.’
덕분에 커다란 문제 없이 각개격파를 통해 이 자리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듯, 그림자는 나직하게 부정했다.
-그건 여태 아티팩트 사용자의 활용이 미숙하다는 점도 한몫한 결과라 봐야 한다.
‘활용이 미숙하다고? 그럼 앞으로는 달라질 거라 보는 거야?’
-전망 수준이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말 그대로 차원이 달라질 거다.
아티팩트 활용, 즉 몬스터 조종의 차원이 달라진다.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럼 악마 계열의 몬스터가 된 서문건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A급 몬스터 무리까지 상대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야?’
-정확하다.
‘그럴 수가…….’
보스 몬스터로 변모한 서문건을 상대하는 것조차 결코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A급 몬스터 무리까지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즉, 녀석의 말대로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럽게 앞서 그림자가 언급한 대책으로 신경이 쏠렸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녀석은 지체없이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숨통을 끊어야 한다.
‘서문건이 조종한 몬스터가 몰려오기 전에?’
-아니, 녀석이 아티팩트의 힘을 온전히 흡수하기 전에 처리하는 거다.
달리 말해 서문건이 불완전한 상태일 때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녀석의 몬스터화, 악마화는 아직 불완전하다. 제힘을 다루는 것 자체가 미숙할 수밖에 없다.
녀석의 말은 간단했다.
서문건은 본능적으로 제 능력을 제어하는 몬스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래 인간이니까.
타고나길 몬스터가 아닌 까닭이었다.
‘확실히, 네 말대로라면 해 볼 만한 것 같긴 한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녀석의 제약은 단순히 미숙함이 전부가 아니다.
‘또 있다고?’
-그래. 인간이었을 때의 감각, 기억. 그게 녀석의 발목을 잡을 거다.
‘인간의 감각과 기억?’
-그래, 몬스터의 힘은 본능에 새겨진 능력과 이를 활용하는 데서 발휘되는 법이니까.
이 또한 서문건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기인하는 약점이었다.
그제야 조금씩 가능성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알겠어. 바로 전달하고 움직일게.’
-그래. 나머지는 상황을 봐서 맞추도록 하지.
녀석과의 대화를 일단락 낸 다음, 곧바로 세 사람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가볍지 않은 화두인 만큼, 대화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어두웠다.
특히 서문건을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에 윤설하는 일순 흠칫했다.
하지만.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 방금 정리 끝났어. 상황이 닥쳤을 때 주저하는 일은 없을 거야.”
윤설하는 생각 외로 빠르게 각오를 다졌다.
조금 전, 일찍이 마음을 다잡았던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마무리는 내가 하겠지만.’
구태여 그녀의 각오에 초를 칠 필요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호응해 줬다.
계획까지 전달을 마쳤을 때.
“가시죠, 여러분.”
연소소가 결연한 표정으로 앞장서서 걸음을 뗐다.
아무래도 이 사태에 관한 책임감과 서문건을 향한 증오심 때문인 듯했다.
실제로 그녀의 눈빛은 활화산 같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구태여 말리거나 하진 않았다.
‘경거망동할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상황이 되면 연소소 또한 입을 맞춰 둔 계획대로 움직여 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서문건에게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마기가 짙어졌다.
마침내 시야에 들어올 쯤에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마저 드는 듯했다.
‘……저게 악마화인가.’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키는 찰나.
스윽-
느닷없이 서문건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오한과 함께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길 포기한 모습이란 저런 거구나.’
세로로 길게 찢어진 샛노란 동공, 군데군데 검보랏빛으로 물든 피부, 거기에 전신을 둘러싼 불길한 마기까지.
적어도 외견만 놓고 보면 서문건은 이미 어엿한 몬스터나 다름없었다.
소름이 쫙 끼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스 몬스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걸로 거리낌 없이 녀석에게 살수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까닭이었다.
생각을 정리할 무렵, 때마침 서문건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딱 한 번, 기회를 주지.”
그가 내뱉은 말은 다름 아닌 경고였다.
스산한 어조, 이는 경기장에서 접했던 날카로운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네놈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서문건이 선수를 쳤다.
뒤늦게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알아차렸다.
처음 마주쳤을 때를 제외하곤 줄곧 연소소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도 이 사실을 깨달았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설마 아직도 이 사태의 책임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녀가 고민하는 이유를 왠지 모르게 알게 됐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거절하지.”
구태여 내가 나서서 대답한 것은 말이다.
서문건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사람조차 아닌 네가 하는 약속을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안 그런가요, 연 당주?”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돌려 연소소를 향했다.
동시에 빠르게 무어라 속삭였다.
다행히 그녀는 바로 알아들었는지.
“물론이에요. 한낱 마물로 추락한 자의 말 따위,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수준 이상으로 서문건을 쏘아붙였다.
당연히 그는 발끈했다.
“네년이 제 무덤을……!”
서문건이 분노를 전부 토해내기도 전에 나와 연소소는 곧장 움직였다.
방금 속삭임으로 전달한 내용대로 코어를 미리 활성화시켜 둔 덕분인지.
타닷-
엄청난 속도로 서문건을 향해 짓쳐들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
녀석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다급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서문건이 검을 빼 들었을 무렵에는 이미 지척에 이른 상태였다.
나는 곧바로 진천을 최대 출력으로 발휘했다.
쿠-웅!
어마어마한 진동에 녀석의 전신이 세차게 흔들렸다.
충격을 정면에서 무방비 상태로 받은 탓인지, 서문건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크윽……!”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백은의 마나를 휘감은 두 주먹으로 복마구권을 전개했다.
터엉-! 텅!
예사롭지 않은 소리와 함께 주먹이 서문건의 한 치 앞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아무래도 녀석의 전신을 둘러싼 마기가 일종의 방어막처럼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복마구권으론 무리인가.’
마를 제압하는 기운과 복마구권 특유의 고양감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줬으나, 그것만으론 역부족인 듯했다.
판단 즉시 전략을 수정했다.
“후읍!”
한 차례 심호흡을 하는 것과 동시에 미친 듯이 주먹을 내질렀다.
일권에 따른 점이 겹치고 겹쳐 거대한 권의 그림자를 형성했다.
무극삼권 제2초, 천라를 펼친 것이다.
쩌저저정-!
무수한 권영(拳影) 세례에 서문건은 인상을 팍 일그러뜨렸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는 가운데.
“이 새끼가-!”
느닷없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분노에 반응한 건지 그를 둘러싼 마기가 폭발적인 기세로 터져 나왔다.
나는 물러나는 대신, 재빠르게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쩌-엉!
기파에는 기파로.
최대 출력으로 진각을 밟은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진천의 투로에 따른 권법을 연거푸 전개했다.
파앙-! 팡!
주먹이 닿는 족족 녀석의 마기가 어그러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끈질기게 되살아났다.
이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서문건의 안광이 폭사했다.
마기가 내 공세를 견뎌내는 틈을 노리려는 건지, 되레 역공을 펼칠 준비를 취하는 것이다.
“죽어어어어어!”
그대로 서문건이 검격을 뿌리려는 찰나.
“어딜!”
등 뒤에서 뾰족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다름 아닌 연소소의 목소리였다.
이를 인식한 직후.
쌔애애액-!
뒤쪽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기세의 광풍이 몰아닥쳤다.
서문건을 죽이면 모든 상황이 끝나는 만큼, 그녀 역시 여력을 아끼지 않았다.
“……크읏! 빌어먹을!”
그녀의 바람 계열 마법에 서문건은 흉신악살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서문건의 공격 시도는 저지했으나, 그뿐이었다.
연소소의 마법은 그의 발을 찰나지간 묶어 두는 게 한계인 것이다.
금방이라도 서문건이 마기를 터뜨려 벗어날 것만 같은 순간.
꽈릉-!
우레와 같은 굉음과 함께 좌측에서부터 시퍼런 뇌전이 서문건을 향해 쇄도했다.
이번에는 차은월의 마법이었다.
알맞은 타이밍에 전격 마법을 전개한 것이다.
그녀 특유의 마력 역장을 거친 덕분인지, 뇌전의 위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크아아악!”
서문건 특유의 검보랏빛 피부에 그을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단순히 피해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몇 가닥의 전류가 서문건의 전신을 옭아맸다.
파직- 파지직-
이를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공세를 이어 나갔다.
터엉-! 터엉!
여전히 마기의 방어막에 주먹이 튕겨 나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천의 효과.
마나의 순환을 어그러뜨리는 현상이 마기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까닭이었다.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회복력이 더뎌지고 있다.’
마기의 끈질긴 재생력을 야금야금 갉아먹다 보면, 분명 본체가 드러날 것이다.
본신의 방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가늠이 잘되지 않았으나, 상관없었다.
‘결국 인간이 됐든, 몬스터가 됐든.’
피육으로 이뤄져 있는 이상, 계속 두들기다 보면 언젠간 부서지기 마련이니까.
이러한 일념으로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사정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콰광-! 콰앙! 쩌엉-!
요란한 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오는 가운데.
서문건은 속절없이 밀려났다.
아니.
“……크윽! 이 개자식이-!”
의도적으로 녀석은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피해를 어떻게든 줄이려는 심산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것이다.
그의 퇴각 경로, 그곳은 이미 한 사람이 점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압!”
다름 아닌 윤설하였다.
서문건의 배후에 서 있던 그녀는 혹한을 머금은 검을 그대로 휘둘렀다.
쩌저저적-!
윤설하의 검격은 두텁게 얼어붙어 순식간에 빙벽으로 화했다.
이는 직접적인 타격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해줬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서문건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이를 보며 나는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계획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