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섭리를 벗어난 힘
붉은색 반점의 소멸.
이러한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고작 네 명이서 A급 몬스터를 처리했다고……?’
몬스터의 소멸.
즉, 연소소 일행이 무려 A급 몬스터를 토벌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서문건은 입이 쩍 벌어졌다.
그만큼 이는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A급 몬스터라고! 게다가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두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마리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과는 난이도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빠르게 토벌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아, 아직 한 마리가 더 남아 있어……!’
서문건은 고개를 세차게 털어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직 전투는 끝난 게 아니었다.
더욱이 전투 속도에 방점을 두는 전략은 반드시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분명 피해도 만만치 않겠지.’
모르긴 몰라도, 출혈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덕분이었다.
‘……결국 두 마리를 다 잡아 버릴 줄이야.’
남아 있던 붉은색 반점이 방금 막 소멸했음에도 조금 전처럼 동요하지 않은 것은 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서문건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어차피 상대는 네 명이고, 그가 조종할 수 있는 몬스터의 수는 십여 마리가 넘었다.
즉, 시간은 저들이 아닌 그의 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니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생각을 거듭하니 자연스럽게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오히려 다급한 건 저쪽이겠지.’
서문건은 다시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손에 쥔 아티팩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 상태로 근처에 있던 몬스터 세 마리를 조종했다.
이번에는 ‘변이된 오우거 챔피언’이었다.
역시나 A급 몬스터인 데다가 이번에는 세 마리였다.
‘이번에는 빈사 상태로 만들 수 있겠지!’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터였다.
저들의 패배는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그는 저들이 죽기 전에 빠르게 반응하고자 아티팩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서문건은 속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또 잡았다고?!”
마치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황은 또다시 예상을 벗어났다.
조금 전과 비슷한, 아니 더 빠른 속도로 붉은색 반점이 소멸한 것이다.
그렇게 세 마리의 몬스터 또한 앞선 녀석들과 동일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쯤 되니 서문건은 조금 전과는 달리 경악보단 오기가 발동했다.
‘오냐,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 보자!’
서문건은 치솟는 분노를 바탕으로 코어의 마나를 가일층 끌어 올렸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몬스터 무리를 녀석들에게 접근시켰다.
하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빠득-
서문건은 거듭되는 실패에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입가에 비릿한 향이 감돌았다.
‘이, 이런 일이……!’
서문건은 당혹스러움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심지어 악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게이트 내부의 몬스터 개체 수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위험해진다.’
계속해서 공략당하면, 저들의 창끝은 결국 그를 향하게 될 터였다.
저들을 인질로 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필사적으로 생각한 덕분일까, 서문건은 불현듯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래, 보스 몬스터가 있었지!’
게이트, 그것도 침식 게이트라면 반드시 보스 몬스터가 존재할 터였다.
일반 몬스터가 A급인 이상, 보스 몬스터는 최소 A+급일 가능성이 컸다.
제아무리 A급 몬스터 무리를 상대로 날고 기는 녀석들이라 한들, A+급 몬스터를 당해낼 순 없을 것이다.
‘애초에 A급 몬스터부터는 규격 외 존재들이니까.’
이 사실을 떠올리니 서문건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이 기분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스 몬스터가 없다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스 몬스터로 추정되는 요소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서문건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코어의 마나를 한층 끌어내어 아티팩트에 쏟았다.
하지만 보스 몬스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서문건이 방황하는 사이에도 초록색 반점들은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그들의 접근은 곧 서문건의 숨통을 조여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위기감이 고조되어야 마땅한 상황이었으나, 조금 이상했다.
‘……근데 어째서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거지?’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조금 전까지 연소소 일행의 무력에 경악하고,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이에 고개를 기울이는 찰나, 문득 아티팩트의 상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고오오-
지금껏 쏟아부은 마나에 반응한 건지, 아티팩트로부터 검보랏빛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맞닿은 손바닥으로 흘러들었다.
그제야 서문건은 지금 느끼는 기묘한 고양감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마나를 불어넣으면 힘을 증폭시켜 주는, 그련 효과도 있었나?’
이는 단순히 소지하고 있을 때 역량을 강화시켜 주는 효과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좀 더 직접적으로 힘을 배가시켜 주는 쪽에 가까웠다.
더욱이 감정이나 사고에도 영향을 끼쳤다.
바로 그 때문인 듯했다.
‘씹어 죽일 녀석들 같으니……!’
어느샌가부터 머릿속에 위기감 대신 분노로 가득 차게 된 이유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스르륵-
단순히 기운을 넘어서 아티팩트 그 자체가 그에게 흡수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를 눈치챘을 무렵에는 이미 검보랏빛 구슬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텅 빈 손아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
불현듯, 스스로에게 일어난 변화를 깨달았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달라졌다.
게이트 내부를 배회하는 각종 몬스터 무리부터,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연소소 일행까지.
아티팩트를 통해 반점으로 접할 때와는 달리 전부 눈에 보였다.
심지어 연소소를 비롯한 네 명의 표정과 행동까지 눈에 훤했다.
“이게 대체…….”
낯선 감각에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서문건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다름 아닌 여태 보스 몬스터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에 관해서였다.
‘없는 게 아니었어.’
보스 몬스터는 존재했다.
다만 그 정체를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였어.”
침식 게이트를 발생시킨 장본인이자, 아티팩트를 흡수한 그가 바로 이곳의 주인이었다.
이를 깨달은 순간.
“크흐흐…….”
서문건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모든 의문을 석연하게 해소한 그는 새로이 얻은 힘을 만끽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검보랏빛 기운이 전신에 넘실거리는 가운데.
서문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네 명의 움직임이 말이다.
“어디 한번 올 테면 와 봐라.”
서문건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의 어깨 너머로 마(魔)로 화한 기운, 마기가 넘실거렸다.
* * *
비슷한 시각.
쿠웅!
눈앞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변이된 오크 족장’의 거체가 허물어지는 순간.
“허억, 허억.”
그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팍 찡그렸다.
참았던 격통이 한꺼번에 밀려든 까닭이었다.
하지만 통증과는 정반대로 체내에 누적된 피해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친구들의 격려와 그림자의 도움으로 각오를 굳힌 후.
말 그대로 ‘급속 재생’ 스킬을 바탕으로 템포를 가일층 끌어 올렸다.
실제로 전투 속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빨라졌다.
회피에 쏟을 심력까지 전부 공세에 쏟아낸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도무지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효과가 확실한 만큼, 그 이상으로 대가도 분명한 까닭이었다.
고통을 추스르고 있을 때.
-그게 정상이다.
문득 머릿속에 그림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의 영문 모를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되물었다.
‘정상이라고?’
-그래. 내가 권해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적응하지 않는 쪽을 권장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급속 재생, 재생 계열의 스킬은 섭리를 벗어난 힘이다. 본래라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거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처음 듣는 설명에 단숨에 흥미가 동했다.
‘스킬은 대개 그런 느낌 아니었어?’
-그중에서도 재생 계열 스킬은 특별하다.
‘하기야 진화 계열도 그렇지만, 재생 계열도 절대 흔하지는 않은 것 같아.’
무려 S급, 정확히는 본래 SS급까지 존재하는 스킬이 바로 ‘진화’와 ‘재생’ 계열이었다.
이는 지난번 동기화율 상승 작업을 통해 알게 된 정보였다.
‘어쨌든,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니. 나는 정신력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접근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녀석의 심각한 어조에 표정이 절로 굳었다.
이를 알아차렸는지, 그림자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말했듯, 섭리를 벗어난 힘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사용자의 정신 그 자체를 붕괴시킬 위험이 있다.
‘정신 붕괴…….’
-남용할 경우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한, 네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다.
단호함이 느껴지는 녀석의 대답에 나는 별말 없이 납득하는 한편.
새삼스럽게 의문이 떠올랐다.
‘설마 그래서 너한테 넘기라고 했던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
‘한계가 넘어서는 순간이 오면 맡겨 달라면서.’
-비슷하다.
그림자 녀석은 약간 얼버무리는 뉘앙스로 대꾸하고는, 슬슬 화제를 전환했다.
-어쨌든, 최대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말을 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래 끌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까닭이었다.
‘그래, 이제 슬슬 움직여야지.’
녀석의 설명을 듣는 사이 고통도 꽤나 가라앉았다.
이를 알아차린 건지.
“……일한아, 좀 괜찮아?”
차은월이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세 사람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이대로 쭉 가면 될 것 같아. 어차피 몬스터가 새롭게 추가되거나 하진 않으니까.”
녀석의 설명에 따르면 그랬다.
그러니 이대로만 가면 별 탈 없이 서문건에게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세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그 결과.
“여력은 충분한 것 같아.”
“나도!”
“안일한 님 덕분에 전력을 제법 보존할 수 있었어요.”
세 사람 모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나는 간단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대략 10여 분 정도 나아갔을 때.
고오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를 인식한 순간 곧바로 그림자에게 물었다.
‘저 기운은…….’
-마기다. 아무래도 아티팩트를 파괴하는 방법은 영영 물 건너간 것 같군.
마기(魔氣).
낯선 단어에 고개를 기울이자, 녀석은 경직된 어조로 설명을 이어 갔다.
-말 그대로다. 이 정도 기운이라면, 이미 녀석은 아티팩트를 흡수한 상태일 거다.
‘……아티팩트를 흡수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단순히 침식 게이트를 발생시키는 아티팩트 아니었어?’
김한석과의 전투를 떠올리며 묻는 말에 녀석은 나직하게 부정했다.
-지금 서문건이 흡수한 아티팩트는 김한석이 사용했던 것과는 규격이 다르다.
‘규격이 다르다니…….’
-효과부터 성능까지, 차원이 다른 물건이지. 무엇보다 사용자를 악마로 변모시킬 정도니까. 벌써 저런 물건까지 만들어 냈을 줄이야.
그림자는 심각한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이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 되물어 봤다.
‘……악마로 변모시킨다니, 자세히 설명해 줘.’
-말 그대로다. 서문건은 아티팩트를 통해 악마 계열의 몬스터가 된 거다. 쉽게 말해 이번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로 전락한 셈이지.
‘그럴 수가!’
사람이 몬스터가 되다니.
그야말로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충격적인 정보에 입이 절로 벌어질 때, 녀석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선 그다지 오래되진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한편, 그림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