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그게 곧 활로가 될 거다
‘……성공했다.’
서문건은 손에 쥔 검보랏빛 구슬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구슬.
이는 오래 전, 그의 숙부인 서문일우에게서 받은 아티팩트였다.
숙부는 아티팩트를 챙겨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티팩트는 평상시 네 힘을 강화시켜 주고, 유사시에는 네 목숨을 구해 줄 거다.
숙부의 조언은 사실이었다.
먼저 전자의 경우, 이번 국제 대회를 통해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다른 녀석들의 A급 성적보다 기록이 훨씬 더 잘 나왔었지.’
같은 A급 성적이었어도, 그는 다른 팀의 인원들과 확실히 달랐다.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데 성공한 생도들 중 오직 그만이 유일하게 A+급을 넘보는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숙부의 아티팩트는 단순히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묘한 쾌감과 함께 온몸에 활력이 넘쳐 흘렀다.
효과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지금에서야 그 효과가 증명됐다.
‘그런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을 줄이야…….’
연씨세가의 비겁한 술수로 인해 모든 퇴로가 막혀 버린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서문건은 이렇듯 멀쩡하게 빠져나왔다.
이 또한 숙부가 챙겨 준 아티팩트 덕분이었다.
다만 수혜를 입은 사실과는 별개로 그는 아직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설마 게이트를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는 아티팩트라니.’
사면초가의 상황을 벗어난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실제 게이트에 진입했다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평범한 게이트가 아니라 침식 현상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진입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더욱이 그는 혼자이고, 이 게이트 내부에는 몬스터뿐만 아니라 가증스러운 녀석들도 함께 있을 터였다.
‘하찮은 것들 때문에 이딴 걱정을 해야 하다니……!’
서문건은 빠득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중 문득 그의 시야에 아티팩트가 들어왔다.
정확히는, 구슬 속에서 반짝이는 붉은색 반점들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초록색 점하고, 흰색 점도 있네?’
숫자로 따지면 붉은색 반점이 가장 많았다.
반면 초록색 반점은 네 개, 마지막으로 흰색 점은 단 하나뿐이었다.
정체 모를 반점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흰색 반점을 향해 붉은색 반점이 가까워졌다.
대체 뭔가 싶은 찰나.
쿠웅! 쿠웅!
딛고 선 자리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존재감이 느껴졌다.
서문건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순식간에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처음 접하는 이질적인 존재가 시야에 들어왔다.
‘모, 몬스터인가?!’
다름 아닌 몬스터였다.
서문건은 다급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검을 빼들고 녀석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때.
‘……잠깐만.’
문득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마치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듯, 공격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 것이다.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은 거로 보아 이 정도 간격이면 충분히 서문건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더 이상 그에게 접근하지 않는 점은 확실히 이상했다.
“대체 뭐지…….”
서문건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검보랏빛 구슬을 바라봤다.
초록색 점의 위치는 조금 전과 그대로인 반면, 붉은색 반점 하나가 근처에 와 있었다.
이를 확인한 순간 그의 뇌리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 갔다.
‘설마 이거, 초록색 점이 내 위치를 뜻하는 건가?’
또한 근처에 붉은색 반점은 눈앞의 몬스터를 가리키는 듯했다.
그렇다면 다수의 붉은색 반점이 존재하는 게 설명된다.
마지막으로 네 개의 흰색 반점은…….
‘녀석들이 틀림없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연소소와 안일한, 그리고 나머지 두 녀석일 가능성이 컸다.
이를 떠올린 순간, 서문건은 아티팩트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로 인해 의도치 않게 근처의 붉은색 반점에 검지가 닿았다.
이에 붉은색 반점의 위치가 움직였다.
인식한 순간.
쿵! 쿵! 쿵!
근처에서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그에게 접근해 온 몬스터가 몸을 틀고 움직인 것이다.
“……!”
서문건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제야 아티팩트의 효과를 제대로 깨달은 까닭이었다.
재차 확인하기 위해 그는 떨리는 손길로 아티팩트 속 붉은색 반점을 조작했다.
그러자.
쿵! 쿵!
이번에는 다시 몬스터가 그에게로 접근해 왔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다니!’
숙부가 건네준 아티팩트의 효과는 비단 침식 게이트를 일으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내부의 이질적으로 변질된 몬스터까지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효과를 완벽하게 깨달은 순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그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거라면…….’
스스로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건 물론.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녀석들에게도 복수할 수 있다.
전능함마저 느껴지는 가운데, 서문건은 입꼬리를 비죽 들어 올리며 아티팩트에 마나를 쏟아부었다.
검보랏빛 구슬로부터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어디 한번 있는 힘껏 발버둥쳐 봐라.”
아티팩트의 붉은색 반점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 * *
비슷한 시각.
-자세한 이야기는 저 녀석을 처리한 다음에 하지.
나는 그림자 녀석의 제안에 대답하는 대신.
타닷-
곧바로 지면을 박차고 쏘아져 갔다.
목표는 정면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내는 몬스터.
침식 현상으로 인해 A급으로 변이된 개체 ‘변이된 오크 족장’이었다.
‘A급 몬스터와의 전투는 처음이니까.’
가급적이면 여력을 신경 쓰기보단 전력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둘 생각이었다.
그 일환으로서 코어의 마나를 가일층 끌어 올렸다.
쿠구구궁-!
혼원현천신공의 기운이 노도처럼 사지백해로 흘러가는 가운데.
이를 바탕으로 흑영신보를 펼쳤다.
칠흑빛 안개를 두른 채 녀석의 간격에 들어서는 순간.
쩌-엉!
곧바로 진각을 밟았다.
진천에서 비롯된 기파가 엄청난 기세로 녀석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대로 방어력이 무력화되나 싶은 찰나, 녀석이 주먹을 내질렀다.
평범해 보이는 일권,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쩌적-
무형의 기운, 그 자체를 박살 낸 것이다.
‘……진각만으론 역부족인가.’
기본적인 수준의 출력으로 발휘했다고는 하나, B+급 난이도의 보스 몬스터에게까지 통용되던 효과였다.
그만큼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하던 무공, 진천이 녀석에겐 먹히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A급 몬스터의 저력이 피부에 와닿는 기분이 드는 가운데.
나는 판단을 조금 달리했다.
‘진천에는 진각이 전부가 아니니까.’
진천에 있어 진각을 밟는 건 단순히 시작에 불과했다.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온갖 투로와 그에 따른 권법이야말로 진천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믿는 구석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안일한 님, 엄호는 맡겨 주시길!”
심상치 않은 수준의 마나를 전개하며 언제든지 엄호에 나설 준비를 갖춘 연소소부터.
“안일한, 너한테 맞출게!”
“편하게 움직여도 돼!”
사정을 미처 설명하지 못했음에도 의심 한 점 없이 적극적으로 조력에 나서주는 친구들까지.
이들 모두 기꺼이 내게 맞춰줄 기세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녀석의 지척에 이르렀다.
가까이서 마주하니 녀석의 흉험한 기세가 한층 살벌하게 다가왔다.
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자세를 갖췄다.
“흐읍!”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한번 진천을 펼쳤다.
녀석이 대처할 틈조차 없이 발휘한 덕분일까.
쩌엉-!
굉음과 함께 기파가 녀석에게 쇄도해 갔다.
결과는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나로 강화된 녀석의 방어력을 뚫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번에도 역시 개의치 않았다.
진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나는 판단과 동시에 코어의 출력을 한층 끌어 올렸다.
지금부터는 마나를 아낌없이 투자할 생각이었다.
쿠구구궁-
고고한 흐름에 따라 신체 능력이 강화되는 한편.
양손에 맺힌 백은색 마나의 농도가 한층 짙어졌다.
그 상태로 몸에 익은 투로에 따라 권법을 펼쳤다.
거기에 맞춰 상대방, ‘변이된 오크 족장’ 또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주먹을 뻗어왔다.
콰직-!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격돌하는 주먹.
충격이 팔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음에도 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역시 타격으로 인한 효과는 있는 모양이군.’
진천의 투로에 따라 뻗은 일권.
이에 녀석의 마나 방어력이 흐트러졌다.
이 사실을 인식한 순간.
츠즈즈즛-
등 뒤에서부터 한줄기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이는 무형의 칼날처럼 은밀하게 날아가 조금 전 마나 방어막을 무력화시킨 부위에 그대로 적중했다.
그워어-!
조금 전 교환과는 달리 녀석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 말은 곧 방금 무형의 칼날로 인한 타격이 유효하다는 뜻이었다.
머릿속으로 정보를 갈무리하는 한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연소소가 옅게 웃고 있었다.
그제야 방금 날아든 무형의 칼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바람 계열 마법인가. 엄호는 맡겨 달라더니.’
과연, 그녀의 발언은 빈말이 아닌 듯했다.
그만큼 조금 전 지원 사격의 타이밍은 날카로웠다.
나는 한층 올라간 자신감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진천을 펼쳤다.
콰앙! 쾅!
진각을 밟고, 투로를 이어나갈수록 코어의 마나가 빠르게 소모되어 갔다.
하지만 ‘재생’ 스킬 덕분인지, 그만큼 빠른 속도로 채워졌다.
그렇게 녀석에게 데미지를 축적시키는 가운데.
두 사람, 윤설하와 차은월 또한 가만히 선 채로 구경만 하고 있진 않았다.
가장 먼저 윤설하의 경우.
쩌저적-
진천호 선배가 제공한 심법과 특성을 바탕으로 일대를 얼려 버렸다.
퇴로를 차단하고, 움직임을 방해한 것이다.
반면 차은월은 윤설하보단 조금 더 직접적이었다.
파지직-
윤설하와 비슷한 느낌으로 손에 넣은 전격 마법, ‘전류 제어’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거기에 그녀가 가진 특성, 마력 역장의 증폭을 바탕으로 제어 마법의 효과까지 구현해 냈다.
바로 그 덕분이었다.
그워억……!
차마 대비하지 못한 녀석의 일격을 포함한 공세에 전부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은 말이다.
차은월의 전격 마법은 마치 사슬처럼 녀석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물론 지속 시간 자체는 짧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다.
휘익-!
진천의 투로에 따라 주먹을 뻗는 한편, 거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여기서는…….’
무극삼권의 제2초, 천라의 묘리가 제격일 듯싶었다.
대강 녀석의 전력을 파악했으니, 슬슬 전투를 끝내야 하는 까닭이었다.
판단 즉시 급격하게 페이스를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권격을 쏟아냈다.
콰과과광-!
무수히 쏟아지는 권영.
마치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 녀석의 전신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보아 녀석의 마나 방어력은 실시간으로 파훼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이에요!”
내 뒤에 있는 든든한 조력자들도 빠르게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세 사람이 집중시킨 화력에 녀석은 급속도로 너덜너덜해져 갔다.
마침내.
쿠웅!
녀석의 육중한 거체가 허물어졌다.
“돼, 됐다!”
“해냈어!”
등 뒤에서부터 윤설하와 차은월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소소 또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는 한편, 머릿속으로 방금 전투를 갈무리했다.
‘이대로만 가면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낙관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현재 상황은 A급 몬스터와의 전투가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심각할 수 있는 상황이지.
문득 그림자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목소리가 살짝 굳어 있는 게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가만히 경청한 결과.
-서문건, 녀석은 게이트 내부의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
“……!”
꽤나 심각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표정이 절로 굳어가는 가운데, 녀석은 나직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단순히 문제만 알려주는 게 아니라 해결책까지 제시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 되물었다.
‘뭔데?’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 네가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
‘알아야 할 부분?’
-그래.
그림자는 가만히 수긍한 다음,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네가 가진 능력의 한계점, 그걸 정확히 파악하는 게 곧 활로가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