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지금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비슷한 시각, 경기장 내부.
고오오오-
경기장의 한복판에 검보랏빛 기운이 꿀렁거렸다.
마치 와류(渦流)처럼 한가운데로 끊임없이 수렴해 가는 기운.
이러한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뿐이었다.
‘게이트……!’
그것도 결코 평범한 게이트가 아니었다.
이를 깨달은 연소소의 최측근, 김응의 표정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는 스스로의 부주의함을 자책하는 한편, 그에 따른 분노를 오롯이 서문세가에 쏟아냈다.
“저 비열한 작자들을 모조리 제압하라! 저항할 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의 지시에 연씨세가 측 인원들은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반대로 서문세가 측 인원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서문건의 측근에 해당하는 남성, 진호를 바라봤다.
제아무리 서문세가의 간부인 진호라 한들, 현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때문에 서문세가 측 인원들은 속절없이 연씨세가 사람들에게 제압당했다.
그 사이, 협회 측 사람이자 대회 관계자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김응에게 다가갔다.
김응은 그를 향해 굳은 낯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들은 본가를 집어삼킬 야욕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이렇듯, 저희 아가씨는 물론이고 타국의 생도들에게도 간악한 술수를 부렸소. 제압조차 우리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한 결과라는 점 알아두시오.”
이는 지금 연씨세가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지적도 받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김응의 서슬 퍼런 기세에 대회 관계자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지적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귀하의 분노는 지극히 정당합니다. 이 자리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져도 저희 협회 측이 문제 삼을 일은 없을 것을 미리 약속드리겠습니다.”
대회 관계자는 정중한 태도로 말을 맺는 한편.
하나둘씩 제압당해 쓰러지는 서문세가 사람들을 한차례 노려봤다.
그러고는 혀를 차며 분통을 터뜨렸다.
“소위 명문이라는 작자들이 이런 후안무치한 일을 벌이다니!”
사실 관계자 또한 서문세가 측의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황망함 이상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단순히 가문과 가문 사이의 분쟁을 넘어, 타국의 생도까지 끌어들인 까닭이었다.
이번 대회의 결승으로 알 수 있듯, 한국 초인 사회의 저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자국 내 문제에서 국제적인 문제로 번졌으니, 중국 초인 협회 또한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번 사태는 무조건 한국 측 초인들의 피해 없이 수습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협회에 끼칠 타격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
관계자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경기장의 출입구 쪽에서 냉막한 인상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거로 보아 상당히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사전에 이야기가 끝난 모양인지, 입구를 봉쇄하고 있던 연씨세가 측 인원들은 남성에게 길을 터 줬다.
남성은 그 길로 곧장 김응과 관계자에게 다가왔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오자마자 심각한 낯빛으로 호통치는 남성.
그는 다름 아닌 한국 측 아카데미의 인솔 교관이었다.
인솔 교관의 분노는 연씨세가 측의 그것만큼 정당한 것이었다.
때문에 관계자는 저자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단히 송구합니다, 교관님. 하지만 이번 사태는 저희 협회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해결하겠습니다. 물론 한국 측 생도들의 안전을 최우선 사항으로 두고 움직일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고개마저 숙여가며 사죄하는 관계자.
더불어 연씨세가의 김응이 인솔 교관에게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정을 전부 다 듣게 된 교관은 제압당한 서문세가 측 사람들을 노려보며 빠득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생도들이 무사해야 할 겁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인솔 교관은 더는 관계자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돌려 생도들을 집어삼켰다는 검보랏빛 게이트를 바라봤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불길한 기운이 전신에 엄습해 왔다.
그만큼 심상치 않은 수준의 게이트에 생도들이 갇혀 있다고 생각하니 암담함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냥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현재 필요한 건 해결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서둘러 해결해야 합니다. 두 분, 고견이 있다면 들려주시지요.”
인솔 교관의 정중한 물음에 관계자는 침음을 흘렸다.
반면 김응은 진지한 낯빛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관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게이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단순한 게이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제 생각엔 침식 현상과도 관련된 것 같네요.”
“침식 현상……?”
김응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침식 현상에 대해선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의문을 느낀 건 인솔 교관이 그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작년에 한국의 아카데미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알아차리신 거군요.”
김응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한편, 머릿속으로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침식 현상이라면 해결이 가능하겠군요. 다만 이 정도 기운이면…….”
그는 떠올린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으려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A급 마법사가 필요하겠지요. 게다가 눈앞의 게이트는 작년에 접했던 그것보다 한층 심각해 보이니 최소 둘은 필요할 듯싶습니다.”
인솔 교관의 말처럼, A급 마법사가 최소 둘은 필요한 까닭이었다.
그 말은 곧 눈앞의 게이트를 당장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단번에 이해한 김응은 곧바로 근처의 수하를 불러들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결과가 썩 좋지 않았는지.
“A급 마법사 둘이라면, 최대한 빠르게 구해도 하루는 족히 걸릴 것 같습니다.”
김응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렇게 답했다.
그 또한 자신의 생도를 걱정하는 인솔 교관 만큼이나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게이트에는 연씨세가의 금지옥엽도 함께 갇혀 있는 까닭이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사정을 헤아린 인솔 교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부디 무사하길 바랄 수밖에 없겠군요.”
인솔 교관은 저 너머에 있을 생도들의 안전을 간절하게 바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 *
쿠웅! 쿠웅! 쿠웅!
점차 가까워지는 육중한 발소리.
이에 윤설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은 점이나 눈을 떠보니 게이트에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특히나 혼란스러운 점은 다름이 아니었다.
“연 당주, 아무래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네, 맡겨 주세요!”
두 사람, 안일한과 연소소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올 무언가에 대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태연한 태도는 도리어 윤설하, 그녀 스스로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서, 설하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비슷한 시점에 정신을 차린 차은월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제야 윤설하는 알아차렸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그녀와 차은월이 이상한 게 아니라, 눈앞의 안일한과 연소소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현 상황은 누가 더 이상한지를 견주어 볼 때가 아닌 듯했다.
때문에 윤설하는 차은월을 부축하는 한편, 안일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일한, 너는 뭔가 알고 있지?”
질문을 건네긴 했어도, 윤설하는 속으로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안일한은 이번에도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됐다.
‘여태까지 설명을 회피해 왔으니까.’
1년 넘게 그와 어울려온 만큼 윤설하는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안일한, 그는 분명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모든 걸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게 윤설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아직도 나는, 우리는 도움이 될 수 없는 걸까?’
사정을 밝히지 않고, 도움을 청하지 않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윤설하는 이를 스스로가 ‘미덥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차은월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차마 묻지 못하고 안일한의 눈치를 봤다.
그러기를 수 초, 이윽고 안일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이번 일이 끝나면 반드시 설명해 줄게. 그러니 지금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의 말에 윤설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으로 안일한에게 부탁을 받은 까닭이었다.
그녀는 얼떨떨한 심정을 뒤로한 채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전부 설명해 줄 거야?”
“어, 전부.”
“알겠어.”
윤설하는 즉각적으로 대답하고는 차은월을 돌아봤다.
그녀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꼭 설명해 줘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할게.”
“알겠어!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차은월이 씩씩한 태도로 대답하려는 찰나.
그워어어-!
마침내 육중한 발소리를 내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윤설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이질적인 존재가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저, 저건 대체……!”
외견 자체는 오크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기억 속의 오크와는 다르게 피부가 시커멓고, 체격은 두 배 가까이 컸다.
처음 접하는 몬스터. 그럼에도 안일한은 곧바로 녀석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변이된 오크 족장이야.”
“안일한, 넌 그걸 어떻게……!”
“자세히 설명하긴 힘들 것 같아. 다만 너희들도 침식 현상은 알고 있지?”
침식 현상.
작년에 두 번이나 겪어 봤던 만큼, 결코 잊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래, 그것 때문이야. 게다가 A급이지.”
“A급이라니…….”
듣는 순간, 윤설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은월 또한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A급 몬스터가 주는 위압감은 그만큼 엄청났다.
하지만.
“안일한 님, 제가 보조해 드릴 테니 부디 전위(前衞)를……!”
“알겠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죠.”
두 사람, 안일한과 연소소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역할을 분배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타닷-
안일한은 곧장 전신에 칠흑빛 안개를 휘감은 채 변이된 오크 족장을 향해 쏘아져 갔다.
중국 팀의 연소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양손 가득 자줏빛 마나를 전개하며 공격 마법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대로 녀석과의 전투가 시작된 순간.
“어, 어떻게……!”
윤설하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만큼 두 사람의 활약은 눈부실 지경이었다.
자그마치 A급 몬스터를 상대로 팽팽하게 맞서 싸우는 안일한과 철저히 보조 역할을 다하는 연소소.
두 사람의 전투는 마치 노련한 초인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그로 인해 홀린 듯, 둘의 전투를 바라보기를 수 초.
“서, 설하야!”
문득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차은월의 것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굳은 각오가 서린 눈빛, 이를 보는 순간.
‘……정신 차리자. 지금은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윤설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는 차은월과 마찬가지로 두 눈에 각오를 품은 채 몸을 일으켰다.
‘분명 저 둘의 역량은 나보다 한참 앞서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분명 그녀에게 가능한 일이, 현 상황에서 맡아야 하는 역할이 있을 터였다.
그런 일념으로 윤설하는 검을 뽑아들며 코어를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고오오-
환영검가의 지원을 받은 마나 심법, ‘백색의 숨’에 따른 마나가 고고하게 일었다.
이윽고 눈처럼 새하얀 마나가 그녀의 검신을 휘감았다.
그 상태로 마력형 특성, ‘혹한’을 더했다.
그러자.
쩌저저적-
딛고 선 자리가 그대로 얼어붙고, 검면을 타고 흐르는 기운은 허공에 눈꽃을 피워냈다.
그 사이, 차은월 또한 마력 역장을 겹겹이 전개했다.
동시에 그녀의 양손에 맺힌 샛노란 마나의 성질이 빠르게 변해 갔다.
파지직-
전격 마법, 그녀 역시 도정석 선배와 오윤서에게 받은 공격 마법을 구현한 것이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윤설하는 투지를 불태우며 입을 열었다.
“은월아, 할 수 있지?”
“응!”
“우리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