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필요한 일이라면, 기꺼이
“소소,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황망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서문건.
연소소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봤다.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서문건이 무어라 분노를 터뜨리려는 찰나.
“도련님, 지금은 경거망동할 때가 아닙니다!”
서문건의 측근으로 보이는 남성이 다급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무래도 연소소 대신 그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려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씨세가 측에서 작정한 모양입니다. 스타디움이 벌써 장악된 건 물론이고, 현재 본가 쪽도 연락이…….”
남성은 심각하게 굳은 낯빛으로 서문건의 귓가에 전말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서문건의 안색은 창백해져 갔다.
생각 이상으로 사태가 심각한 까닭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연씨세가의 움직임은 은밀하면서도 신속했다.
이를 증명하듯.
“이분들의 보호를.”
연소소는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대동한 수행원들에게 나와 내 친구들의 보호를 지시했다.
그 즉시 연씨세가 측 인원들은 신속하게 움직여 나와 내 친구들을 보호하듯 둘러쌌다.
추측건대 연소소는 서문세가 측 인원들의 흉계, 우리를 인질로 삼으려는 속내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치잇.”
서문건의 측근은 표정을 와락 구기며 혀를 짧게 찼다.
한국 팀을 인질로 삼는 건 사실상 최선이 아닌, 차악책에 불과했으나 시도하기도 전에 좌절됐다.
즉, 그나마 존재하던 활로까지 꽉 막혀 버린 것이다.
그렇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대치하기를 수 분.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여태 숨죽이고 사태를 지켜보던 대회 관계자가 침묵을 깨뜨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연소소와 서문건의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결승전 경기를 치르기 전에 서문건의 눈치를 보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는 찰나.
-저자는 중국 쪽 초인 협회에서 파견된 사람일 거다.
때마침 머릿속에서 그림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의문을 해소할 겸, 곧바로 대화에 어울렸다.
‘중국 초인 협회?’
-그래. 방금 끼어든 건 양측의 대치 상황을 중재하기 위함이겠지.
녀석의 말을 증명하듯, 대회 관계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연소소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연 당주, 설명해 주시오.”
관계자의 태도는 냉기가 풀풀 날렸다.
여태 중국 팀에게 경어를 사용하며 예의를 차렸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연소소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대회 관계자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관계자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이윽고 연소소가 이야기를 마치고 멀어질 무렵.
“……설명 감사합니다, 연 당주님. 연씨세가 측 입장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관계자는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답했다.
이어서 그는 나와 내 친구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의 안전은 협회 차원에서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만들어 대단히 송구합니다.”
예의를 갖춰 양해를 구하는 관계자.
경기 직전, 서문건의 눈치를 보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깍듯한 태도였다.
때문에 다소 아이러니하게 다가왔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대회 관계자는 우리의 대답을 듣고 난 후, 마지막으로 서문건을 돌아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찌릿-
관계자는 적개심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서문세가 측 인원들을 훑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협회 측에서도 연씨세가의 손을 들어줬음을 말이다.
이는 곧 그만큼 연소소의 준비가 완벽했다는 사실을 뜻했다.
‘이 정도일 줄이야.’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흘러가는 상황에 자연스럽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편안한 마음으로 사태를 관망하는 나와는 달리.
“연소소, 대답해!”
서문건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서문세가의 인원들은 당황했고, 연씨세가의 인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서문건의 돌발 행동에 연씨세가 측 인원들이 순간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 순간.
“괜찮아요.”
연소소가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그녀의 손짓에 연씨세가 측 인원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서문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연소소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대답하라는 말씀이시죠?”
“……!”
그녀의 서슬 퍼런 기세에 서문건은 다만 두 눈을 부릅뜰 뿐.
말문이 막혀 버린 것처럼 아무런 대꾸조차 못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소소는 거침없이 서문건을 몰아붙였다.
“귀하의 가문이 저희 가문을 노리고 뒤에서 벌인 저열한 공작들을 나열해 드리면 될까요?”
연소소의 입에서 그간 서문세가가 벌인 크고 작은 비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에 서문건은 물론이고, 곁에 있던 측근들의 안색까지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언급한 부분들은 작정하고 서문세가를 털어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거기에 본래라면 중재에 나섰어야 할 협회 측 인원마저 서문세가에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 반응이야말로 연소소가 제시한 비리의 증거가 명명백백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먼저 화친을 제안한 주제에 뒤에선 이렇듯 추잡스러운 야욕을 드러내다니, 가증스럽게 짝이 없군요. 제가 더 설명해 드려야 합니까?”
“……이익!”
뾰족한 어조로 몰아붙이는 연소소.
이에 서문건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그를 등한시한 채, 연소소는 고개를 뒤로 살짝 기울여 내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중요한 내용일 것 같아 나는 그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서문세가는 이 자리를 시작으로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속절없이 무너질 거예요.”
“그렇군요.”
“현재 서문세가에 숨어든 낙일의 간자, 서문척을 최우선으로 척살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니 머지않아 결과가 나올 거고요.”
“중국 쪽은 완벽하네요. 그럼 외국 쪽은……?”
“우선 두 군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머지도 오늘 중으로 연락이 올 것 같아요.”
연소소는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녀를 비롯한 연씨세가의 일 처리는 그야말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었다.
정확히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이대로 가면 별다른 문제 없이 두 번째 계획을 완수할 수 있겠군.
그림자 또한 조심스럽게 결과를 낙관했다.
녀석의 감상을 듣게 되니 차츰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심지어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아 얼떨떨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자연스럽게 최종 계획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찰나.
“도, 도련님!”
정면에서부터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거기에 반응할 틈조차 없이.
타닷-
한 인영이 코앞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건이 다짜고짜 달려든 것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연씨세가 측 인원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조금 전 연소소의 지시에 살짝 물러나 있었던 게 원인이었다.
“……!”
워낙 창촐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 또한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급하게 마나를 끌어올리는 찰나.
“안일한 님! 제 뒤로……!”
별안간 연소소가 나를 지키듯, 내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연씨세가 측 인원들도 서문건을 제지하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서문건은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품속에서부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검보랏빛, 요사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건의 손에 들린 정체 모를 무언가를 목격한 순간.
-조심해라, 저건……!
머릿속에서 그림자의 다급한 음성이 울려왔다.
녀석의 설명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슈와아악-!
불길한 빛무리가 순식간에 일대를 뒤덮었다.
이질적인 감각이 전신을 옭아매는 가운데.
고오오오-
체내의 코어가 저절로 활성화됐다.
삿된 기운을 몰아내는 혼원현천신공의 효능이 발휘된 것이다.
그 덕분일까.
기억이 살짝살짝 끊기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 속에서도 의식만큼은 생생했다.
‘이게 대체…….’
온 세상이 좀 전의 검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불길함이 발끝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소름 돋는 감각에 몸서리치고 있을 때.
화아아아……
풍경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펼쳐진 광경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줬다.
‘……게이트?’
그것도 가상 게이트와는 근본적으로 결이 다른, 실제 게이트였다.
온몸에 느껴지는 마나의 감각이 이를 증명했다.
처한 상황을 인식한 순간.
“크윽!”
아찔한 두통이 몰려왔다.
저도 모르게 한차례 휘청거리다가 겨우 자세를 잡아갈 무렵.
톡-
발끝에 뭔가가 닿았다.
고개를 살짝 내리자 익숙한 면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소소에 윤설하, 그리고 차은월까지…….’
아무래도 서문건의 돌발적인 행동에 휩쓸린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상태를 살피는 한편, 머릿속으로 그림자에게 말을 걸었다.
‘깨어있어?’
-……잠깐 연결이 끊겼지만 지금은 괜찮다.
다행히 바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까 설명하려던 내용, 이어서 말해 줘.’
-김한석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아티팩트다.
‘……!’
아카데미에 숨어든 낙일의 간부이자, 그림자의 도움으로 직접 숨통을 끊은 김한석.
그림자 녀석의 언급에 자연스럽게 작년 수행평가 참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동시에 한 가지, 현 상황에 대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지금 이거…….’
-그래, 침식 현상이다.
침식 현상.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림자는 나직하게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침식을 일으키는 데서 나아가 ‘침식된 게이트’를 발생시킨 거다.
‘침식된 게이트 자체를 발생시킨 거라니…….’
즉, 이전의 수행평가 참사 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지금 상황이 훨씬 더 위험한 모양이었다.
-게이트 내부에서 침식을 일으키면 출현하는 몬스터 수준의 상승 폭이 일정하지만, 지금은 아마 그렇지 않을 거다.
‘그럼 얼마나 강한 개체가 등장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건가?’
-정확하다. 게다가 서문건이 아티팩트를 발동시킨 장소의 영향도 있을 거다.
‘장소라면, 가상 게이트?’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높은 확률로 영향을 받았겠지.
‘그렇다는 건…….’
-최소 B+급 이상일 거다.
최소 B+급. 심지어 상한선은 없는 모양이었다.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현 상황은 지난 수행평가 때보다 암담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림자는 경고에서 그치지 않고 해결책까지 함께 제시했다.
‘방법? 뭔데?’
-서문건의 아티팩트를 파괴하거나, 아티팩트의 주인을 제거하는 것. 둘 중 하나다.
‘……!’
물건을 파괴하거나, 물건의 주인을 죽이는 것.
그래야 이곳, 침식 게이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를 듣는 순간 사실상 해결책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문건을 죽여야 하는 건가.’
그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자,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었다.
애초에 의도적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유발한 서문건이 얌전히 아티팩트를 내놓을 리가 없었다.
격렬히 저항할 게 뻔한 상대에게서 물건만 뺏어서 파괴한다?
이는 지나치게 어리숙한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미리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필요한 일이라면, 기꺼이 한다.’
그게 설령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일이 될지라도.
굳게 마음을 다잡는 사이.
“……으윽.”
바로 옆에서 미약한 신음이 들려왔다.
다름 아닌 연소소였다.
그녀를 시작으로.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윤설하와 차은월도 의식을 되찾았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개중에서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연소소는 나를 비롯하여 주위를 둘러봤다.
이윽고 내 친구들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그녀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갔다.
“……죄송합니다. 전부 제 탓이에요.”
연소소는 주저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난데없이 사죄를 받은 내 친구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시간을 끌 게 아니라 바로 서문건을 처리했다면…….”
그녀가 죄책감 어린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가려는 순간.
쿵! 쿵! 쿵! 쿵!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