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머지않아 자세히 알 수 있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연씨세가의 직계, 연소소가 남긴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기울이는 한편.
그림자 녀석에게 곧바로 질문을 건넸다.
‘너도 계속 보고 있었지?’
-그래.
‘무슨 말이야? 설마 내가 생각한 그런 뜻이야?’
나는 연소소에게 접촉하기에 앞서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접촉함으로써 그녀가 나와 내 능력의 전부를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를 그림자는 단번에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녀석은 내 물음에 시원스럽게 긍정했다.
-정확하다. 방금 접촉으로 연소소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알게 됐다.
‘대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길래…….’
단 한 번의 악수로 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지.
무슨 능력인지 가늠조차 안 됐다.
그림자는 이런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알려 주는 대신.
-한 가지 더 있다.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한 가지가 더 있다니?’
-이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게 됐을 거다.
‘연소소가 해야 할 일? 설마, 그래서 내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건가?’
-그렇겠지.
그제야 그녀가 내게 남긴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몇 가지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혹시 조금 전에 나한테 적개심을 보인 녀석의 정체도 알고 있어?’
내가 연소소와 악수를 나눴을 당시, 마땅찮게 바라보던 청년의 정체라든지.
혹은 그녀와의 접촉 이후, 내가 추가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차근차근 물어볼 생각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안일한! 다들 모였어!”
연회장 입구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백유진이었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집합할 시간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미안, 바로 갈게.”
나는 백유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머지 대화를 잠시 미뤄 둘 생각으로 그림자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무어라 말을 건네려는 찰나.
-가면서 듣도록.
그림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녀석에게 대답하는 대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그림자의 고저 없는 음성이 흘러들었다.
-조금 전, 네게 적개심을 보인 청년은 아마 서문세가의 직계일 거다.
-연씨세가와 같은 12가문에 속해 있으나, 어떻게 보면 연씨세가를 비롯한 몇몇 가문의 대척점에 속한 가문이라 보면 된다.
연씨세가와 같으면서도, 대척점에 있다는 서문세가.
녀석의 설명은 다소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감상과는 별개로 조금 전 청년이 서문세가의 직계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갈무리했다.
그 무렵.
“바로 가자. 교관님이 기다리셔.”
“알겠어. 고마워.”
백유진과 합류했다.
곧바로 교관님과 친구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머릿속으로 그림자 녀석의 목소리가 재차 흘러들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네가 추가적으로 해야 할 일은 딱히 없다.
-기다리면 연소소 측에서 알아서 움직일 거다. 나머지는 저녁에 숙소에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이 멎었다.
이에 백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오늘따라 이상하네. 아무튼, 빨리 가자.”
“그래.”
나는 고개를 한차례 털어내고는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슬슬 일행이 시야에 보일 무렵, 선두에 서 있던 인솔 교관이 나를 한차례 훑어봤다.
혹여 늦게 왔다고 타박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럼 이동한다.”
다행히 교관은 별말 없이 몸을 돌렸다.
그대로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교관을 뒤따르는 가운데, 문득 차은월이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볼일은 잘 해결했어?”
그녀의 질문에 불현듯, 조금 전에 그림자 녀석이 건넨 말이 뇌리를 스쳐 갔다.
‘머지않아 자세히 알 수 있겠지.’
저녁 식사 후, 숙소에서.
그림자와의 약속을 다시금 되새기는 한편.
“그럭저럭? 아직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차은월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호텔에서 제공되는 석식은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식사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외국 요리라 몇몇 음식이 그다지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가 절반.
나머지 절반은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도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소소 측에서 알아서 움직일 거라니. 대체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거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연소소는 대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식사는 안중에도 없다시피 한 상태로 생각에만 골몰해서 그런지.
“일한아, 어디 아파?”
“입맛에 안 맞는 거 아니야?”
두 사람, 차은월과 윤설하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제야 나는 주위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백유진을 비롯하여 다른 친구들도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는 한편, 차은월과 윤설하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입맛이 없어서.”
내 대답에 두 사람은 여전히 걱정하는 기색이었으나, 다행히 그 이상으로 추궁하진 않았다.
이후 적당히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저녁 식사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슬슬 끝나갈 무렵, 인솔 교관이 내일 일정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내일은 예선전이 진행될 거다. 일정에 상관없이 함께 움직일 것이며, 대회 장소에서 대기할 예정이다. 그 외 특이사항이 발생하면 스마트 워치를 통해 사전에 전파할 테니, 이 점 참고하도록.”
설명을 마친 교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푹 쉬고, 각자 컨디션 관리에 유념하도록. 이상이다.”
인솔 교관은 그 길로 곧장 식당을 빠져나갔다.
교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식당을 빠져나가는 찰나, 문득 백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나를 비롯하여 친구들을 한차례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소화도 시킬 겸, 다 같이 간단하게 단련이나 하러 가지 않을래?”
그의 제안에 대부분 호기심을 보였다.
비행부터 개막식, 그리고 식사에 이르기까지.
일정을 빡빡하게 소화하느라 다들 어느 정도 답답함이 쌓인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볍게 몸을 움직여주면 스트레스도 풀릴 거고, 당장 내일부터 국제 대회가 시작되니까 그 전에 몸도 풀고. 어때? 괜찮지 않아?”
거듭되는 백유진의 제안에 다들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의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호텔 측에 아카데미에 있는 것과 비슷한 스텟 단련실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겠군.”
“그러게, 단련하고 나면 적어도 잠은 안 설치겠다.”
대세는 백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이 날 무렵.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서. 먼저 들어가서 쉴게. 미안.”
나는 백유진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다.
기껏 좋은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개막식 때부터 안 좋아 보이더라. 알겠어, 푹 쉬고 내일 보자!”
백유진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 의사를 존중해 줬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바래다 줄까?”
“혹시 컨디션이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지면 바로 교관님께 연락해야 한다?”
내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특히 같은 팀을 이룬 윤설하와 차은월이 그러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나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알겠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두 사람에게 몇 번이나 당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했을 무렵, 나는 서둘러 그림자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슬슬 나머지 내용을 알려 줘.’
-상당히 신경 쓰인 모양이로군.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녀석은 말했다.
두 번째 계획에 접어드는 순간, 끝을 볼 때까지 결코 멈출 수 없다고 말이다.
그만큼 중차대한 계획에서 악수를 나눈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면, 누구라도 의문을 떠올릴 터였다.
-확실히 설명이 미흡했군. 사과하지.
녀석은 내 생각에 동감한 듯, 곧장 사과를 건네왔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설명을 재촉했다.
‘괜찮아, 그보다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줘.’
-요지는 지금도 변함없다. 연소소 측에서 알아서 움직일 테니, 우리는 그녀를 기다려야 한다.
‘그럼 그다음은? 연소소가 우릴 찾아오면 그땐 어떻게 하는데?’
-그때부턴 내가 맡도록 하지.
‘네가 맡는다고?’
-그래.
녀석은 대답과 동시에 설명을 덧붙였다.
-당장 움직이진 않을 거다. 연소소 측과의 대화를 통해 계획을 구체적으로 조율하는 게 급선무니까.
‘……그거라면 확실히 네가 맡는 편이 좀 더 효율적이겠네.’
그림자는 애초에 계획을 제안한 장본인인 만큼 연소소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 또한 나와의 접촉을 통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게 됐다.
즉, 그림자와 연소소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아는 바가 전무한 상태였다.
‘일일이 네게 설명을 들으며 대화에 임하는 것도 피차간에 답답할 테니.’
-이해해 줘서 고맙다.
‘어차피 나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납득하는 한편, 나는 또 다른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연소소가 우리의 동기화율을 끌어올려 준다고 했잖아?’
-그래.
‘그것도 바로 시작하는 거야?’
-그건 대략 두 번째 만남부터 진행할 생각이다. 그전에 먼저 조율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까.
조율이 필요한 문제.
잘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는 찰나.
-거기엔 안일한, 네 의사도 포함되어 있다.
녀석이 느닷없이 나를 거론했다.
‘내 의사라니?’
-이 부분은 당장 말로 설명하기엔 복잡하다. 연소소와 대면했을 때 설명하도록 하지.
‘대면했을 때라…….’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자연스럽게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 녀석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만남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대략 언제쯤?’
-연소소의 성격을 고려하면, 오늘 밤중에 찾아올 확률이 높아 보이는군.
‘그건 나쁘지 않겠는데?’
의문은 오래 품고 있어 봐야 안달만 날 뿐이었다.
빠르게 찾아와 준다면 오히려 내겐 기꺼운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슬슬 넘겨주면 돼?’
-부탁하지.
‘알겠어.’
나는 대답을 끝으로 녀석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는 곧장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연소소.”
과연 그림자와 무슨 대화를 나누게 될지.
또 내 의사가 중요하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인지.
전부 연소소, 그녀의 방문에 달려 있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의문을 곱씹는 사이, 의식은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55%]
-[????의 그림자]가 연륜에 따른 분별력과 미래시(未來視)의 일부가 담긴 기억, 그리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이 활성화됐습니다!
그림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메시지를 대충 곁눈질하고는, 방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안일한이 이른 저녁에 미리 바통을 넘겨줘서 그런지, 인기척은 전무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분명 오늘 밤, 혹은 새벽에 찾아올 테니까.’
연소소의 성격, 그리고 일의 중차대함으로 미뤄봤을 때. 그녀는 분명 머지않아 찾아올 터였다.
그러니 그때까진 잠자코 기다리면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그림자는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상태로 명상하듯, 미동조차 없이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기를 수 시간.
똑똑똑-
오랜 기다림 끝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는 곧장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오는 여자 한 명과 정장 차림의 남성 두 명이 서 있었다.
연씨세가의 연소소와 그녀의 수행원들이었다.
“…….”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연소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일한 님, 아니.”
그녀는 살짝 고개를 가로젓더니, 서글픈 기색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림자 님이라 불러드려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