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내가 끝까지 함께할 테니까
모든 것의 끝.
이는 곧 미래에 예정된 파멸, 즉 재앙을 일으킬 원흉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부터는 멈출 수 없는 건가.’
그림자 녀석의 대답을 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손끝이 살짝 떨려 왔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자기 암시를 하듯,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바로 그때 머릿속에 고저 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괜찮다.
다름 아닌 그림자였다.
-내가 끝까지 함께할 테니까.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잦아들었다.
동시에 충격적인 선언에 가려져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결국 거창해 보여도, 지금까지와 다를 건 없다.’
여태 그래 왔듯 이번에도 역시 그림자는 미래를 알고, 그에 따른 계획까지 갖추고 있었다.
단지 거기에 맞춰 정해진 목표를 완수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최종장이 됐든, 마지막 계획이 됐든.
지금까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할 거야. 여태까지도 그랬으니까.’
다시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가운데.
녀석이 담담한 어조로 격려의 말을 건네왔다.
-물론이다. 좋은 자세야.
그렇게 충격의 여파를 말끔히 해소했을 무렵.
그림자는 다시금 좀 전의 화제를 이어 나갔다.
-이제 슬슬 두 번째 계획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도 괜찮겠나?
‘어. 문제없어.’
-구체적으로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 거기까지 이야기했었지.
그림자는 기억을 더듬듯,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고 나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번 초인 국제 대회는 중국에서 개최될 거다.
‘맞아. 진천호 선배의 말로는 그렇다고 하더라.’
-거기서 중국의 한 유력 가문과 접촉해야 한다.
‘유력 가문이라니? 명문가 같은 거야?’
-비슷하다.
중국의 명문가.
이쪽 부분에 관한 정보는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나는 가만히 그림자 녀석의 설명을 기다렸다.
-8가문……. 아니, 지금은 12가문이 맞겠군. 현재 중국에는 초인 사회를 지탱하는 12개의 가문이 존재한다.
‘그중 내가 접촉해야 할 가문은 어느 쪽인데?’
-‘연씨세가’다.
“연씨세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림자의 말을 되뇌었다.
특징적인 명칭인 만큼 절대 까먹지 않을 것 같았다.
녀석은 긍정과 더불어 말을 이어 갔다.
-그래. 연씨세가의 직계도 이번 국제 대회에 출전한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그쪽과 접촉해 주길 바란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접촉이라면…….’
-말 그대로의 의미다. 어깨를 스쳐도 상관없을 거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악수 정도는 해 줬으면 좋겠군.
악수를 통한 접촉.
듣는 순간 불현듯 뇌리에 윤진호 박사와의 대면이 떠올랐다.
처음 대면하여 악수를 나눴을 때 발생했던 노이즈.
이번 접촉 또한 어쩌면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는 한편.
‘일단 알겠어. 기억해 둘게.’
녀석에게 확답을 돌려줬다.
-그걸로 충분하다. 구체적인 사항은 추후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지.
‘어.’
내 대답을 마지막으로 그림자 녀석과의 대화가 끝났다.
피곤한 상태에서 심도 있는 대화를 주고받은 까닭인지, 수마가 급속도로 밀려들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는 가운데, 나는 마지막으로 그림자 녀석이 했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연씨세가.’
이를 끝으로 의식은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55%]
-[????의 그림자]가 연륜에 따른 분별력과 미래시(未來視)의 일부가 담긴 기억, 그리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이 활성화됐습니다!
그림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허공에 떠 있는 반투명한 메시지를 곁눈질로 살폈다.
“…….”
그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동기화율에서 멈춰 섰다.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랬다.
‘앞으로는 필요에 따라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을 테니.’
그런데도 눈이 가는 건, 아무래도 동기화율을 확인하는 일이 습관이 돼서 그런 모양이었다.
새삼스러운 사실에 그림자는 건조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한 사람의 존재를 떠올렸다.
‘연 가주, 이제 곧 만날 수 있겠군.’
연씨세가의 가주.
아니, 시기로 봤을 때 지금은 가주가 아닐 것이다.
그녀를 떠올리니 그림자는 저도 모르게 감상에 젖어 들었다.
이는 마치 오윤진과 윤진호와 대면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같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건가?’
살아생전에는 결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그림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가진 능력, 연씨세가에 전해지는 특수한 능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이라면.’
그녀의 능력의 일부를 공유하는 지금은.
그녀가 보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와 접촉하게 되면 한층 더 깊은 이해까지도 가능할 터였다.
물론.
‘그것도 오래가진 않겠지만.’
그림자에게 있어 그녀를 보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는 것.
두 번째 계획에 접어든다는 건 곧 이제부터 끝을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끝을 향한 여정이라…….’
어감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 시답잖은 감상을 끝으로 그림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곧바로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 * *
선배들과의 내기 및 그들에게 조력을 약속받은 이후.
일상을 스텟과 대련, 그리고 레이드로 이루어진 단련으로 가득 채웠다.
그사이.
-4번 게이트 C급 승급 심사가 종료됐습니다.
-게이트 공략 결과를 산정합니다.
-클리어 등급 A+. 승급을 축하합니다.
승급 심사를 통과해 C급 초인 라이선스를 획득했고.
-근력 스텟 57
-민첩 스텟 56
-체력 스텟 56
-마력 스텟 102
그간의 스텟 단련을 통해 대략 20스텟 가까이 성장하여 총합 271스텟을 달성했다.
어느새 B+급을 넘보는 수준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부터 무극삼권 제2초식을 체득할 예정이다. 참고하도록.
여름방학, 즉 국제 대회를 위한 출국을 대략 2주 정도 남겨뒀을 무렵.
그림자 녀석으로부터 무극삼권의 새로운 초식의 체득 과정에 돌입하겠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하나부터 열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출국까지 약 일주일 정도 남겨 둔 시점부터는 선배들이 국제 대회에 관한 정보를 공유해 줬다.
-사실 우리는 4강에서 떨어졌어.
지난 국제 대회의 성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중국의 12가문 중 서문세가의 직계가 속한 팀이었지.
-이번 국제 대회 때도 서문세가 측 직계가 출전할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을 조심해.
-나머지 명가의 수준도 엄청났으니까.
그림자 녀석이 알려 준 연씨세가와는 또 다른 유력 가문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됐다.
그렇게 선배들이 알고 있는 선에서 잠재적인 경쟁 상대의 정보까지 듣게 됐을 때.
-이 정도면 완벽해. 가서 박살 내고 와!
모든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듯, 그림자 녀석은 내게 출국하기 3일 전에 희소식을 전해 줬다.
-무극삼권 제2초의 체득을 끝냈다.
-기억해 둬라. 초식의 명칭은 천라(天羅)다.
진천에 이어 제2초, 천라의 체득을 완료한 것이다.
-천라(S)
두 번째 초식은 진천과 마찬가지로 S급이었다.
또한 진천과는 궤를 달리하는 형태였다.
‘……이것도 엄청난데?’
천라의 위력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었다.
다만 리스크도 그만큼 엄청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B+급을 넘볼 정도로 성장한 덕분에 처음 진천을 접할 때처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3일이라…….’
새로운 무공을 온전히 체화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별로 개의치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국제 대회 정도는 무극삼권의 제1초, 진천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껴진 까닭이었다.
오히려 천라의 경우에는 국제 대회 너머에 있을 계획을 위해 준비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계획의 최종장, 마지막 국면으로 바로 이어갈 거라고 말했으니까.’
때문에 나는 출국 바로 전날까지 천라를 활용하는 수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출국 당일이 찾아왔다.
“몸 조심히 잘 다녀오거라.”
“일한이! 돌아올 땐 우승컵을 들고 와라! 꼭이다!”
아버지와 임강철.
그리고 여러 교관들과 같은 반 생도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국했다.
* * *
금년 초인 국제 대회는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됐다.
덕분에 비행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입국 수속을 밟고, 인솔 교관을 따라서 숙소로 향했다.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호텔, 그것도 1인 1실이 배정됐다.
‘적어도 국제 대회 기간 동안 쉴 때만큼은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군.’
그렇게 짐을 풀고, 잠깐이나마 여독을 풀고 있을 때.
오래지 않아 인솔 교관이 찾아왔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분 후 국제 대회 개막식이 있을 예정이다. 10분 안에 준비하고, 호텔 로비로 집합하도록.”
국제 대회 개막식.
행사를 비롯하여 대회의 일정과 대진표, 그리고 대회가 펼쳐지는 장소 등.
전부 개막식을 통해 발표되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 대회 출전을 위해 중국을 찾은 세계 각국의 대표 팀들도 한자리에 모이는 듯했다.
인솔 교관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순간.
‘연씨세가의 직계도 만날 수 있으려나.’
나는 자연스럽게 그림자 녀석이 부탁한 일을 떠올렸다.
연씨세가의 직계와 접촉, 그중에서도 가급적이면 악수를 나누는 것.
‘물론 개막식 도중에는 힘들겠지만.’
개막식이 끝나고 난 다음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적절한 시점을 가늠하는 한편.
“다들 모였나? 그럼 나를 따라오도록.”
인솔 교관의 지시에 맞춰 친구들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
…
…
…
개막식은 호텔만큼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연회장에서 진행됐다.
입장하자마자 한국 대표 팀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착석하는 한편.
사전에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통역용 아티팩트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지금부터 제45회 초인 국제 대회 개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사회자의 말이 또렷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꽤나 신기했으나, 흥미는 오래가지 않았다.
국제 대회의 연혁을 설명하거나, 전 세계의 초인 역사에 관한 찬탄을 늘어놓는 등.
그야말로 개막식에 걸맞은 의례적인 내용이 지루하게 이어진 까닭이었다.
슬슬 집중력이 바닥을 드러낼 것 같은 찰나.
“이번 대회의 참가국, 그리고 각국의 대표 팀을 발표하겠습니다.”
때마침 흥미로운 내용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다름 아닌 대회에 참가한 국가와 팀의 명단 발표였다.
‘총 32개 팀인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쪽에서 총 8팀.
북미와 남미 쪽에서 총 8팀.
그리고 유럽 쪽에서 총 16팀으로 도합 32개 팀이었다.
‘그럼 32강부터 시작되는 건가 보네.’
나는 정보를 머릿속에 갈무리하는 한편,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주위 사람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국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기도가 하나같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역시 대표 팀이라서 그런가? 저쪽은 유럽인 것 같고, 저기는 북미, 그리고 이쪽이 아시아인가?’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 참가 팀 쪽에서 멈춰 섰다.
중국과 일본,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특히나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대부분 가문 단위로 직계 혈족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니까.’
그렇게 잡다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지금 네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3시 방향, 보이나?
느닷없이 그림자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대답조차 잊은 채 무의식적으로 녀석이 일러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상당한 외모를 자랑하는 소녀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중국 쪽이네. 잠깐, 설마…….’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그림자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 저 여자가 이번에 접촉해야 할 대상, 연씨세가의 직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