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이젠 대가를 받을 차례다
“가자, 은월아!”
“응!”
내 친구들이자, 믿음직스러운 팀원.
윤설하와 차은월이 내 빈자리를 채워 줬다.
나와 마찬가지로 B급에 오른 두 사람은 리치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혹한을 머금은 윤설하의 검격부터, 마력 역장으로 위력이 배가된 차은월의 마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공세가 유효타로 들어갔다.
비결은 다름 아닌 진천의 효과에 있었다.
‘마나 분쇄.’
진천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진각부터, 거기서 파생되는 온갖 투로에 이르기까지.
진천의 모든 동작에는 물리적인 위력뿐만 아니라 마나 그 자체를 분쇄하는 효과가 깃들어 있었다.
이는 같은 S급 무공, 항마멸인장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항마멸인장은 타격점을 기준으로 마나의 흐름을 어그러뜨리고, 파훼하지.’
항마멸인장은 그림자가 비수로 제공한 만큼 은밀하고, 살상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반드시 타격해야 효과가 발휘되고, 범위가 한정적이었다.
반면 진천은 범위가 넓었다.
진각에서 비롯된 기파 전체에 마나 분쇄의 효과가 담겨 있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온갖 투로에 따라 펼치는 권법에도 같은 효과가 발휘되니까.’
리치의 마나 순환은 물론, 녀석이 전개한 마법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진천이라고 만능은 아니었다.
문제점은 역시나 마나 소모에 있었다.
‘단 일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찔한 수준이니.’
단 한 번, 투로에 따라 권법을 펼쳤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탈력감이 전신에 엄습해 왔다.
이는 비단 마나뿐만 아니라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치의 마무리를 친구들에게 맡긴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무리해서 진천을 펼치면…….’
생명력,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운까지 소진될 터였다.
이는 그림자 녀석이 내게 건네준 조언이자 경고였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구나.’
무극삼권은 총 세 개의 초식을 하나의 체계로 엮어낸 무공이었다.
진천은 그중 첫 번째 초식에 불과했다.
‘진천이 이 정도인데, 나머지 두 초식은 어떨지. 상상도 안 되네.’
나머지 두 초식 또한 진천보다 더할지언정, 결코 그보다 못하진 않을 터였다.
이는 비단 위력뿐만 아니라 마나 소모와도 같은 리스크도 포함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한편, 마음을 다잡았다.
‘여름방학까지 시간은 충분하니까.’
그때까지 계속해서 체급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했다.
끝없는 단련이야말로 무극삼권에 내재된 리스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새삼스럽게 다짐하는 한편, 다시금 눈앞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친구들의 눈부신 활약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은월아, 내가 왼쪽을 맡을게!”
“부탁해!”
윤설하와 차은월, 두 사람의 기가 막힌 호흡으로 인해 녀석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진천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마나 순환 체계를 복구할 틈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녀석은 공격은커녕, 방어 마법조차 제대로 전개하지 못한 채 허둥거렸다.
그 결과.
그어어어……
약 5분간의 덧없는 몸부림 끝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동공에 맺힌 귀화가 완전히 꺼질 무렵.
-1번 게이트 B급 난이도 공략이 완료됐습니다.
레이드의 끝을 알리는 음성이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이에 나는 물론, 내 친구들도 귀를 쫑긋 세운 채 결과에 주목했다.
-게이트 공략 결과를 산정합니다.
-클리어 등급 A. 레이드를 종료합니다.
A급 성적.
선배들의 성적인 B+급만 달성했어도 우리의 승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동점을 넘어 그들의 성적을 상회했다.
그래서일까.
“얘, 얘들아! A가 나왔어……!”
우리는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친구들의 눈빛에는 기쁨의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선배와의 내기를 승리로 마무리 짓는 한편.
‘이젠 대가를 받을 차례다.’
머릿속으로 내기에 걸린 대가를 떠올리며 가상 게이트가 소멸되기를 기다렸다.
* * *
잠시 후.
터널을 빠져나온 순간.
“너희를 무시했던 점, 진심으로 사과한다.”
진천호를 필두로 선배들이 정중하게 사과를 건네왔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약속을 지킨 것이다.
허리까지 굽혀가며 정성스럽게 사과하는 선배들.
그 모습에 윤설하는 한결 누그러진 기색으로 대꾸했다.
“……사과해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님들.”
선배들과의 대면 당시 가장 크게 분노했던 이가 바로 윤설하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과를 받아준 건 선배들의 진심 어린 태도 덕분이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정중한 자세를 보이는 까닭에 도리어 이쪽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점을 인식한 건지, 진천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피식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너희들의 공략, 정말 대단했다. 이건 진심이야.”
“약속을 지켜 주신 것도 그렇고, 감사합니다.”
나 또한 윤설하와 마찬가지로 나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깔끔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이 호감으로 다가온 까닭이었다.
훈훈한 광경에 백유진과 심인욱은 물론.
“이제야 명문다운 모습을 보여 주시네요.”
오윤서 또한 그럭저럭 만족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뼈 있는 말투에도 진천호는 웃어 넘기는 대범함을 보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진천호를 비롯한 선배들은 한발 더 나아갔다.
“너희, 졸업 후에 우리 가문으로 오지 않을래?”
“아앗!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천호 너……!”
진천호와 하유리는 나와 윤설하에게.
“이쪽은 경쟁자가 없어서 좋네. 너, 차은월이라 했지? 졸업 후에 우리 마탑으로 와라.”
도정석은 차은월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쳤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나는 물론, 내 친구들 또한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반면.
“……선배님들, 그쯤 하시죠.”
“차은월! 저 사람 이야기 듣지 마!”
백유진의 무리, 특히 심인욱과 차은월은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반발했다.
백유진 또한 살짝 굳은 안색으로 진천호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직 내기의 조건은 끝나지 않은 거로 아는데. 권유는 나중에, 정정당당하게 하시죠 선배님들.”
그의 딱딱한 말투에 선배들은 입맛을 다시면서 한 발짝 물러났다.
“이거야 원, 쉽지 않은 승부가 되겠네.”
“아아, 동급생이 아닌 게 아쉬워.”
“내 말이.”
진천호부터 하유리, 그리고 도정석까지.
전부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며 한마디씩 입에 담았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금 본래의 화제, 내기에 관한 주제로 돌아왔다.
“슬슬 국제 대회 준비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그러시죠.”
진천호의 제안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천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일단 너희를 전심전력으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었지? 그 부분부터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게.”
“네.”
“가장 먼저……, 거기 너.”
진천호는 고개를 돌리더니 눈짓으로 한 명을 지목했다.
그의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윤설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서 있었다.
“저요?‘
“응. 윤설하라고 했나?”
“……네.”
“어차피 설하 너는 우리 가문의 후원을 받았잖아?”
“일단 검법하고 보법을 받긴 했는데…….”
“심법까지 제공할게.”
“……!”
진천호의 충격적인 제안에 윤설하는 화들짝 놀랐다.
반응을 보이는 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천호 너! 자꾸 그러면 반칙이야?!”
“……선배님,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선을 지켜 주시죠.”
진천호와 같은 삼대 가문의 직계.
하씨 가문의 하유리와 신창백가의 백유진이 반발하는 것이다.
이에 진천호는 난처한 듯 손을 내저으며 해명했다.
“지금 건 권유하려는 말이 아니라 조력을 위한 거야. 물론 너희 둘의 가문도 훌륭하지만, 쟤는 검사(劍士)야. 그리고 우리는 검가(劍家)고. 나머지는 설명 안 해도 알겠지?”
진천호의 말은 다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가문은 명문에 속하는 만큼, 훌륭한 무공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문 분야가 다르다.
즉, 검을 주력으로 삼는 환영검가야말로 윤설하를 지원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아버지께 대주급 초인이 사용하는 심법을 요청할 생각이야.”
“……!”
대주란 가문이 보유한 무력 단체, 그중에서도 수장을 의미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제안에 하유리와 백유진은 그대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당사자인 윤설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진천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도 진천호는 차분한 태도로 설명을 덧붙였다.
“국제 대회는 아카데미의 위신이 걸린 문제잖아.”
“아…….”
“게다가 이미 설하는 우리 가문의 후원을 받기도 했고, 생각해 둔 심법이 얘가 가진 검법과 보법은 물론이고, 특성과도 잘 어울릴 것 같거든.”
진천호의 설명에 하유리와 백유진은 다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소요가 가라앉자 윤설하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집안에 연락해 보고, 다음에 결과 알려 줄게. 그리고…….”
그렇게 윤설하의 조력 건을 일단락 낸 다음, 진천호는 고개를 돌려 차은월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 차은월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저요?”
“응. 차은월 맞지?”
“……네.”
“네 쪽은 나보다는 이 친구가 더 나을 거야.”
진천호는 한발짝 물러나는 한편, 여태 가만히 듣고 있던 도정석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전달됐는지.
“너도 쟤랑 비슷해. 연공법, 아직 없지?”
도정석은 차은월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도 네 재능은 괴물 같은 수준이지만. 애초에 별다른 공격 마법 없이 순수 마탄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나올 정도니까.”
“……아니에요.”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겸손은 잠시 접어 둬.”
도정석은 투덜거리는 한편,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제어 마법 정도는 배웠지? 하지만 너희 팀의 스타일상 딱히 필요 없어서 쓰지 않은 걸 테고.”
“네.”
“그렇다면 지금 네게 필요한 건 연공법과 강력한 한 방이 되어 줄 마법 계열이겠네.”
도정석의 평가에 차은월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지적이 상당히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너의 마나 운용, 그리고 마력 역장을 활용하는 스타일로 미뤄 봤을 땐 일단 전격 계열의 마법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떻지?”
도정석의 질문은 차은월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윤서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렇지? 그럼 털어 봐.”
“뭐라고요……?”
“너희 마탑에 괜찮은 전격 마법이 있으면 토해 보라고. 연공법은 우리 측에서 제공할 테니까.”
“그게 무슨!”
“너희 쪽이나 우리 쪽이나. 전격 계열이 주력 마법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서로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괜찮은 걸 주자는 뜻이야.”
도정석의 말뜻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소속된 황혼의 마탑은 불과 대지 계열 마법을 주력으로 삼았다.
다섯 번째 진리 마탑은 바람과 불 계열이 주력 마법으로, 이곳 역시 전격 계열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 가지고 있는 전격 마법 중 보다 뛰어난 마법을 제공하려는 모양이었다.
“……일단 확인은 해 볼게요.”
오윤서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녀의 의사를 확인한 도정석은 마지막으로 차은월을 바라봤다.
당사자의 의사를 묻는 것이다.
이에 차은월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마탑에 들어가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을게요.”
주저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그녀는 선을 확실하게 긋는 답변을 내놨다.
이에 도정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끄응, 알겠어.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차은월의 조력 문제까지 어느 정도 일단락됐을 때.
진천호를 비롯한 선배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쏠렸다.
“마지막으로 안일한, 네가 남았는데…….”
그들의 시선은 다름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