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충분히 해볼 만한 것 같은데
‘파괴력은 자신 있으니까.’
B급 난이도는 어쩌면 생각보다 수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능성을 떠올리는 한편, 홀로그램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화면 속에는 선배들과 오우거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중에서도 선배들의 표정과 움직임에 특히 주목했다.
그러자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전투 자체는 느리지만.’
선배들의 표정은 전체적으로 무표정에 가까웠다.
느린 전투 속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 증거로써 선배들의 움직임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평이한 수준을 유지했다.
츠즛-
환영검가의 직계, 진천호가 현란한 검술로 녀석의 발을 묶는 사이.
나머지 두 선배가 각각 사격과 마법으로 데미지를 축적시켰다.
마치 기계적으로 정해진 명령을 수행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런 식의 전투가 지속되자 슬슬 오우거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워어어!
누적된 피해를 알아차렸는지, 오우거가 주춤주춤 물러나는 낌새를 보이는 것이다.
이를 본 순간 두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몬스터가 도망친다고……?’
이는 여태까지의 수업에서는 물론, 방학 때 오윤진과의 동행에서도 접해 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마치 내 속내를 읽은 것처럼 옆에 있던 백유진이 나직하게 설명했다.
“말했잖아? 지능이 올라갔다고.”
“아…….”
스펙과 지능의 상승.
사실 처음 들었을 땐 잘 와닿지 않았으나, 직접 보게 되니 조금은 감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고작 도주하는 거로 지능이 올라갔다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데.’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정말 지능이 올랐고, 상황을 판단하여 움직인 거라면 현시점에서 도주는 무의미한 까닭이었다.
선배들 중 두 명이 원거리 계열인 만큼, 추격은 용이할 터였다.
즉, 현 상황에서 도주는 오히려 맞서 싸우는 것만 못한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잠깐만, 저쪽 방향은.’
잠시 후, 내 생각이 얕았음을 깨달았다.
오우거의 갑작스러운 도주, 그 이면에 자리한 녀석의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구워어어-!
녀석의 도주하는 방향에는 또 다른 오우거가 존재했다.
즉, 도주에 성공하면 머릿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슬슬 마무리 짓자.
선배들의 기세가 일변했다.
정확히는 급격하게 페이스를 끌어 올렸다.
시작은 원거리 엄호를 맡은 두 선배였다.
가장 먼저 도정석.
그의 오브에서부터 불그스름한 마나가 수십여 갈래로 뿜어져 나왔다.
마나 줄기는 마치 채찍처럼 굽이치며 녀석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렇게 오우거의 양손과 양발을 옭아매는 사이, 하유리가 시위에 네 개의 화살을 메겼다.
이윽고.
지이이잉-!
각각의 화살촉에 짙푸른 마나가 어리기 시작했다.
범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발출된 순간, 화살은 네 줄기의 유성으로 화했다.
이는 오우거의 사지를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츠즛-
진천호의 검이 만개(滿開)했다.
그 결과.
툭-
오우거의 머리가 맥없이 굴러떨어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바로 그때.
“일부러 저렇게 한 거야.”
백유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홀로그램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입만 열어 되물었다.
“일부러?”
“응. B급 난이도에선 페이스 조절이 특히 중요하니까.”
페이스 조절.
확실히 방금 전투에서 선배들은 이 부분을 굉장히 중시했다.
특히 마지막에 이르러 단숨에 녀석을 참수한 것만 봐도 그랬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건 ‘어째서’였다.
마치 내 속내를 읽고 있는 것처럼 백유진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B급 난이도는 C+급 난이도에 비해 개체 수가 훨씬 더 많거든. 그래서 전체적으로 공략 시간도 더 길고.”
“……그래서였군.”
즉, 필드가 더 넓고 개체 수가 더 많으니 자연스럽게 페이스 분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제야 전투 속도가 다소 느리게 느껴졌던 이유를 깨달은 한편.
‘역량이 부족해서 느린 게 아니었구나.’
자연스럽게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됐다.
기존에 내가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잠시 유보한 것이다.
실제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아마 선배들은 최소 B급, 잘하면 B+급 정도일 거야. 그 이하면 저렇게 조절해도 보스 몬스터 사냥까지 버티기 힘들거든.”
백유진은 선배들의 등급을 추측하며 설명을 보탰다.
‘나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나 또한 저들의 공략법을 따르게 될 터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다시금 화면에 집중했다.
그사이 선배들은 다소 느리지만 착실하게 공략을 진행했다.
대략 20분쯤 지났을 무렵.
“드디어 마지막이네.”
백유진의 말마따나 레이드 공략의 끝을 알리는 몬스터.
보스 몬스터인 ‘오우거 챔피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곧바로 전투가 시작됐다.
보스 레이드는 지금까지의 기계적인 전투와는 다르게 초장부터 치열했다.
‘오우거 챔피언이라……, 일반적인 오우거와는 차원이 다르네.’
오우거 챔피언이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그 위력은 진천호가 차마 맞상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선배들은 침착했다.
콰앙! 쾅!
진천호가 녀석의 이목을 끌고, 그사이 하유리와 도정석이 피해를 축적시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배들의 전략은 일점 집중 공략에 가까웠다.
원거리 계열의 두 선배들이 녀석의 목덜미를 향해 십자포화를 쏟아내는 사이.
츠즛-
진천호가 환영검가 특유의 환검(幻劍)으로 녀석의 방어를 무력화시켰다.
그 상태로 대략 10여 분간 비슷한 구도를 유지한 끝에.
쩌-엉!
마침내 선배들의 공세가 녀석의 방어를 뚫어냈다.
마나로 강화되어 강철 같은 경도를 자랑하던 오우거 챔피언의 피부를 찢어발긴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잠시 후.
쿠웅-!
녀석의 거체가 허물어지는 거로 레이드가 종료됐다.
무려 30분이 넘는 공략, 그 결과는 B+급 성적이었다.
나는 속으로 선배들의 성적을 곱씹어 보는 한편.
‘일점 집중인가.’
그들의 공략법을 머릿속으로 되새겨봤다.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혹시 그보다 더 유효한 공략법은 없을지.
‘만일 여기서 위력을 더 높일 수 있다면…….’
가만히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이 정도면 참고가 됐으려나?”
어느새 터널에서 빠져나온 진천호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생각을 잠시 미뤄둔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진천호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차간에 용건을 마친 만큼, 그는 슬슬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돌린 채 내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한 가지 팁을 알려 줄게.”
“팁이라면……?”
“대련도 병행하는 게 도움이 될 거야. 그럼 2주 후에 보자고.”
말 그대로 팁이었다.
아직 와닿지는 않았지만 일단 머릿속에 갈무리했다.
그렇게 선배들이 정진관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
“어떨 것 같아?”
백유진이 느닷없이 질문을 건넸다.
다른 친구들의 시선 또한 나를 향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내 감상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조금 전 떠올린 새로운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가늠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충분히 해볼 만한 것 같은데.”
“정말?”
“뭐,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2주라는 시간이 있으니까.”
2주의 준비 기간.
이거야말로 내가 떠올린 가능성의 원천이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 안에 새로운 무기가 손에 들어올 테니까.’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그래? 그건 좀 기대되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바로 신청하자.”
“신청이라니, 뭘?”
“아티팩트. 앞으로는 바빠질 테니까.”
백유진이 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 * *
나는 백유진의 말대로 월요일이 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교관으로부터 아티팩트를 지급받았다.
그러고는 수업 시간을 포함하여 방과 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내기를 준비하는 데 투자했다.
물론 무턱대고 B급 난이도 레이드에만 매달린 건 아니었다.
‘백유진의 말대로라면 최소 B급은 되어야 페이스 조절도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가장 먼저 체급을 키우는 데 집중한 것이다.
나는 이미 B급을 달성했으니 별문제 없지만 내 친구들은 아니었다.
윤설하와 차은월, 둘은 나와는 달리 아직 C+급인 만큼 체급부터 키울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둘 다 스텟 성장도 타고났으니까.’
그림자의 사기적인 스킬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나와는 달리 둘의 재능은 진짜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난 앞으로 일주일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B급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아!”
“으음, 나는 내기하는 날까지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기도…….”
뉘앙스의 차이는 있어도, 둘 다 B급을 달성하리란 사실을 어느 정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체급을 키우는 한편, 친구들과 손발을 맞추며 시간을 보냈다.
대략 내기까지 1주일 정도 남았을 때.
-습득이 끝났다.
그림자가 희소식을 전해 줬다.
다름 아닌 새로운 무공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이번 내기에 필요할 것 같아 슬슬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나는 미소를 띤 채 곧바로 스킬창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진천(S)
처음 보는 S급 스킬이 생성되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자 녀석이 나직하게 설명해 줬다.
-무극삼권의 제1초식, 진천(震天)이다.
‘진천…….’
-다만 복마구권의 초식처럼 생각하고 사용했다간 자칫 낭패를 당할 수도 있을 거다.
그림자의 영문 모를 조언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일반적인 초식과는 다른 거야?’
-그래. 진천에는 기본적인 부분부터 응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투로가 존재한다.
‘그럼 어떻게 써야 하는데?’
-대부분의 투로는 전부 어느 정도 익혀 둔 상태다. 하나 각 투로의 쓰임새를 파악하고, 적절하게 활용하는 건 전적으로 네 몫이다.
쓰임새와 활용.
전부 이전에 녀석이 강조했던 부분과 같은 맥락이었다.
‘어차피 실전에서 원활하게 활용하려면 실험은 필수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녀석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 일환으로써 새로운 무공을 곧바로 친구들에게 공개하는 대신.
‘가상 대련이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겠지.’
저녁 시간대를 활용하여 무기 훈련실을 찾았다.
곧바로 가상 대련을 시작하고, 더미 데이터를 상대로 자세를 갖췄다.
‘일단은 다른 스킬을 사용하듯이 써 보자.’
판단과 함께 코어를 활성화시키는 한편.
무극삼권의 제1초, 진천(震天)을 펼쳤다.
그 순간.
“……!”
코어가 크게 약동했다.
동시에 혼원현천신공의 마나, 그 거대한 흐름이 출력을 더해가며 사지백해로 흘러갔다.
순식간에 체내를 몇 차례씩이나 순환하는 가운데.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여 오른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크게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쩌-엉!
어마어마한 기파와 함께 체내의 마나가 썰물처럼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단 한 걸음.
거기서 비롯된 충격파가 천지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콰앙-!
단순히 마나의 파동만으로 더미 데이터를 날려 버렸다.
그대로 가상 대련이 종료되는 가운데.
나는 뒤늦게 새로운 무공, 진천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건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