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괜찮은 수가 떠올랐어
한낮의 숲 필드.
시간대와 지형을 확인한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특정 몬스터를 떠올렸다.
다름 아닌 오크 투사였다.
‘오크 투사는 C급 난이도에선 보스 몬스터였는데.’
하지만 녀석은 이곳 C+급 난이도에선 일반 몬스터로 등장했다.
달리 말해 여타 일반 몬스터 무리들처럼 두세 마리씩 몰려다닌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쿠워어어-!
처음 조우한 오크 투사는 총 세 마리였다.
녀석들과의 전투를 앞두고 두 사람, 윤설하와 차은월은 살짝 긴장한 듯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녀석들과의 전투 때문에 긴장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보다는.
“……실수하지 말자.”
차은월이 중얼거리는 말처럼, 자칫 실수가 있을까 저어하는 느낌이었다.
윤설하도 별말은 없었지만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나는 이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오크 투사를 상대로 실수가 나오면 레이드가 상당히 지체될 테니까.’
사실 오크 투사는 다른 C+급 난이도의 몬스터와는 다르게 딱히 전략이라 이를 만한 게 없었다.
내가 녀석들의 공세를 받아내는 사이, 남은 팀원들이 한 마리씩 제거해 나가는 것.
단지 정공법, 정석뿐이었다.
‘비교적 단순하긴 하지만.’
그만큼 전투에 소요되는 시간도 정직했다.
그런 구도 속에서 만일 실수가 나와 몬스터가 다른 곳으로 새어나간다면?
쓸데없는 소요는 공략의 지체로 이어지고, 이는 고스란히 성적에 반영될 것이다.
두 사람이 걱정하는 점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하지만.
“괜찮아. 나만 믿어.”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내겐 단 한 마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할 자신감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 자잘한 실수 한두 개쯤 나온다 한들 크게 상관없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단숨에 달려나갔다.
타닷-
갑작스러운 접근에 녀석들은 빠르게 반응했다.
쿠워어억!
거칠게 포효를 내지르며 마주 달려오는 것이다.
육중한 발소리에 땅이 잘게 뒤흔들렸다.
무게감에 비해 녀석들의 몸놀림은 생각 이상으로 기민했다.
그로 인해 예상보다 빠르게 녀석들과 맞닥뜨린 가운데.
녀석들은 제각각 손에 쥔 박도를 내리찍었다.
후웅-!
세 자루의 박도가 대기째 짓뭉개며 닥쳐왔다.
그 순간.
쿠구구궁-
나는 곧바로 코어를 활성화시키는 한편, 양손으로 신속하게 벽뢰수를 펼쳤다.
터텅-! 텅!
마치 번개를 가르듯, 섬전과 같은 손놀림으로 허공을 수놓았다.
내 손짓에 녀석들의 박도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그대로 상체를 비틀어 무영귀살각을 준비하는 한편.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몸이 가벼워.’
생각 이상으로 몸이 잘 움직이는 까닭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크 투사 한 마리로 호신을 펼치며 상대하던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혼원현천신공의 기본적인 효능만 가지고 박도를 쳐 냈음에도 별다른 충격이 없었다.
눈에 띄는 변화, 이윽고 나는 원인을 알아차렸다.
‘이게 B급을 달성한 효과인가?’
다름 아닌 스텟의 성장, B급에 도달한 덕분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온몸의 감각을 첨예하게 일깨웠다.
그러자 크고 작은 차이점이 속속들이 느껴졌다.
단순히 몸이 가벼워지고, 신체의 내구성이 증가한 데서 나아가 반응 속도나 시야 범위도 크게 향상됐다.
‘이거라면…….’
오크 투사를 힘으로도 찍어 누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가능성을 떠올린 즉시 코어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내 친구들이 집중적으로 공세를 퍼붓는 녀석 대신, 중앙의 녀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양손 가득 백은의 마나를 휘감은 채 복마구권을 펼쳤다.
쩌-엉!
범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중앙에 있는 녀석의 흉부에 주먹이 꽂혔다.
이에 녀석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위력을 확인한 순간 나는 확신했다.
‘템포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판단 즉시 기어를 올리듯, 마나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순간적으로 내 기세가 변한 사실을 눈치챘는지.
“……안일한?!”
근처에서 오크 투사를 상대로 검무를 펼치던 윤설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무어라 할 말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스걱-!
무영귀살각의 참격이 중앙의 오크 투사의 전신을 세로로 갈라 버렸다.
그러자 윤설하는 물론, 차은월 또한 입이 쩍 벌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만 살짝 열었다.
“괜찮은 수가 떠올랐어. 잠깐 나한테 맞춰 줘.”
그러고는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오른쪽 오크 투사를 향해 짓쳐들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자 자연스럽게 왼쪽에 있던 오크 투사가 내 친구들, 특히 화력이 센 차은월을 노렸다.
하지만.
“어딜!”
윤설하가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녀석의 발을 묶었다.
나처럼 공세를 받아내며 마주 반격하는 대신.
그녀는 낙화칠검 특유의 현란한 검초와 혹한의 냉기로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내 요청을 받아들이고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이를 확인한 순간.
‘역시 윤설하.’
나는 신경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내가 타깃으로 삼은 녀석에게 온전히 신경을 집중했다.
결과는 오래지 않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쿠웅-!
불과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오크 투사 한 마리를 때려눕힌 것이다.
이로써 나는 속으로 확신했다.
‘앞으로는 좀 더 힘을 써도 괜찮겠네.’
레이드는 이를테면 레이스 같은 느낌이었다.
단일 전투의 연속인 만큼 적절한 힘의 분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까지 내가 다수를 상대할 때 녀석들의 공세를 받아 내는 데 집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마나뿐만 아니라 체력에도 상당히 여유가 생겼으니까.’
B급에 달하는 스텟이 받쳐 주는 만큼, 공세를 주력으로 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관건은 총 소요 시간이었는데, 그마저도 금방 확인이 가능했다.
쿠웅-!
구태여 내가 발을 묶지 않아도 윤설하와 차은월, 둘이서 여유롭게 한 마리를 때려눕힌 것이다.
계산 결과, 기존의 전략보다 전투 속도가 두 배 조금 안 되는 수준으로 빨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확신을 가지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대로 가자.”
내 제안에 두 사람은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덕분이었다.
“저쪽에 보스 몬스터가 있어!”
평소보다 대략 두 배는 빨리 보스 몬스터와 조우한 것은 말이다.
크르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의 진원지에는 오크 투사보다 몸집이 두 배 가까이 큰 몬스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체는 다름 아닌 B급 몬스터, ‘오우거’였다.
‘변함없이 위압감 하나만큼은 끝내주네.’
녀석의 흉악하게 번뜩이는 붉은색 안광을 보고 있자니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처음 녀석과 대면했을 땐 긴장해서 그런 줄만 알았으나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B급 몬스터부터는 기세가 남다르니까.’
마치 심인욱의 패왕진군보가 발휘하는 위압감처럼 B급 몬스터는 특유의 기세를 발산하는 게 가능했다.
다만 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쿠구구궁-!
체내의 마나를 끌어올려 위압감의 여파를 걷어내면 되는 것이다.
다만 전투 시작도 전에 일정 수준의 마나 소모를 강제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밑지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금에 이르러선 별다른 타격이 없는 느낌이었다.
‘마력 스텟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독보적이니까.’
미소와 함께 오우거를 주시하고 있을 때.
그워어어!
녀석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오우거는 특이하게도 일반 몬스터를 거느리지 않았다.
그만큼 여타 보스 몬스터와 다르게 강력했지만, 긴장은커녕 기대가 됐다.
‘과연 B급 몬스터를 상대로 얼마나 먹힐지.’
B급 초인으로서의 내 역량을 제대로 가늠해 볼 기회나 다름없는 까닭이었다.
타닷-
나는 오우거를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녀석을 잡으면 레이드가 끝나는 만큼, 이번에는 힘 조절을 신경 쓰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을 내기로 했다.
가열차게 끌어오르는 코어의 마나를 바탕으로 탈혼지를 발휘하는 한편.
화아앗-!
양손에 항마멸인장의 요사스러운 기운을 휘감았다.
‘일반 몬스터라면 이 정도만으로 즉사(卽死)시킬 수 있겠지만.’
오우거는 특유의 오밀조밀하게 짜인 근육과 품고 있는 마나로 인해 치명타가 쉬이 나오질 않았다.
치명타는커녕, 유효타를 가하기도 전에 무력에서 밀리는 구도가 자주 연출되곤 했다.
때문에 수세를 취한 상태에서 피해를 누적시키는 식의 전투가 정공법이었다.
하지만.
‘과연 저 녀석의 무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
나는 이전과는 달리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내 수준을 정확하게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 일념으로 맞닥뜨린 순간.
그워어어어!
녀석이 포효와 함께 일권을 내질렀다.
나는 항마멸인장으로 응수했다.
그 결과.
쩌-엉!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일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에 전해지는 가운데.
나는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밀리지 않았다.’
압도하진 못했으나, 그렇다고 밀리지도 않았다.
녀석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낸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녀석은 혼자지만, 나는 두 명의 천재들과 함께 싸우는 까닭이었다.
“하압!”
윤설하는 이번에도 역시 신속하게 움직였다.
내가 오우거와 동수를 이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단숨에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츠즛- 츳-!
평소보다 한층 공격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내가 녀석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했을 때는 아예 공세일변도로 변해 있었다.
혹한을 품은 낙화칠검이 녀석의 하체를 집요하게 베어 가르는 가운데.
지이잉-!
차은월이 슬슬 공세에 나섰다.
공격 마법의 규모를 키워 주는 마력 역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역장의 활용을 조금 달리했다.
수십여 개의 역장으로 분산시키는 대신, 열 개의 역장을 일렬로 나란히 세웠다.
그러고는 단 한 발, 실제 총알을 연상시키는 작디작은 마탄을 구현했다.
‘설마…….’
결과가 어렴풋이 뇌리를 스칠 무렵.
차은월이 일렬로 배치한 역장을 향해 마탄을 쏘아냈다.
파지지직-!
마탄이 역장을 거쳐 갈 때마다 범상치 않은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렇게 극도로 응축된 한 발의 마탄은 오우거의 왼쪽 어깻죽지를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
그야말로 두 눈이 번쩍 뜨이는 위력이었다.
본래 차은월의 역할은 화력, 마법의 규모를 바탕으로 녀석의 움직임을 봉하는 데 있었다.
역장을 바탕으로 화력을 증폭시켜도 오우거의 두터운 방어를 뚫어내기가 요원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단 한 발의 마탄으로 녀석의 한쪽 팔을 불구로 만들어 버렸다.
그워어어어억-!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차은월을 바라봤다.
그녀는 내 시선에 무어라 반응하는 대신, 그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 역시 윤설하처럼 실시간으로 내 전략에 맞춰 대응을 달리한 것이다.
‘……역시 차은월도 천재구나.’
새삼스럽게 그녀의 천재성을 피부로 느끼는 한편.
나는 고통으로 얼룩진 오우거의 표정을, 그리고 덜렁거리는 왼쪽 어깻죽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동시에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타닷-!
나는 흑영신보를 바탕으로 빠르게 짓쳐들었다.
내 접근에 녀석은 다급한 기색으로 오른팔을 쳐들었다.
하지만.
‘한쪽 팔로는 안 될걸?’
그걸로는 제대로 된 반격은커녕, 급소조차 제대로 가릴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텅 비어 있는 오우거의 왼쪽 가슴을 향해 항마멸인장을 내질렀다.
퍼걱-
촘촘히 짜여진 근육을 꿰뚫고, 무쇠처럼 단단한 뼈마디를 분쇄했다.
손끝에 세차게 약동하는 심장이 느껴지는 순간.
콰직-!
그대로 으스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