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기대해도 좋아, 안일한
쿵! 쿵! 쿵!
트롤 주술사는 포효를 내지르며 손에 쥔 지팡이를 연신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러자 주위의 마나가 순식간에 녀석의 지팡이 끝으로 모여들었다.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으로 보아 마법을 펼치려는 모양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도 불구하고.
타닷-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윤설하와 함께 목표로 삼은 트롤 두 마리를 향해 쇄도해 갔다.
당연히 믿는 구석이 있는 까닭이었다.
고오오-!
일순간 등 뒤쪽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다름 아닌 차은월이었다.
때마침 그녀가 엄호에 나선 것이다.
지잉-! 지잉-! 지잉-!
순식간에 마력 역장이 수십여 개로 불어났다.
이는 트롤 주술사가 구현한 마법의 규모를 가볍게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 사이.
휘익! 스걱-!
나는 윤설하와 함께 무사히 트롤 두 마리를 떼어냈다.
이어서 트롤 주술사로부터 충분히 간격을 벌릴 무렵.
“하압!”
차은월은 짧은 기합성과 함께 마탄 세례를 쏟아냈다.
트롤 주술사는 그녀보다 반 박자 늦게 화염구를 머금은 지팡이를 내질렀다.
콰앙! 쾅!
메케한 연기구름과 함께 마나의 파편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가운데.
차은월이 만들어 낸 십여 개의 마탄이 연기를 뚫고 트롤 주술사를 향해 쇄도해 갔다.
마나의 규모뿐만 아니라 마법의 위력까지도 트롤 주술사를 상회한 것이다.
그녀의 활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트롤 주술사가 다급하게 마나를 끌어모으는 찰나.
“어딜!”
손에 들린 오브를 통해 마법이 아닌, 마나 그 자체를 끌어내 트롤 주술사 쪽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차은월의 마나가 녀석의 지팡이 끝에 맺힌 마나를 옭아매듯 휘감았다.
녀석은 이를 조금도 예상치 못했는지.
우어어어?!
크게 움찔거리며 허둥거렸다.
반면 차은월은 이미 수중에서 벗어난 마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나를 완벽하게 제어해냈다.
그러고는.
화아앗-!
트롤 주술사가 그러모은 마나를 순식간에 흩어 버렸다.
마법 구현의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시킨 것이다.
그 여파로 녀석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당혹스러운 건 비단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저런 게 가능하려면 마나의 배열하고 구조를 완벽하게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차은월에게 바란 건 어디까지나 마법을 통한 엄호 정도였다.
일반 트롤을 제거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으나 그녀는 그 이상을 해냈다.
이렇게 되면 트롤 주술사 레이드의 난이도가 확연하게 내려가는 건 물론, 사냥 속도도 한층 빨라질 터였다.
‘역시 천재는 천재인가…….’
속으로 나직하게 감탄하고 있을 때.
“안일한! 이 녀석들 마무리해야지!”
윤설하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눈앞에 집중했다.
다행이 내가 할 일은 비교적 간단한 것이었다.
‘슬슬 마무리하자.’
눈앞에 있는 두 마리의 트롤의 숨통을 끊는 것.
슬슬 레이드의 마무리를 준비해야 했다.
나는 판단과 함께 탈혼지를 발휘하는 한편.
화악-!
항마멸인장의 요사스러운 기운을 양손에 휘감았다.
그 상태로 곳곳에 서리가 잔뜩 껴 있는 트롤 두 마리를 향해 쌍장을 내질렀다.
콰직-!
단숨에 심장을 꿰뚫어 버린 덕분인지, 녀석들은 순식간에 절명했다.
나와 윤설하는 맥없이 허물어지는 사체들을 뒤로한 채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트롤 주술사를 잡고 레이드를 끝내기 위함이었다.
나와 정확히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슬슬 끝낼게!”
차은월은 곧장 수법을 바꿨다.
트롤 주술사의 마법을 파훼하며 최대한 훼방을 놓는 쪽에서 본격적으로 공세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수십여 개의 마력 역장을 전개하며 공격 준비를 끝마쳤다.
그렇게 차은월의 집중 포화가 시작됐다.
콰앙! 쾅!
무차별적인 마탄 세례가 녀석의 피륙을 벗겨냈다.
아무래도 보스 몬스터인 만큼 트롤 주술사의 회복력은 일반 트롤의 그것을 웃돌았다.
하지만.
스릉-!
그마저도 윤설하의 냉기를 머금은 검에 가로막혔다.
상처 부위가 순식간에 서리로 뒤덮인 탓에 회복이 더뎌진 것이다.
나는 그 틈을 타 단숨에 녀석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러고는.
콰직!
그대로 트롤 주술사의 흉부를 꿰뚫어 심장을 박살 냈다.
녀석의 눈에서 생기가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마침내 허물어졌을 때.
-2번 게이트 D+급 승급 심사가 종료됐습니다.
허공에서 심사의 끝을 알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심사 결과도 함께 발표됐다.
-게이트 공략 결과를 산정합니다.
-클리어 등급 A+. 승급을 축하합니다.
그렇게 나는 최고의 성적으로 승급을 끝마쳤다.
* * *
승급 심사가 모두 끝났을 때.
“각 팀은 차례대로 초인 라이선스를 반납해라. 내일 중으로 승급이 반영된 D+급 라이선스를 재배포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모두 수고했다. 이만 해산해라.”
진태진 교관은 승급 절차에 관한 설명을 끝으로 수업을 종료했다.
하나둘씩 정진관을 빠져나가는 가운데.
“얘들아, 심사도 끝났는데 우리 뒤풀이하자!”
윤설하가 나와 차은월에게 제안해 왔다.
뒤풀이는 사실상 작년 1년간 흡사 정례행사처럼 해 온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좋은 생각이야! 마침 우리가 A반에서 1등을 하기도 했고!”
차은월은 배시시 웃으며 곧바로 수긍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우리 팀은 A반에서 유일하게 A+ 성적을 받았다.
즉, A반에서 우리 팀이 1등인 것이다.
이를 축하할 겸, 그간의 노고를 군것질로 가볍게 풀자는 뜻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승급 심사는 작년 수행평가와 비슷한 느낌인가?’
새삼스러운 사실을 떠올리는 한편, 나 또한 친구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 길로 곧장 식당이 아닌 매점으로 향하려는 찰나.
“일한이! 기다려라-!”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한달음에 내 쪽으로 달려왔다.
다름 아닌 임강철과 그의 팀원들이었다.
“일한이! 오늘 레이드, 굉장했다!”
임강철은 다가온 즉시 이번 승급 심사에 관한 감상부터 늘어놨다.
“비록 우리가 지긴 했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를 시작으로.
“진짜로. 안일한, 윤설하 너희 둘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강한 것 같아. 같은 근접 무기로서 존경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차은월도 대박이었지. 내가 참고한답시고 몇 번이나 보면서 연구했는데, 오늘 트롤 주술사 마법을 파훼한 수법은 진짜 엄두조차 안 나더라.”
김은솔은 물론, 장지석에 이르기까지.
혀를 내두르며 나와 내 친구들을 향해 순수하게 감탄을 쏟아냈다.
그들에게 겸양을 표하는 한편, 나 또한 화답을 건넸다.
“너희 팀도 대단하던데?”
이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팀이 B급에서 B+급의 성적을 받은 가운데.
임강철의 팀은 A급 성적을 받은 몇 안 되는 팀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 임강철의 말을 빌리자면, 서로 간에 멋진 승부를 펼친 셈이었다.
“그건 고맙군. 어쨌든 좋은 승부였다! A반 최강의 팀이 된 걸 축하한다!”
“고마워.”
객쩍은 태도로 감사를 표하고 있을 때.
윤설하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임강철과 그의 팀원들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뒤풀이하려고 하는데, 너희들도 함께하지 않을래?”
그녀의 제안에 김은솔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반응했다.
“함께 가도 괜찮겠어?”
“물론이다! 안 그런가, 일한이?!”
김은솔의 물음에 윤설하 대신 임강철이 흔쾌히 답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 가운데, 나는 얼떨떨한 감정을 뒤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김은솔과 장지석은 처음엔 어색했지만 임강철 덕분에 어느 정도 편해진 상태였다.
더욱이 우리를 좋게 봐주는 애들을 구태여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총 여섯 명이서 매점으로 향했다.
들어선 순간.
“오, 안일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흘러간 시선의 끝에는 총 여섯 명의 생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세 명은 익숙한 이들이었다.
다름 아닌 백유진과 심인욱, 그리고 오윤서였다.
‘나머지 세 명은 각각 B반, C반의 생도인가?’
그들 또한 팀 단위로 모여 뒤풀이를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면면들을 살피며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 때.
“오, 너희들! 먼저 와 있었군!”
임강철은 반가운 기색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심인욱의 옆자리에 착석하며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함께 즐기자고!”
변함없이 친화력 하나만은 좋은 녀석이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한편, 나는 내 일행과 백유진의 일행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양측 모두 딱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내 일행을 향해 가볍게 질문했다.
“어떻게 할래, 얘들아?”
“저쪽 자리가 가장 넓으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나도 상관없어!”
윤설하를 시작으로 차은월, 김은솔과 장지석까지.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사이 백유진 또한 제 일행과 입을 맞춰 놨는지.
“안일한, 이쪽으로 와!”
나와 내 일행을 호출했다.
그렇게 무려 12명이 참여한 뒤풀이가 시작됐다.
저마다 잡담을 나누거나, 다과를 즐기는 가운데.
옆자리의 백유진이 나를 향해 넌지시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A반은 너희가 대표로 출전하지?”
“대표?”
“반 대항전 말이야!”
“아.”
그제야 나는 백유진의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승급 심사는 심사뿐만 아니라 반에서 최강의 팀을 가리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 조금 전에 임강철이 말했듯, 나와 내 친구들이 속한 팀이 A+급 성적으로 최강의 팀이 됐다.
즉, 우리 팀이 자동으로 A반 대표가 되어 반 대항전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유진의 팀이 B반의 대표로 출전하고, 나와 오윤서의 팀이 C반의 대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심인욱도 백유진의 말을 거들었다.
뿐만 아니라 여태 새초롬한 태도를 고수하던 오윤서도 모처럼 대화에 참여했다.
“내가 이 녀석에게 맞춰 주느라 고생했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어.”
“음, 그건 피차일반이다.”
“뭐어?!”
변함없이 티격태격하는 심인욱과 오윤서.
백유진은 두 사람을 웃는 낯으로 중재하는 한편,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여태까진 반 내에서 경쟁했다면 이제는 너희와 경쟁해야 한다는 뜻이지.”
백유진은 씨익 웃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 속에는 승부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보내는 건 비단 백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안일한, 오늘도 너희 팀의 레이드를 봤다. 변함없이 괴물 같더군.”
“그러게. 쟤는 도대체 정체가 뭐길래 항상 저만큼이나 앞서 나가는 건지.”
진지한 표정으로 감상평을 늘어놓는 심인욱부터, 입술을 삐죽 내미는 오윤서까지.
백유진만큼이나 승부욕을 드러내며 나를 의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너희 팀의 전략을 철저하게 연구할 생각이다.”
“맞아. 차은월에게 마냥 뒤처져 있을 수는 없으니까.”
심인욱과 오윤서는 물론.
“대련이라면 그나마 자신 있었는데, 레이드는 정말이지 당해낼 엄두가 안 나네.”
백유진까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의 반응은 나를 동등한 경쟁자로 여기던 여태와는 확실히 달랐다.
이는 마치.
‘한 수 아래를 자처하는 느낌인데.’
나를 뛰어넘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아직은 그렇다는 말이야. 반 대항전까진 시간이 충분히 남았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안일한.”
백유진은 철저히 도전자의 자세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세 사람의 시선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한편.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