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틀림없이
‘새로운 무공, 이라고……?’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이미 고차원의 무공을 여럿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뛰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림자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이번엔 뭔데? 당장 오늘 밤부터 익히는 거야?’
이에 녀석은 변함없이 나직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장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고?’
-그래. 이번 무공은 일정 수준의 체급이 갖춰져야 본연의 위력이 발휘되니까.
일정 수준의 체급.
이는 겨울 방학 때부터 지금까지, 잊을 만하면 나오는 이야기였다.
‘또 기초 체급인가.’
중얼거리듯, 속으로 되뇌는 한편.
이번에는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려야 하는지를 가늠해 보고 있을 때.
-아니, 이미 기본적인 토대는 갖춰졌다. 이젠 한 단계 올라갈 차례라 봐도 무방하겠지.
그림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기본적인 토대는 이미 갖춰졌다.
이는 이전에 고태식 교관에게서도 들은 내용이었다.
‘한 단계 올라가라니, 대략 어느 정도?’
-B급이면 충분하겠지.
‘B급이라…….’
B급이라면 최소한 스텟만큼은 진태진 교관과 동급이라 할 수 있는 등급이었다.
어느새 생도 수준을 넘어 아카데미의 교관 수준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 사실에 새삼 감개무량함을 느끼는 한편.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할 일을 대략적으로 정리했다.
‘일단 알겠어. 그럼 당분간은 레이드 수업과 스텟 단련에 집중하면 되는 거지?’
-그래. 체급을 키우는 쪽은 내가 거들어주지.
‘하기야, 네가 가진 성장 스킬의 효율이 더 좋으니까. 어쨌든 잘 부탁할게.’
-맡겨라.
녀석의 대답을 끝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
…
…
몇 시간 후.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52%]
-[????의 그림자]가 연륜에 따른 분별력과 미래시(未來視)의 일부가 담긴 기억, 그리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이 활성화됐습니다!
그림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 중 동기화율만 간단하게 확인한 다음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기숙사 방을 빠져 나와 익숙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갔다.
다름 아닌 스텟 단련실이었다.
단련실로 들어선 순간.
“오, 일한이! 오늘도 화이팅하자고!”
새벽 단련실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임강철이 반갑게 맞이해 줬다.
그림자는 옅은 미소를 띤 채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러고는 근처의 스텟 단련 기구를 향해 갔다.
익숙한 동작으로 단련에 임하는 한편, 머릿속으로 목표치를 가늠했다.
더불어 몇 시간 전, 안일한에게 말했던 새로운 무공에 관한 정보를 떠올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무공에 얽혀 있는 기억이 아스라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뭐? 그걸 익혔다고? 그건 아직 네놈 수준으론 감당할 수 없는 무공이라니까?!
외눈, 외팔의 사내.
동료이자, 스승이었던 남자에 관한 기억이었다.
사실 그림자가 가진 무공의 대부분은 초로의 사내에게 전수받았다.
당연히 지금 떠올리는 무공 또한 사내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다만 이 무공만큼은 다른 스킬들과는 달리 조금 특별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내 누누이 말하지만 네까짓 놈의 스텟으론 몸이 버티질 못해! 마음만 앞서서 대업을 그르칠 셈이냐?!
본래 초로의 사내와의 관계는 그저 계획을 위해 함께하는 사이였다.
사내는 계획의 일환으로서 엄선한 무공을 전수해 줬을 뿐, 사제지간이라 보기엔 다소 삭막한 관계였다.
그런 사이였으나, 지금 떠올리는 무공에 이르러서 바뀌었다.
-이런 목석같은 놈! 이미 짊어진 것도 많으면서 무엇을 또 짊어지려 하는지…….
초로의 사내 특유의 거친 말투에 어느샌가부터 온정이 서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는 차마 그 감정에 응할 수 없었다.
‘앓는 소리를 낼 여유조차 없는, 그런 시기였으니까.’
본래 그 무공은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가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때문에 그림자는 초로의 사내의 충고를 어기고, 분수에 맞지 않는 무공을 익혔다.
그렇게 생명을 불태워가면서까지 적들과 맞선 것이다.
‘그때마다 귀가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기억이 하나둘씩 되살아나는 한편. 문득 그리움이 사무쳤다.
하지만 그림자는 감상에 젖는 대신 고개를 털어냈다.
‘이미 되돌릴 수 없고, 또한 되돌려서도 안 되는 순간이니까.’
오윤진과 차은월, 그리고 윤진호 박사와의 기억이 그랬듯.
초로의 사내와의 기억도 모두 끝나 버린 이야기였다.
그림자는 상념에서 깨어나는 한편.
‘……이제야 겨우 충고를 지킬 수 있겠군요, 영감님.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틀림없이.’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전하듯, 그림자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고 나서야 스텟 단련에 몰두했다.
* * *
첫 레이드 수업 이후.
내 일상은 레이드 수업과 스텟 단련의 반복이었다.
목표가 확실한 만큼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 끝에 2주일이 지났다.
“지금부터 D+급 승급 심사를 진행하겠다.”
어느새 승급 심사를 치르는 날이 찾아온 것이다.
예정대로 난이도는 C급이었다.
‘C급 난이도니까, 오크 아니면 트롤이 나오겠네.’
가상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를 가늠하고 있을 때.
“일한이, 자신 있나?!”
임강철이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의 팀원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나눈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승급은 뭐, 그럭저럭? 너는?”
“나도 승급은 자신 있다! 하지만 일한이, 너와의 대결은 잘 모르겠군!”
임강철의 대답을 듣고 나니 이번 승급 심사가 일종의 시험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레이드 공략 수준에 따라 성적이 매겨지는 것이다.
‘승급 커트라인 자체는 B급으로 그다지 높진 않지만.’
임강철이 말한 대결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성적이 나오는 만큼 각 팀의 역량과 호흡을 수치로써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 심사로 자연스럽게 각 반의 최강의 팀이 가려질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임강철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서로 잘해 보자.”
“그래! 그럼 심사 끝나고 보도록 하지!”
임강철은 힘차게 대답하며 제 팀원들과 함께 멀어져 갔다.
마치 그들과 바통을 터치하듯.
“일한아, 슬슬 우리 차례야!”
살짝 떨어져 있던 차은월이 나를 호출했다.
그녀의 말대로 앞선 팀들의 심사는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대부분 성적은 B급에서 B+급인가.’
드문드문 A급이 나왔지만 보통 B에서 B+ 성적이 주를 이뤘다.
승급 기준에 미달되는 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홀로그램 화면을 살피며 성적 추이를 가늠하는 사이.
“다음, 들어가도록.”
어느새 내 차례가 돌아왔다.
진태진 교관에게서 아티팩트를 받고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가상 게이트에 진입하는 순간.
-2번 게이트 D+급 승급 심사를 시작합니다.
허공에서 승급 심사에 관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끝날 무렵 게이트 진입 특유의 이질적인 감각도 때마침 사라졌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은 밀림을 연상케 하는 열대우림이었다.
이를 확인한 순간, 나는 이번 게이트에 등장할 몬스터를 유추할 수 있었다.
‘열대우림이라면 트롤이겠군. 보통 오크는 초원이나 숲 필드에서 주로 등장하니까.’
다름 아닌 트롤이었다.
이 사실을 눈치챈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트롤인가 보네?”
내 옆쪽으로 다가서며 중얼거리는 윤설하는 물론.
“트롤은 한 마리씩 집중적으로 제거하는 거였지?”
차은월 또한 내 뒤를 따르며 트롤을 상대하는 전략을 입에 담았다.
여태까지 레이드 수업을 통해 호흡을 맞춘 건 물론이고 각 몬스터에 따른 전략까지 입을 맞춰 둔 덕분이었다.
‘트롤은 오크보다는 느리고, 위력은 덜하지만 그만큼 맷집과 회복력이 뛰어난 몬스터니까.’
따라서 오크를 상대할 때처럼 각자 한두 마리씩 상대하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오히려 세 명이서 한 마리씩, 빠르게 제거해 나가는 편이 훨씬 속도가 빨랐다.
이러한 전략을 머릿속으로 더듬고 있는 사이.
쿵-! 쿵-! 쿵-!
우거진 밀림지대 너머로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딱 봐도 트롤의 그것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인식하기가 무섭게 전투를 준비했다.
‘두 마리 정도려나?’
속으로 개체 수를 가늠하고 있을 때.
우워어어!
예상했던 대로 트롤 두 마리가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확인 즉시 지면을 박차고 쏘아져 나갔다.
타닷-
그대로 흑영신보를 발휘하는 한편.
트롤 두 마리를 향해 무영귀살각을 펼쳤다.
이에 녀석들은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 탓에 횡으로 길게 날아드는 백은의 참격을 그대로 적중당했다.
하지만.
스스스스-
참격을 맞은 녀석들의 복부는 피륙의 상처조차 남지 않은 채 빠르게 수복됐다.
그게 바로 트롤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인 회복력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만큼 나는 개의치 않고 달려들었다.
녀석들의 지근거리에 이르렀을 때.
우어어억-!
트롤 특유의 기다란 팔이 채찍처럼 쇄도해 왔다.
나는 이를 눈으로 좇으며 회피하는 한편, 도리어 복마구권으로 반격에 나섰다.
특히 오른쪽 트롤에게 공세를 집중했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내 의사가 전달됐는지.
“은월아, 오른쪽!”
“알겠어!”
두 사람, 윤설하와 차은월 또한 나처럼 오른쪽 트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제야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스걱-!
혹한의 냉기를 품은 윤설하의 검이 흩날리는 꽃잎처럼 어지러이 트롤을 베어갈랐다.
그 상태에서 상처를 채 수복하기도 전에 차은월의 마탄이 타깃을 뒤덮었다.
덕분에 피해량이 회복되는 속도를 능가했다.
그래서인지.
우어어억!
녀석은 괴로움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쩌-엉!
항마멸인장으로 빠르게 녀석의 숨통을 끊어 놓은 까닭이었다.
‘지금은 심사 중이니까.’
평소보다 속도와 정확성, 그리고 호흡이 중요했다.
그게 곧 이번 심사의 채점 기준인 까닭이었다.
“바로 다음으로 가자!”
나는 친구들에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한 마리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전투 양상은 비슷하게 흘러갔다.
내가 이목을 끌면 남은 두 사람이 집중적으로 공세를 퍼부어 회복의 여지를 차단한다.
그사이 내가 마무리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쿠웅!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그대로 허물어지는 트롤.
녀석의 죽음을 확인한 즉시.
“바로 움직이자.”
친구들과 함께 서둘러 움직였다.
첫 전투 이후, 대부분의 상황은 처음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 결과.
우어어어어어!
눈 깜빡할 사이에 이번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
트롤 주술사를 마주할 수 있게 됐다.
녀석은 등 뒤로 두 마리의 트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순간.
“차은월, 주술사는 맡길게.”
나는 차은월에게 엄호를 부탁했다.
트롤 주술사는 단순히 힘이 센 오크 투사와는 달랐다.
녀석은 체내의 마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만큼, 거기에 대비해야 했다.
‘사실 저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본래라면 트롤 주술사는 물론.
녀석이 거느리고 있는 트롤 두 마리의 공세까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차은월에게 엄호를 부탁한 건 이번 공략이 시험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맡겨 줘!”
나는 그녀의 씩씩한 대답을 듣자마자 지면을 박찼다.
목표는 트롤 주술사가 아닌, 녀석이 거느리는 두 마리의 트롤이었다.
타닷-!
내 움직임에 윤설하도 반응해서 따라붙었다.
일반 트롤 두 마리를 처리하고, 트롤 주술사는 마지막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녀석들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
우어어어어-!
트롤 주술사가 심상치 않은 기세로 포효를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