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일한 군은 대체 정체가 뭐죠……?
그림자의 단언 덕분일까.
사정없이 떨리던 윤진호의 눈동자가 차츰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그림자는 나직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애초에 따님은 이미 저들의 손에서 벗어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박사님은 몇 달 전 발생한 수행평가 참사를 기억하십니까?”
“큰일이었죠. 딸아이에게 듣기로는 그때도 일한 군이 엄청난 일을 해냈다고…….”
윤진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림자는 수행평가 참사의 자세한 내막을 설명했다.
“참사를 일으킨 주범의 임무가 바로 아카데미의 우수한 인재들을 현혹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자는 이미 죽었죠.”
“아……!”
“게다가 꼬리가 잡힌 이상, 당분간 저들에게 아카데미를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런 내막이 있었을 줄이야…….”
윤진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다소 풀어진 모습을 경계하듯, 그림자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문제는 따님이 아닌, 박사님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따님은 저들이 할 수 있는 수많은 협박 수단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타당한 의견이네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와준다니, 어떻게……?”
“믿을 만한 사람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따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림자의 제안에 윤진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물어왔다.
“일한 군은 대체 정체가 뭐죠……? 정말 제 딸아이와 같은 또래가 맞나요?”
마치 그림자를 신기한 생물체를 보는 듯한 눈빛.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림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붙여 드릴 사람에 관해선 추후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우선 박사님이 갖고 계신 미구현 특성부터 구현하도록 하죠.”
“알겠어요.”
윤진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를 향해 그림자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에테르 반지였다.
“에테르 반지라는 아티팩트입니다. 이게 박사님의 특성을 구현시켜 줄 겁니다.”
간략한 설명과 함께 그림자는 아티팩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었다.
윤진호는 이를 떨리는 손길로 건네받았다.
그는 반지의 한가운데 소용돌이치는 에테르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바로 그 순간.
“……!”
윤진호가 크게 움찔했다.
마치 눈앞에 느닷없이 무언가가 나타난 것처럼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상태창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정말로 구현됐어요……!”
미구현 특성이 구현됐음을 더듬더듬 알려왔다.
윤진호는 허둥거리는 와중에도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빤히 주시했다.
그를 향해 그림자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무형의 조형사가 맞습니까?”
“마, 맞아요. 정말 놀랍네요…….”
윤진호는 만감이 교차하는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계속해서 상태창을 주시했다.
그림자는 그를 배려하여 잠시 동안 말없이 지켜봤다.
수 분이 지나고 나서야 윤진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요, 일한 군. 숙원이 이렇게 풀리게 될 줄은 정말이지…….”
“아닙니다.”
“아니, 아니에요.”
윤진호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과 동시에 그림자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러고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것도 그렇고, 언제고 꼭 보답할게요.”
그림자는 대답 대신 한동안 윤진호의 시선을 교환했다.
순간 그의 뇌리로 이전 생의 기억이 스쳐 갔다.
지금처럼 윤진호가 손을 덥석 붙잡았던 순간의 기억이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윤진호는 표정도, 입에 담는 내용도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속에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으나.
‘……상념에 젖을 때가 아니다.’
가벼운 고갯짓으로 털어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만일 지난 생을 추억한다면, 그건 모든 일이 끝냈을 때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림자는 생각을 정리하며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말씀드렸듯, 오늘 저희가 나눈 대화와 박사님의 특성에 관한 건 비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럴게요.”
“네, 또 연락드릴게요. 조심히 들어가시길.”
그림자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한동안 등 뒤에서 윤진호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공원에서 벗어날 무렵.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머릿속에서 안일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아까 네가 윤설하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때, 노이즈가 들렸어.
‘노이즈?’
-어. 그분과 맨 처음 만났을 때도 흐릿하게 노이즈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선명하게 들렸어.
대답을 듣는 순간, 그림자는 뭔가 짚이는 바가 있었다.
확인을 위해 나직하게 되물었다.
‘무엇을 봤지?’
-윤설하의 아버지가 처절하게 절규하는 광경. 네게 복수를 부탁하는 순간을 봤어.
‘……그와의 첫 만남을 봤군.’
-그렇다는 말은…….
‘그래,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또한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
그림자의 단호한 대답에 안일한은 잠깐 침묵했다.
이윽고 꺼낸 화제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그보다 윤설하의 아버지한테 사람을 붙여 줄 거라니, 생각해 둔 사람이 있어?
‘그건 오윤진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아…….
그림자는 잠깐 생각하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확히는 달그림자 길드라 해야겠지.’
사실 엄밀히 말해서 지금은 윤진호를 밀착해서 호위할 단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암약하기에 앞서 김한석을 제거한 만큼 낙일의 움직임은 이전 생보다 늦어질 터였다.
그럼에도 윤진호에게 사람을 붙이고자 하는 건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대비해 나가는 한편.
‘수족을 차근차근 잘라내 주마.’
하나씩 제거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이뤄 간다면, 마침내 숙원을 이뤄낼 수 있을 터였다.
생각을 정리한 그림자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 * *
다음날, 아침.
-윤설하 : 일한아, 혹시 통화 가능해? 확인하면 답장 부탁할게!
잠에서 깨어나 스마트 워치를 확인해 보니 윤설하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시간 되면 연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젯밤 윤진호 박사님과 대화를 나눈 것 때문에 그런 건가?’
분명 기억하기론, 그림자는 윤진호에게 어젯밤 대화를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니 어지간해선 대화 내용을 밝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의문과 함께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향했다.
윤설하에게 전화를 하기에 앞서 정신을 좀 차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돌아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머지않아 윤설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응, 나야.
그녀는 대답과 함께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젯밤 아빠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서.
“그래? 구체적으로 어땠는데?
-으응,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돌아와서 나를 끌어안아 주시거나, 되도록 너랑 가까이 지내라고 하거나.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
아무래도 집에 돌아간 즉시 윤설하에게 걱정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듯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다만 무어라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사실상 애매한 정도를 넘어 불가능한 수준이지.’
비밀은 가급적 아는 사람이 적어야 했다.
그림자 녀석이 윤진호에게 비밀로 할 것을 신신당부한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당연히 내 입으로 실토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그렇다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수도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혹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인 거야……?
윤설하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긍정했다.
“……어, 조금 애매하네. 미안.”
-그렇구나……. 응, 그럼 어쩔 수 없지.
윤설하가 시무룩한 어조로 대답했다.
티를 안 내려고 애를 쓰는 듯했지만, 서운한 뉘앙스를 숨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더더욱 마음의 가책이 느껴졌다.
-이해해. 나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뭔가 중요한 일을 위해 무거운 짐을 감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그래?”
-응. 다만 짐을 나누기엔 아직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잖아?
윤설하는 이전에 신창백가에서 밝힌 심경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나서서 무어라 정정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이어 갔다.
-더 노력할게. 응, 언젠간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럼 시업식 때 보자!
윤설하는 애써 웃는 말투로 말을 맺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기 직전.
“……윤설하, 잠깐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응?
“지금 설명할 수 없는 건……, 결코 네가 부족하거나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언젠가는 설명해 줄게. 꼭.
-응, 알겠어!
윤설하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통화가 끝났다.
나는 한동안 스마트 워치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순 없을 것 같은데.’
애초에 그림자 녀석이 가진 최종 목표의 스케일만 봐도 그랬다.
결코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컸다.
‘……뭐, 그림자 녀석에게도 생각이 있겠지.’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달력이 자리해 있었다.
‘이제 6일 남은 건가.’
2학년 시업식 날까지 앞으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날짜를 속으로 곱씹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3월.
2학년 시업식이 시작되는 날이 찾아왔다.
‘A반이 아니라 대강당으로 모이라 했지.’
나는 사전에 스마트 워치를 통해 확인한 대로 용맹관이 아닌 대강당을 향해 갔다.
강당 내부에는 A반뿐만이 아니라 B, C반 생도들까지 모여 있었다.
인파를 헤아리며 입구 쪽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일한이! 이쪽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임강철이었다.
그는 미리 도착해서 친구들과 모여 있었다.
서둘러 다가가자 나머지 친구들이 나를 맞이해 줬다.
“일한아 오랜만이야……!”
“모습을 보아하니 잘 지낸 모양이군.”
차은월과 심인욱, 두 사람을 시작으로 한 명씩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대강당의 단상 위로 일련의 무리가 올라갔다.
다름 아닌 교관들이었다.
면면들이 대부분 익숙한 가운데, 익숙지 않은 사람들과 처음 보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중 익숙지 않은 사람에 속하는 교장이 나서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1년 만이네요, 여러분. 한국 초인 아카데미의 교장을 맡고 있는 김근해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훈화가 시작된 것이다.
가장 먼저 언급된 내용은 작년에 벌어졌던 ‘수행평가 참사’였다.
피해자들을 향한 위로와 아픔을 딛고 일어나 이 자리에 함께해 준 생도들을 향한 감사, 마지막으로 격려까지.
대략 5분간의 일장 연설로 훈화가 끝났다.
“그럼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와 더불어 물러나는 교장과 바통을 터치하듯, 이번에는 근엄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앞으로 나섰다.
처음 보는 까닭에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오래지 않아 중년 남성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2학년 주임 교관이자, 이번에 새롭게 마법 심화 수업을 맡게 된 이정식 교관이다.”
2학년 주임 교관, 이는 1학년 주임 교관을 맡았던 고태식 교관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마법 심화 수업을 담당한다고 하니, 머릿속 한구석에서 김한석이 스쳐 갔다.
‘그림자 녀석은 별말 없었으니까.’
그 정도로 정신을 추스르고 있을 때.
“지금부터 2학년 교육 과정을 설명하겠다. 1학년 때와는 궤를 달리할 테니, 모두 귀 기울여 듣도록.”
본격적으로 2학년 교과 과정에 대한 설명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