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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장속도가 이상하다-121화 (121/218)

121화 최악의 미래는 오지 않을 겁니다

-……아빠랑 만나게 해 달라고?

윤설하는 마치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확인하듯 재차 내게 물어왔다.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었다.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 그것도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터였다.

때문에 나는 미리 생각해 둔 그럴싸한 이유를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어, 개인적으로 상담 받고 싶은 문제가 있어서. 너도 알다시피 나도 너희 아버지처럼 미구현 특성이잖아?”

-……아.

“너희 아버지께선 우리와 방향은 다르지만 다른 방식으로 초인 사회에 기여하고 계시니까. 참고가 될 거 같았거든.”

-그런 거야……?

윤설하는 여전히 긴가민가한 듯싶었으나, 어느 정도는 부탁의 이유를 이해한 것 같았다.

나는 기세를 몰아 긍정과 함께 재차 부탁했다.

“어떻게 안 될까?”

-으응, 약속은 약속이니까 안 될 건 없지만…….

“그래?”

-응, 오늘 한번 말씀드려 볼게. 그런데, 정말 그걸로 괜찮아……?

윤설하의 되묻는 말에서 왠지 기대와는 다르다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 부분이 살짝 신경 쓰였지만, 파고드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때문에 나는 신경을 거둬들이고 가만히 대답했다.

“어. 대답 듣게 되면 연락 줘. 늦어도 괜찮아. 시간은 내쪽에서 충분히 맞출 수 있으니까.”

-으응, 알겠어. 또 연락할게.

“고마워.”

그렇게 윤설하와의 통화가 끝났다.

이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윤설하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문득 남아 있는 두 개의 소원에 생각이 가닿았다.

‘과연 나머지 소원권을 쓸 날이 올까?’

잠깐 궁리해 봤으나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림자 녀석이 요청하지 않았다면, 윤설하가 들어 줄 세 개의 소원권은 앞으로도 계속 남아 있었을 터였다.

‘뭐,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고민해도 되는 문제니까.’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한 채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모처럼의 휴식이었다.

대략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윤설하에게서 기다리던 메시지가 왔다.

-윤설하 : 아빠가 허락해 주셨어. 오늘 밤 10시 쯤인데, 괜찮아?

밤 10시.

마침 딱 좋은 시간이었다.

‘오늘은 일찍 잠들면 되겠군.’

빠르게 그림자에게 바통을 넘기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다음, 나는 곧장 윤설하에게 답장을 보냈다.

-10시, 알겠어. 고마워.

몇 시간 후.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49%]

-[????의 그림자]가 연륜의 일부가 깃든 분별력과 미래시(未來視)의 편린이 담긴 기억, 그리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이 활성화됐습니다!

그림자는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메시지를 살폈다.

가장 먼저 확인한 부분은 다름 아닌 동기화율이었다.

‘49%라…….’

어느새 50%의 고지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대로라면 두 번째 단계의 준비도 별다른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한 그림자는 몸을 일으켰다.

‘10시라고 했나.’

머릿속으로 약속 시간을 되새기는 한편.

그림자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 * *

“일한 군, 오랜만에 보네요.”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의식이 깨어났다.

시야가 조금씩 회복되는 가운데.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윤설하의 아버지, 윤진호의 모습이었다.

뒤이어 환한 가로등 빛과 그 너머의 어둑어둑한 공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상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림자 녀석, 윤설하의 아버지와 만났나 보네.’

약속대로 그림자가 의식을 공유한 것이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계승과는 보이는 풍경부터가 다른 까닭에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아닌 제3자의 시점에서 시야를 공유하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감각에 적응할 겸,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사실 조금 당황했어요.”

윤설하의 아버지, 윤진호가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일한 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고 싶더군요. 일한 군은 우리 딸아이의 소중한 친구니까요.”

윤진호는 나직하게 덧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를 향해 그림자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님.”

처음 듣는 호칭에 나는 물론, 듣고 있던 윤진호 또한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단지 그뿐으로, 윤진호는 슬슬 본론을 꺼내 들었다.

“설하에게 듣기론, 일한 군은 미구현 특성에 관한 상담을 받고 싶다 들었는데. 맞나요?”

“네, 중요한 문제입니다.”

“진로 문제는 중요한 법이죠. 더욱이 미구현 특성으로 초인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건…….”

윤진호는 말끝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여러모로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추측건대 그 역시 미구현 특성으로 계속 고통받아 왔기 때문에 그런 듯했다.

그가 겪은 고초와 아픔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닙니다. 사실 박사님께 면담을 청한 건 제 미구현 특성 때문이 아닙니다.”

그림자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녀석의 반응에 윤진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오늘은 제가 아니라 박사님께서 가지고 계신 미구현 특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만남을 청한 겁니다.”

“……!”

그림자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윤진호는 순간 움찔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계속해서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이야기에 앞서 한 가지,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그게 뭐죠?”

“지금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철저히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당연히 따님인 윤설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죠? 일한 군, 나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윤진호는 혼란스러운 듯, 근처에 있는 벤치에 주저앉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반면 그림자는 가만히 선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 진정됐는지, 윤진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알겠어요. 비밀로 할 것을 약속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일한 군은 도대체 내가 가진 미구현 특성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윤진호에게서 살짝 날이 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응만 보더라도 그가 지금 화제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림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사실 저는 박사님이 가진 미구현 특성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또한 구현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

녀석의 거침없는 대답에 윤진호는 두 눈을 부릅떴다.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일한 군이 딸아이와 친구라 해도, 함부로 말하는 건…….”

“빈말이 아닙니다. 박사님을 기만할 생각도 없습니다.”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죠? 당사자조차 모르는 걸 어떻게 일한 군이.”

“그건 제가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윤진호의 두 눈이 그야말로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걸 거침없이 밝힐 줄이야.’

가끔 보면 녀석은 신기할 정도로 과감했다.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녀석의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범위에 속했다.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저런 방법이 아니고서야 윤진호를 납득시키기는 어려울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 설마 일한 군은…….”

윤진호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는지, 말을 더듬었다.

이에 그림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미구현 특성은 이미 구현됐습니다. 전 미래를 볼 수 있고, 그걸로 박사님의 능력과 구현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런, 그럴 수가!”

“구현하기에 앞서 먼저 박사님의 능력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듣고 나서 결정하시죠.”

그림자는 차분하게 운을 뗐다.

윤진호의 미구현 특성의 정체가 ‘무형의 조형사’라는 점부터.

기억과 의식, 스킬 등. 무형적인 요소를 다룰 수 있는 능력까지.

설명을 전부 전해 들은 윤진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형의, 조형사. 그게 정말인가요……?”

“네.”

“일한 군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능력이네요.”

윤진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빛은 이채를 한가득 띤 채로 반짝거렸다.

반면 그림자는 윤진호의 기대감을 경계하듯, 한층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갔다.

“활용도가 무궁무진하죠.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고요.”

“위험,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박사님,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 저는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박사님께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불쾌할 수도 있다니. 일한 군은 대체 어떤 미래를 본 거죠?”

감이 안 잡힌다는 듯, 윤진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림자는 지난번 내게 간략하게 설명했던 천천히 미래를 풀어놨다.

김한석이 속한 조직이 윤설하에게 저질렀던 만행부터.

이를 바탕으로 윤진호를 협박, 회유했던 부분까지.

설명이 이어질수록 윤진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반응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일한 군, 부디 딸아이의 복수를……!

과거, 윤진호와 처음 대면했을 당시.

귓가에 울렸던 원인 모를 노이즈가 또다시 들려오는 까닭이었다.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한층 선명하게 들렸다.

-낙일(落日), 저놈들이 제 모든 걸 앗아갔습니다……! 이대로는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염치없지만, 일한 군에게 맡길게요. 제발 우리 불쌍한 딸아이의 복수를, 설하의 복수를 해 주세요……!

낙일이란 명칭부터, 윤설하의 죽음을 암시하는 절절한 절규에 이르기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정면에서 노이즈 속 목소리만큼이나 떨리는 윤진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림자 녀석, 윤설하의 아버지께 도움을 받았다더니. 설마 방금 들었던 노이즈가…….’

그 당시의 윤진호와 그림자, 둘이 실제로 나눴던 대화가 아닐까.

아니, 분명 그게 맞을 것이다.

깨달은 순간.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마치 내게 말하듯, 그림자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녀석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가 오늘 박사님께 만남을 청한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드렸던 최악의 미래는 오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리 만들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박사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림자는 이전에 나를 다독여 줬던 것과 비슷한 내용으로 윤진호를 다독였다.

그제야 어느 정도 충격에서 가셨는지.

“……내가 무얼 하면 되죠?”

윤진호는 더듬더듬 대꾸했다.

말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그림자는 천천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우선 오늘 이 자리에서 박사님의 미구현 특성을 구현시킬 겁니다. 그럼 적들은 박사님을 회유할 구실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저들이 우리 설하의 안위로 협박한다면 나는, 나는…….”

윤진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가운데.

“제가 붙어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림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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