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최대한 많은 걸 얻어가야겠어
윤진호.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언급되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음? 왜 그러니?”
오윤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어왔다.
그녀는 내가 그림자 녀석과 대화하고 있음을 모를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상한 아이네.”
오윤진은 피식거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웃음을 뒤로한 채 머릿속으로 그림자와의 대화를 이어 갔다.
‘윤진호, 그러니까 윤설하의 아버지라니. 갑자기 그분이 왜 나온 거야?’
-이번 여정에서 그의 미구현 특성을 구현할 수 있는 유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구현 특성을 구현할 수 있는 유물? 아…….’
뒤늦게 기억났다.
윤설하의 아버지가 나와 같은 미구현 특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더욱이 윤진호가 가진 미구현 특성은 나와는 달리 수십 년간 구현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게 곧 부녀간의 갈등의 씨앗이 됐다는 점까지 덩달아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참관 수업 당시 둘 다 앙금을 털어낸 까닭이었다.
‘그래서 여태 잊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애초에 윤설하와 소원권을 걸고 내기를 했던 이유가 바로 윤진호의 미구현 특성을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전엔 윤설하의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어?’
-그걸 포함해서 처음부터 목적은 두 가지였다.
녀석이 덧붙인 말은 다름이 아니었다.
윤설하의 트라우마 해결과 윤진호의 미구현 특성 구현.
둘 다 필요한 일이었고, 두 문제의 맥이 닿아 있으니 처음부터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단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럼 어째서 윤설하의 아버지가 가진 미구현 특성이 필요한 거야?’
-그걸 설명하려면 먼저 윤진호의 미구현 특성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뭔데?’
-무형의 조형사. 그게 윤진호가 가진 특성의 명칭이다.
무형의 조형사.
명칭만 들어선 감이 잘 안 잡혔다.
이해한다는 듯 그림자는 설명을 덧붙였다.
-형태가 없는 요소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다.
‘형태가 없는 요소?’
-이를테면 사람의 기억이나 의식, 혹은 스킬 같은 요소들을 다루는 거다.
‘……!’
생각지도 못한 효과에 입이 쩍 벌어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만큼 그림자 녀석이 설명한 ‘무형의 조형사’의 효과는 불가해하고 특이하게 느껴졌다.
‘역시 미구현 특성은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네.’
나직하게 감탄하고 있을 때.
-지금의 내가 의식의 형태로 너와 마주할 수 있는 것도 윤진호의 미구현 특성, 무형의 조형사 덕분이다.
녀석이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놨다.
‘……뭐라고?’
-지난번, 내가 차은월에게 정보를 얻었다고 한 이야기를 기억하나?
‘어.’
-단순히 정보를 전해들은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녀에게서 기억을 이식받은 거다.
‘……!’
생각지도 못한 속사정에 머릿속이 일순간 하얗게 물들어갔다.
반면 그림자는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만한 능력이 적들의 손에 넘어갔었다.
‘적들이라면, 김한석이 속한 단체?’
-그래. 녀석들은 환영 마법에 잠식된 윤설하를 미끼로 윤진호를 협박했고, 그의 미구현 특성을 구현시켜 실컷 써먹었지.
‘……실컷 써먹었다니.’
-기억의 이식이 가능하다는 건 곧 추출도 가능하다는 거다. 활용도는 무궁무진하지.
‘그런 일이…….’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그림자는 고저 없이 덧붙였다.
-끔찍한 이야기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흔들리지 마라. 그와 같은 일은 두 번 다신 일어나지 않을 테니.
‘……!’
-모든 건 내가 겪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니까.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다.
녀석은 다독이는 말로 설명을 끝맺었다.
생각이 깊어지는 가운데, 나는 마지막으로 녀석에게 물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미구현 특성을 구현해 주면 윤설하의 아버지도 초인이 될 수 있는 건가?’
-가능하겠지만, 솔직히 추천하고 싶진 않군. 그의 능력이 지닌 가치가 무궁무진한 만큼, 악용됐을 때의 피해도 커질 테니까.
‘그런가…….’
-때문에 따로 조치를 해 둘 생각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보다.
‘……아.’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나 오윤진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신기한 생물을 관찰하는 듯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니?”
오윤진은 내 반응이 재밌었는지, 나른한 미소를 띤 채 물어왔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그래서?”
“네?”
“조건은 그게 전부냐는 뜻이야.”
“네,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내 대답에 오윤진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이러면 자꾸 빚이 늘어나잖니.”
“……?”
앓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덕분에 다소간의 긴장이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온화한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그럼 슬슬 가자. 앞장서 주겠니?”
“네.”
나는 그림자 녀석의 도움을 받아 앞장섰다.
녀석이 알려 주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기를 십여 분.
-이제 곧이다. 준비하도록.
처음으로 게이트가 발생하는 광경을 마주하게 됐다.
목격한 순간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는 오윤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는 이런 세세한 미래까지 볼 수 있는 거구나. 놀랍네. 게다가 이거, 게이트가 아니라 균열이야.”
“균열, 이요?”
“몰랐니?”
“네, 저는 그냥 발생한 장면까지만 봐서…….”
어떻게든 얼버무리자 오윤진은 한숨과 함께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균열이란 통상적인 게이트와 달리 타 차원과 연결된 게이트를 의미하는 거야. 쉽게 말해서 침식이 발생한 게이트라고 보면 돼.”
“아, 그렇군요.”
“그럼 들어가자.”
설명을 마친 오윤진은 망설임 없이 균열로 들어섰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우우웅-!
이질적인 감각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를 수 초.
이윽고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이건.’
후덥지근한 열기와 불쾌한 습기.
열대우림에서나 볼 법한 울창한 수목과 무성한 수풀.
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건 반쯤 무너진 건물의 터였다.
이를 확인한 순간.
“멸망한 왕국의 터라면, 마도 차원이겠구나.”
오윤진이 다소 아쉽다는 뉘앙스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멸망한 왕국의 터보다는 버려진 마탑에서 나오는 유물의 가치가 더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아쉬움을 털어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쿠웅-! 쿵! 쿵!
무성한 수풀 너머로 육중한 발소리가 울려 퍼지는 까닭이었다.
오윤진은 여유롭게 품 속에서 오브를 꺼내며 말했다.
“너도 싸울 거지?”
“네.”
“그럼 준비하렴.”
나는 건틀렛의 상태를 살피며 슬슬 몸을 풀었다.
뜻하지 않은 산행으로 워밍업이 된 상태였다.
이를 알아차린 순간.
취익-!
듣기 싫은 울음소리와 함께 녹색 피부의 몬스터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총 열 마리에 달하는 오크 무리였다.
‘오크라면 C급인가.’
여태 오크는 고사하고, C급 몬스터 자체를 상대해 본 적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감 있게 한발짝 나아갔다.
그 순간 뒤쪽에서 오윤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마리 정돈 감당할 수 있지?”
“해 볼게요.”
“좋아. 얼마나 성장했는지 내게 보여 주렴.”
나른한 미소와 함께 등 뒤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오윤진이 발휘하는 마법의 위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과연 A급 마법사.’
그녀와 함께라면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별다른 피해는 없을 터였다.
덕분에 나는 한결 편안하게 마음을 먹는 한편.
‘최대한 많은 걸 얻어가야겠어.’
오크 무리를 향해 속도를 가일층 끌어올렸다.
* * *
오윤진과의 동행은 대략 세 달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지속됐다.
그 사이 우리는 총 여섯 게이트를 공략했고, 네 개의 유물을 손에 넣었다.
그 결과.
-마나 친화(C)
-무색무취(B)
-순환 가속(B+)
마나의 인식 범위를 넓혀 주고 마나의 흡수 효율을 높여 주는 패시브 스킬, ‘마나 친화(C)’.
발출한 마나와 마법의 잔향을 없애 흔적을 지우는 패시브 스킬, ‘무색무취(B)’.
마지막으로 체내의 마나 순환 속도를 끌어올려 위력을 증폭시키는 액티브 스킬, ‘순환 가속(B+)’까지.
중복되는 스킬을 제외하고도 총 세 가지 스킬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자, 받으렴. 약속했던 유물이야.”
스킬 습득을 마친 오윤진에게서 내 몫의 유물 하나를 건네 받았다.
다름 아닌 ‘에테르 반지’라는 이름의 아티팩트였다.
은색으로 이루어진 반지의 형태로, 외견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평범한 반지와는 다르게 한가운데에는 보석 대신 마나와 비슷한 기운이 조그맣게 응축되어 있었다.
‘이게 바로 윤설하의 아버지의 미구현 특성을 구현해 줄 유물인가.’
처음 접해서 그런지 상당히 신기했다.
반면 오윤진은 뭔가 마음에 걸렸는지.
“정말 그거면 충분하겠니?”
그녀는 몇 번이고 내 의사를 재확인했다.
아무래도 이번 동행에서 얻은 네 개의 유물 중 에테르 반지의 가치가 가장 떨어지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충분해요. 게다가 마나 수정도 한 개 더 얹어 주셨잖아요.”
실제로 내가 원하는 유물의 정체를 알게 된 오윤진은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마나 수정 한 개를 내게 줬다.
덕분에 나는 총 세 개의 마나 수정을 얻을 수 있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뭐,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오윤진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어. 이런 일이 있으면 앞으로도 종종 불러주렴. 아직 네게는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으니까.”
“……그럴게요.”
“그럼 또 연락하렴.”
오윤진은 나른한 미소와 함께 미련없이 돌아섰다.
그렇게 제법 길었던 그녀와의 동행을 끝낸 후, 나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짐을 풀고, 씻은 다음 가장 먼저 달력부터 확인했다.
‘이제 일주일 후면 벌써 개학이네.’
길었던 겨울 방학도 어느새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2학년 시업식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게다가 녀석의 말대로라면, 2학년부터 본격적으로 계획의 두 번째 단계를 실행하게 될 터였다.
‘과연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또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만히 생각하던 도중 잠깐 잊고 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다름 아닌 에테르 반지의 활용에 관해서였다.
‘이걸 윤설하의 아버지께 드려야 하는 거라면.’
우선 그녀의 아버지와 대면할 필요가 있었다.
실행에 옮기기에 앞서 나는 녀석에게 의사를 물었다.
‘들려?’
-듣고 있다.
‘이제 슬슬 건네드려야 할 것 같은데, 에테르 반지.’
-약속을 잡아 주겠나? 대화는 내가 하도록 하지.
그림자 녀석의 제안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내가 고민하는 걸 눈치챘는지, 녀석은 나직하게 단서를 덧붙였다.
-지금의 나라면 너와 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
‘그렇다는 건, 내가 너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는 거야?’
-그래.
‘그럼 뭐, 대화는 네게 맡길게.’
-고맙다.
그렇게 녀석과 합의를 본 다음.
나는 스마트 워치를 들어 윤설하에게 연락을 취했다.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여, 여보세요? 안일한?
익숙한 목소리가 스마트 워치 너머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다음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네게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뭔데……?
“소원권, 기억해?”
-……!
윤설하는 내 용건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화들짝 놀란 모양이었다.
스마트 워치 너머로 그녀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어. 그게 내가 너한테 바라는 소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