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안일한, 이 친구는 정말 특별하거든요
“안일한 님 맞습니까?”
신창백가에 도착하자 웬 노신사가 정중한 말투로 나를 맞이해 줬다.
나는 얼떨떨한 감정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노신사는 대문을 열며 안내를 자처했다.
“유진 도련님의 친우분이시군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감사합니다.”
위엄마저 느껴지는 신창백가의 대문을 통과한 순간.
“……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정갈한 분위기의 정원과 풍취가 느껴지는 한옥 건물들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신창백가라는 명성에 걸맞은 풍경이었다.
감상하느라 넋을 놓고 걷는 사이.
“일한아, 이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백유진이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안내해 준 노신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백유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어?”
백유진의 등 뒤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한이! 잘 지냈나?!”
다름 아닌 임강철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화 소리를 들었는지, 입구 쪽에서부터 4명의 인원이 추가로 나타난 것이다.
임강철을 비롯한 내 친구들, 윤설하와 차은월은 물론.
“안일한, 기다리고 있었다.”
심인욱에다가 오윤서까지 함께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심인욱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곧장 백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빛으로 이유를 묻자 백유진은 쾌활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네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봤는데, 상당히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거든.”
“그래서?”
“다 같이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인욱이하고 윤서한테 권유했지!”
백유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자연스럽게 내 친구들을 돌아봤다.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마침 좋은 기회다 싶어서 내가 임강철에게 연락했다.”
이번에는 심인욱이 나서서 백유진의 설명을 이어 갔다.
그의 설명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가 된 까닭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윤설하와 차은월에겐 내가 연락했다!”
예상대로 임강철이 남은 두 명을 부른 모양이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7명이라는 건가.”
가만히 중얼거리자 백유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들의 면면을 한차례 쭉 살펴봤다.
간만에 보는 세 사람, 백유진과 심인욱, 그리고 오윤서의 표정은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반면 윤설하와 차은월, 두 사람은 조금 달랐다.
‘표정이 조금 굳어 있네. 무슨 일 있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찰나.
윤설하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때 네가 우리한테 부탁했던 거, 혹시 기억나?”
“부탁이라니?”
“김한석……, 그 사람과 싸우러 가면서 남은 사람들을 맡아 달라고 그랬잖아.”
“아.”
확실히 그런 부탁을 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당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던 만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뒤늦게 떠올린 나와는 달리 윤설하는 아직까지도 신경 쓰는 기색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하지만 나는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어. 손쓸 도리조차 없이 당해 버렸지. 그만큼 약했으니까.”
윤설하는 처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차은월 또한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임강철까지 굳은 낯빛을 띠고 있었다.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마음에 걸렸나 보네.’
진심으로 그랬다.
아니, 신경을 안 썼다기보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편이 보다 정확했다.
부탁한 직후에는 김한석을 기습할 기회를 가늠하느라 온 심력을 쏟았다.
기습에 실패한 다음에는 어떻게든 플랜B를 구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친구들에게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그래서 네가 너무 멀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임강철한테 연락이 온 거지.”
윤설하는 묵묵히 말을 이어 갔다.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어. 이번 참사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혹시나 문제가 생겼을 때 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윤설하는 굳은 의지가 서린 눈빛으로 말을 맺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차은월 또한 동의하듯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대화의 흐름에 객쩍은 기분이 들었다.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나도 마찬가지다. 안일한.”
심인욱이 윤설하의 말을 받고 말문을 열었다.
“네 이야기는 들었다. 진태진 교관님과 함께 그자에게 맞섰다지. 놀라운 일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네가 앞서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영원히 지속되진 않을 거다. 나 또한 가만히 지켜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까.”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한 말투였다.
무어라 반응해야 좋을지, 가늠이 잘 안 되는 가운데.
분위기를 풀어줄 만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런 거야! 다들 일한이, 네 활약에 영향을 받은 거지. 나도 그렇고.”
다름 아닌 백유진이었다.
특유의 사람 좋은 목소리에 무겁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백유진은 슬슬 상황을 정리했다.
“이러지 말고, 나머지는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너희들한테 알려 줄 좋은 소식도 있으니까.”
“좋은 소식?”
“응. 집안의 어른들께 말씀드렸는데, 한 분께서 우리가 기특하다고 수련을 도와주겠다고 했거든.”
“호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신창백가의 어른이라면 꽤나 명망 있는 초인일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었다.
과연 어떤 식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기대감을 품는 한편.
“가자.”
백유진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백유진을 따라 도착한 곳은 신창백가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대련실이었다.
아카데미의 무기 훈련실 만큼은 아니어도 규모가 상당했다.
과연, 이름 높은 무가답다는 생각을 떠올릴 무렵.
“유진아, 친구들이 다 도착했다고 들었는데.”
온화한 인상의 중년 남성과 무표정한 청년이 대련실로 들어섰다.
그들의 정체를 떠올리기 전에 백유진이 먼저 웃는 낯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달음에 다가가 중년 남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숙부, 오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슬슬 찾아뵈러 가 볼까 싶었어요.”
백유진의 숙부, 일전에 백유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대면했던 백천기였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었다.
마찬가지로 백유진 또한 예상치 못했는지.
“……형도 올 줄은 몰랐는데.”
어색한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백유진의 손윗 형제인 백유성이었다.
“숙부께 부탁받았으니까.”
“그렇구나.”
형제간의 대화라 하기엔 지나치게 짧은 문답이 이뤄지는 사이.
백천기는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비롯한 친구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중 심인욱과 오윤서가 나서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천기 아저씨,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저도요. 그간 잘 지내셨죠?”
두 사람의 인사에 백천기는 인자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인욱이하고 윤서구나. 둘 다 오랜만에 보네. 얼굴을 보아하니, 다들 잘 지낸 것 같구나.”
이어서 백천기는 내 친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를 눈치챈 백유진은 한달음에 다가와서 내 친구들을 소개했다.
“오른쪽부터 임강철, 윤설하, 차은월이에요.”
“반가워요. 유진이 숙부 되는 사람이에요.”
하나둘씩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다가왔다.
이미 면식이 있는 만큼 백천기는 백유진의 설명을 건너뛴 채로 내게 다가왔다.
“친구는 구면이죠?”
“네, 안녕하세요.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그래. 유진이에게 듣기론 이번에 큰 일을 해냈다고.”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훌륭한 실력에 겸양까지, 보기 드문 청년이야. 우리 유진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내 대답을 들은 백천기는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민망함에 얼버무리듯 감사를 표하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백유성과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제야 백천기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 이미 들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수련을 도와주러 왔어요. 그 전에 말을 편하게 할까 싶은데, 괜찮겠죠?”
백천기의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내 친구들이 자리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당연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천기는 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실력부터 확인해 볼까?”
수련을 도와주기에 앞서 각자의 실력을 테스트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백천기는 창을 쓰는 대신 적수공권인 채로 자세를 취했다.
그런 백천기를 향해 첫 번째로 나선 이는 다름 아닌 임강철이었다.
“저부터 하겠슴다!”
“기개가 있는 친구로군. 받아 줄 테니 3초식 정도 펼쳐 보겠나?”
“넵!”
임강철은 힘차게 대답하며 곧바로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그는 인자하게 웃고 있는 백천기를 향해 빠르게 짓쳐들었다.
“흐아압!”
제법 빠르고 기세가 대단했으나 다소 단순하고 직선적인 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임강철에겐 아카데미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보법밖에 없어서 그런 듯했다.
권법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 순간.
후웅-!
임강철의 주먹이 범상치 않은 투로로 뻗어나갔다.
딛고 선 자세며, 동작, 그리고 궤적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봐도 저건 기본으로 제공되는 권법, 육합권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권법인데, 어디서 구한 거지?’
자연스럽게 의문을 떠올리고 있는 나와는 달리 백천기는 한눈에 알아본 듯했다.
“호왕권이라, 웅심 길드의 후원을 받은 모양이구나.”
“넵! 맞슴다!”
짤막한 대화를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임강철은 지난번 면담에서 웅심 길드 쪽을 택했지.’
아무래도 그때 새로운 권법을 얻은 모양이었다.
납득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순식간에 백천기가 제시한 3초식이 끝났다.
“잘 봤다. 임강철이라 했나? 제법 매섭더구나.”
“감사함다!”
눈 깜빡할 사이 임강철의 테스트가 끝났다.
다음 차례로 윤설하가 나섰다.
그녀는 임강철과 마찬가지로 지난번 면담 때 환영검가에서 후원 받은 스킬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검법과 보법이라 했나?’
각각 낙화칠검(落花七劍)과 비화표(飛花漂)였다.
백천기의 말에 따르면 환영검가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무공인 모양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윤설하의 무위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백천기 또한 그녀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본 듯했다.
“윤설하라고 했지?”
“네.”
“네가 검이 아니라 창을 들었다면 반드시 우리 가문에 불러들였을 텐데. 그만큼 아쉽고, 또한 훌륭하구나.”
“가, 감사합니다!”
백천기의 극찬에 윤설하는 뺨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는 차은월 또한 다르지 않았다.
“……유진아, 넌 생각보다 보는 눈이 좋구나. 친구들이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아.”
그녀의 빼어난 마법 활용을 보고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백천기의 평가에 백유진은 히죽 웃으며 답했다.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숙부님, 아직 놀라기엔 이르세요. 안일한, 이 친구는 정말 특별하거든요.”
“그래 보이는구나.”
백천기는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한편, 문득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백유진의 형, 백유성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유성아.”
“예, 숙부님.”
“네 창을 잠시 빌려주려무나.”
백천기의 요청에 백유성은 공손히 창을 건넸다.
보아하니 적수공권으로 임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창을 쓰려는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백천기는 그런 나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넌 3초식은 신경 쓸 필요 없다.”
“……그 말씀은.”
“물론 전력을 다해 보라는 뜻이다. 어디 한번 네 실력을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