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본 교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오윤진이 제 능력을 통해 미래를 들여다봤으며, 그로부터 재앙의 편린을 목격했다는 점부터.
모종의 이유로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이를 막아 내기로 결심했다는 점까지.
그녀의 사정을 전해 들은 진태진 교관이 처음 내비친 반응은 다름이 아니었다.
“……방식이 어찌 됐든, 그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올곧게 나아가고 있었군. 게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고.”
자조적인 말투, 그리고 회안 어린 눈빛과 표정까지.
진태진 교관은 오윤진의 선택과 행동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랬는지.
“오래전 이야기지만 들어 보겠나? 지금 나누고 있는 화제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듯한데.”
그는 오윤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는 양,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나 또한 진태진 교관과 오윤진, 두 사람의 사정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태진 교관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모든 건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그 아이가 가진 미구현 특성의 느닷없는 발현에서부터 시작됐다.”
오윤진의 사정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녀는 미래를 들여다보는 능력을 통해 아카데미에서 일어날 참사를 목격했다.
이를 교관들에게 알렸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지의 소치였다.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더더욱 미구현 특성에 대해 무지했으니까.”
결국 참사는 일어났고, 오히려 참사를 막으려 혼자서 애를 쓰던 오윤진이 원흉으로 지목됐다.
그나마 그녀의 집안, 다섯 번째 진리 마탑에서 손을 쓴 덕분에 여파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에겐 그렇지 않은 듯했다.
“분명 그 사건이 계기였겠지. 그 아이가 졸업도 전에 탈선을 택한 건.”
진태진 교관은 씁쓸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그제야 여태까지 그가 보인 태도와 눈빛, 그리고 내게 상담해 줬을 당시에 보여 준 적극성이 이해가 됐다.
그 일환으로써 진태진 교관은 별안간 진지한 낯빛으로 내게 말했다.
“그 사건 이후로 본 교관은 결심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이건 생도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진태진 교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본래 미구현 특성이란 대체로 종잡을 수 없으며 제어도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정보를 제때 알릴 수 없다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한다.”
이는 조금 전에 내가 밝힌 이야기.
이번 사건에 관한 정보를 뒤늦게 밝힌 점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관한 대답이었다.
“게다가 김한석의 경우를 생각하면. 오윤진 그 아이가 비밀스럽게 움직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 그자가 본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진태진 교관은 생각만으로 치가 떨리는지, 미간을 찌푸리는 한편.
이어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꺼내 들었다.
“즉, 전부 설명하지 않아도 좋다. 언제가 됐든, 밝힐 수 있을 때 털어놓는 거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더불어 한 가지, 본 교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 말씀은.”
“무엇이 됐든, 본 교관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너희를 돕겠다.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하도록.”
언제든 힘이 되어 주겠다.
그것이 바로 그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의 참뜻이었다.
예상치 못한 흐름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진태진 교관은 내 반응을 달리 받아들였는지.
“물론 생도에게 본 교관이 미덥지 않을 수 있음을 이해한다. 그만큼 이번 참사에서 불민한 모습을 보였으니. 하지만 이 세상에선 개인의 무력이 전부가 아님을 생도는 알아야 한다.”
자조적인 말투로 덧붙였다.
내가 무어라 부정하기도 전에 진태진 교관은 그대로 말을 이어 갔다.
“생도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 교관은 4대 길드의 일축인 스페셜리스트 길드의 간부 출신이다.”
“아…….”
“본 교관이 가진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생도를 돕겠다는 건 바로 그런 걸 의미하는 거다.”
그가 단호하게 덧붙인 말의 의미는 다름이 아니었다.
‘전장의 매’로 이름 높은 B급 초인, 진태진 개인의 힘은 물론.
필요하다면 4대 길드, ‘스페셜리스트’라는 인맥의 힘까지 총동원하여 나를 돕겠다는 것이다.
뜻하지 않은 제안에 어안이 벙벙할 때,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언제든 말만 하도록.”
진태진 교관의 눈빛은 의지로 가득해 보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믿음직스러웠다.
가슴 속에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가운데.
“네, 감사합니다.”
나는 천천히 감사를 표했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진태진 교관은 슬슬 몸을 일으켰다.
보아하니 용건을 이걸로 전부인 듯했다.
“쉬는 데 방해했군.”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보지. 참고로 이야기해 주자면, 아카데미는 당분간 휴교에 들어갈 거다.”
“휴교라는 말씀은…….”
“이번 참사에서 사상자는 없었지만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생도들이 많았으니까.”
김한석이 일으킨 이변 속에서 방황하며 몬스터 무리의 습격을 받은 생도들부터.
그가 발휘한 환영 마법의 잔재가 아직까지 체내에 남아 있는 생도들까지.
생각보다 피해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때문에 진태진 교관은 남은 2학기 수업은 물론, 2학기 기말고사 또한 취소될 예정이라 덧붙였다.
“그러니 다음에 볼 때는 2학년 시업식이 되겠군. 부디 몸조리 잘하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본 교관에게 연락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진태진 교관은 병실을 빠져나갔다.
온전히 혼자가 됐을 때, 나는 머릿속으로 그림자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다 들었지?’
-그래. 예상외이긴 하나, 교관의 도움은 우리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러게. 미리 설명하지 못한 부분까지 불문에 부쳐 주실 줄은 몰랐는데. 그나저나.’
-음?
‘너무 내 멋대로 오윤진, 그 사람을 팔아서 해명한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진태진 교관과의 대화에서 그 부분이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림자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나직하게 말했다.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하지.
* * *
그날 밤.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46%]
-[????의 그림자]가 연륜의 일부가 깃든 분별력과 미래시(未來視)의 편린이 담긴 기억, 그리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이 활성화됐습니다!
…
…
…
그림자는 눈을 뜬 즉시 주변을 살폈다.
병실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침대 옆, 탁상에 놓인 스마트 워치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연결음 끝에 스마트 워치 너머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익숙한 음색이었다.
-안일한?
다름 아닌 오윤진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그림자는 나직하게 긍정했다.
“나다.”
-기다리고 있었어.
오윤진은 마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반응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번 일을 처리하면 조직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알려 주기로 했지?
김한석의 배후이자, 진정한 적.
‘조직’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오윤진과 사전에 약속한 까닭이었다.
이를 이행하기에 앞서 그림자는 천천히 운을 뗐다.
“그전에 네게 해 줄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뭔데?
“진태진 교관에 관한 내용이다.”
-태진, 교관님?
진태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오윤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는 잠깐 침묵한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운 이름이네. 그래서?
“이번 사건에 진태진 교관의 도움을 받았다. 대신 조건으로써 그에게 너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
그림자는 낮에 진태진과 나눴던 대화의 자초지종을 밝히는 한편.
“미리 상의하지 못한 점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다만 진태진 교관의 도움은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다.”
뒤늦게나마 오윤진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생각보다 침착한 어조로 되물었다.
-……흐음, 조금 당황스럽지만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볼게. 그래서?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된다는 건데?
“앞으로는 협력자, 특히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으며 일정 수준 이상의 무력을 지닌 초인들의 힘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협력자라…….
아직까지는 잘 이해가 안 됐는지, 오윤진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를 이해한다는 듯 그림자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 부분은 네게 들려줄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내용이다.”
-계속해.
“가장 먼저 김한석의 배후부터 밝히도록 하지. 저들은 스스로를 낙일(落日)이라 칭한다.”
-……낙일.
오윤진은 사뭇 놀란 기색으로 되뇌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처음 재앙을 접하고, 그 배후에 있는 ‘조직’의 존재를 인식한 이후.
여태까지 ‘조직’의 흔적을 쫓았음에도 제대로 된 명칭조차 알아내지 못한 까닭이었다.
-넌 정말이지……, 어떻게 그런 부분까지 알 수 있는 거니?
오윤진은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림자는 제 할 말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지난 번에 말했듯, 김한석은 열 명에 이르는 사도들 중 여덟 번째다. 아직도 9명이 더 남아 있지.”
-혹시 나머지 사도들의 소재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지?
“거점 지역 정도는 알고 있다.”
-……맙소사. 너 정말 상상 이상이구나?
오윤진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한편, 의욕적인 목소리로 채근해 왔다.
-그래서?
“지금 당장 사도들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의 숫자는 아직까진 많지 않지만, 세계 곳곳에 한두 명씩 심어 둔 만큼 활동 범위는 방대하니까.”
-점조직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전 세계라니…….
“게다가 남은 사도들의 위장 신분은 김재학, 김한석 못지 않다.”
-……그것도 골치 아프네.
이번에 김한석을 잡을 수 있었던 건 몇 가지 조건이 갖춰진 덕분이었다.
게이트 내부라는 폐쇄된 환경, 그가 먼저 본색을 드러냈다는 명분 등.
상황이 맞지 않았다면 교관 신분인 김한석을 처리하는 건 고사하고, 추궁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기야, 당장 김재학을 처리하는 것조차 내 역량으론 역부족이니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호오, 뭔데?
“사도들은 제각각 김한석처럼 고유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노리는 이들과 접촉해서 협력을 구하고, 역으로 사도들을 색출하는 것. 그게 계획이다.”
-일리가 있긴 한데……. 가능하겠어?
오윤진은 말끝을 흐리며 되물었다.
그림자의 계획이 성립하려면 사도들이 지닌 고유 임무를 모조리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까닭이었다.
제아무리 그녀 자신보다 뚜렷한 미래를 볼 수 있다곤 하나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알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 생각해 침음을 흘렸으나.
“가능하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림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단언했다.
거기서 오윤진은 뭔가를 직감한 듯,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너 설마…….
“그래. 나는 각 사도들의 대략적인 임무까지도 알고 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히네. 도대체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니?
오윤진은 진심으로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