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모든 것의 시작점
‘……나는 너를 봤어.’
그렇게 운을 떼는 한편, 나는 김한석과의 결전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김한석의 마무리를 위해 그림자 녀석에게 바통을 넘기며 정신을 잃고 난 이후, 내 의식은 줄곧 모호했다.
현실의 상황, 시간의 흐름과도 유리된 감각 속에 하염없이 표류하던 가운데.
화아앗-!
어느 순간부터 시야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눈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두 여자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둘 다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오윤진과 차은월……?’
그림자 녀석과 인연이 있으며, 내겐 아직까지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오윤진.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내게 있어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한 명인 차은월이었다.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두 사람의 모습이 내 기억 속의 그것과는 조금씩 차이가 있는 까닭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사람의 모습은 기억 속의 그것보다 한층 성숙해 보였다.
특히 차은월의 경우에는 한 번에 못 알아볼 정도였다.
“…….”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과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적개심, 그리고 얼어붙은 무표정까지.
다소 내성적이지만 기본적으로 상냥한 내 친구 차은월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따라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오윤진이 주도했다.
오윤진의 첫마디는 경악스러우면서도, 조금도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당신이 안일한?”
안일한.
오윤진이 느닷없이 내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거기서 한 차례 사고가 정지했다.
내가 겪고 있는 현상이 ‘계승’인 만큼, 눈앞의 광경은 분명 그림자의 기억일 터였다.
그런데 오윤진이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 이름을 언급했다는 건…….
‘……그림자 녀석이, 나라고?’
그림자의 정체가 미래의 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충격을 금치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눈앞의 광경은 계속 이어졌다.
오윤진과의 대화가 재개된 것이다.
이번에는 그녀가 아닌 그림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재앙의 마녀, 그리고 거울의 마법사. 맞습니까?”
녀석의 목소리는 더 이상 전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목소리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탁해진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사실을 인식할 무렵, 그림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흘러나온 내용은 처음 내 이름이 언급됐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두 분은 일개 캐리어에 불과한 저한테 무슨 볼일이시죠.”
그림자 녀석이 스스로를 초인이 아니라 ‘캐리어’라고 칭한 까닭이었다.
그림자가 나일지도 모르는 상황에 심지어 캐리어라니.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광경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교롭게도 계승 현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땐 병실이었지.’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림자는 한동안 침묵했다.
나는 침착하게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그림자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혼의 각성’을 사용한 여파인가. 모든 것의 시작점을 봤군.
‘시작점?’
-네가 본 광경, 그게 내가 가진 계획의 출발점이었다. 이 모든 건 두 여자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됐으니까.
그림자의 대답에서 왠지 그리운 기색이 느껴졌다.
이내 녀석은 내게 본격적으로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다.
‘……내 말대로라면, 너는 진짜 미래의 나인 거야?’
-절반은 맞고, 절반은 조금 다르다.
‘절반은 다르다니, 그게 무슨…….’
-지금 우리의 상황은 미래의 안일한의 의식을 지금의 네게 이식한 결과이니까.
‘……!’
다소 복잡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설명이 확 와닿진 않았다.
다행히 그림자는 좀 더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줬다.
-나는 안일한으로서의 생전의 경험과 기억, 정보들을 토대로 구성된 의식이다.
‘……미래의 내가 맞긴 한데, 그보다는 영혼 비스무리한 느낌인 건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할 테니까. 하지만 정확히 구분해야 된다.
‘구분이라니……?’
-나는 다만 의식에 불과할 뿐, 안일한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의 너는 스스로를 유일무이한 존재라 여겨야 한다.
‘……!’
-의식의 형태로 네게 이식된 만큼 나란 존재는 이미 세상에 없다. 내가 계획을 받아들인 바로 그 순간부터 말이지.
그제야 나는 그림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인은 존재가 아니라 의식에 불과하니, 나는 오롯이 나인 채로 유일무이하다는 것.
즉, 우리의 상황에 모순은 없다는 뜻이었다.
어느 정도 녀석의 설명을 이해하게 되자 이번에는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럼 네가 스스로 캐리어라고 소개한 건? 너는, 아니 나는 미래에 초인이 아니었던 거야?’
그림자의 설명을 이해했음에도 아직까진 나와 녀석의 존재를 분리해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이를 충분히 이해하는지, 녀석은 별다른 지적 없이 대답을 입에 담았다.
-그래, 난 캐리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초인이 아니었다. 애초에 초인이 된 적이 없으니까.
‘뭐라고?’
-난 입학시험에서 떨어졌고, 초인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했던 거다.
‘……!’
그림자 녀석의 대답을 듣는 순간 또다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다 문득 내가 입학시험을 준비할 당시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붙을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기현상, 그림자 녀석이 성장 효과를 가진 스킬을 바탕으로 단련한 덕분이었지.’
그렇다면 만일 내게 일어났던 기현상이 그림자 녀석에겐 없었다고 한다면?
분명 처참한 초기 스텟으로 인해 실기 단계에서 떨어졌을 터였다.
그렇게 됐을 때 내가 선택할 진로는 단 하나였다.
‘캐리어…….’
-정확하다. 네가 그리 생각했듯,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 선택을 내렸지.
새삼스럽게 그림자에게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 사실에 소름이 돋는 한편,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잇달아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관자놀이를 짚은 채로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넌 어떻게 아카데미 내에서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는 거야?’
그림자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은 녀석이 겪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 지적이 타당하다고 느꼈는지, 녀석은 긍정과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나를 찾아온 두 명을 기억하는가?
‘오윤진과 차은월?’
-그래. 그중 나는 차은월에게서 아카데미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차은월에게서 정보를 얻었다는 말은.’
-내가 알고 있는 미래는 전부 내가 직접 겪은 게 아니라 그녀가 경험한 것들이지.
그제야 이해가 되는 한편, 여태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크고 작은 의문들까지도 덩달아 납득됐다.
지금까지 그림자 녀석의 목적은 분명했다.
다가올 재앙을 막고자 하는 것.
하나 목표의 중차대함에 비해 녀석의 계획들은 하나같이 다소 엉성한 면이 있었다.
‘미래를 알고서 움직인다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했는데.’
반면 그게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에게서 전해 들은 정보를 토대로 움직인 거라면?
그제야 녀석이 이따금씩 언급한 ‘제한된 상황, 조건’이란 표현이 이해가 갔다.
여태 미뤄 뒀던 의문들이 의도치 않게 하나둘씩 풀리는 가운데.
나는 이번 기회에 끝장을 볼 생각으로 떠오른 의문을 연거푸 쏟아냈다.
‘의식을 과거로 이식하는 게 정말 가능한 거야? 애초에 네가 정말 캐리어였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너를 선택한 거지?’
-한꺼번에 대답해 줄 수 있겠군. 미구현 특성이다.
‘미구현 특성…….’
미구현 특성.
구현되는 능력이 제각기 다르며, 여전히 불가해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특성.
그거라면 어떤 불가사의한 현상도 성립할 수 있었다.
다만 석연치 않은 부분들은 여전했다.
이를테면.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내가 가진 미구현 특성의 정확한 능력은 대체 뭐지……?’
내가 가진 미구현 특성 ‘????의 그림자’의 진정한 능력이라든지.
아니면 그림자 녀석이 두 사람을 만난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등.
헤아리는 것만으로 두통이 느껴질 정도로 복잡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 그림자 녀석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상당히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석연하게 밝히지 못함을 이해해 줬으면 한다.
‘여태까지와 같은 이유야?’
-그래.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다.
‘뭔데?’
-김한석을 제거함으로써 격변의 시작점을 무사히 비틀 수 있었다. 이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다.
두 번째 단계.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었다.
김한석을 제거한 건 어디까지나 재앙을 막기 위한 시작일 뿐.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 다가올 재앙을 막기 위한 계획을 말하는 거지?’
-그래. 그 과정에서 넌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다. 아니,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한다니……, 대체 뭘?’
-내 의식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또한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됐는지를.
‘……!’
-두 가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야말로 두 번째 단계이자,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다.
그림자의 지향점, 그리고 녀석의 형성 과정.
이는 내가 떠올린 의문의 핵심과 맞닿아 있었다.
‘두 번째 단계라…….’
예정된 파멸을 막아 내기 위해 움직이는 것.
애초에 이는 처음 미래의 재앙을 접했을 때 이미 다짐한 부분이었다.
그걸로 의문까지 전부 해결할 수 있다면 바라마지않던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무렵.
똑똑-
별안간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사람이 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일한 생도, 잠깐 괜찮나?”
정체는 다름 아닌 진태진 교관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감정을 뒤로한 채 그림자 녀석에게 양해를 구했다.
‘진태진 교관님이 찾아오셨어. 나머지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마침 잘됐군. 가능하면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 줬으면 한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림자는 마치 진태진 교관의 방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의아함에 이유를 묻자, 녀석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교관에게 오윤진에 관한 이야기의 전반을 들려주기로 약속했다.
‘오윤진……?’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은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런 거라면 뭐.’
만일 진태진 교관이 오윤진에 관한 문제를 논하기 위해 찾아왔다면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오윤진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까닭이었다.
나는 납득하는 한편, 그대로 몸을 일으켜 진태진 교관을 맞이해 줬다.
“네, 괜찮습니다 교관님.”
“고맙군.”
진태진 교관은 내 근처에 마련된 의자에 걸터앉은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러기를 수 분.
이윽고 그는 천천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일전에 생도가 말했던 오윤진,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왔다.”
“그렇군요.”
나는 대답하는 한편, 머릿속으로 그림자 녀석에게 의견을 구했다.
-내가 전하는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거로 하지.
‘알겠어.’
그렇게 나는 그림자 녀석에게 전해 들은 오윤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사정부터, 내가 그녀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여태 숨겨 왔던 이유까지.
그림자 녀석이 알려 주는 정보에 내 나름의 살을 덧붙여 설명했다.
진태진 교관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내가 풀어 놓은 이야기에 생각이 깊어진 듯.
“…….”
진태진 교관은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기를 수 분.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