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죽어 주셔야겠네요, 태진 교관님
C반을 지켜야 할 이은애 교관이 쓰러진 순간.
‘지금쯤이면 괜찮겠지.’
김한석은 다음 행동으로 넘어갈 타이밍을 가늠하며 주위를 살폈다.
담임 교관을 잃은 C반의 생도들은 물론, B반의 생도들까지 그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를 확인하고 난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근처의 폭주한 몬스터 무리를 조종해서 스스로를 덮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크윽……!”
녀석들로부터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해 버린 척, 고통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이는 완전한 절망까지 한걸음 남겨 둔 생도들의 패닉을 한층 가속화시키기 위한 연출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꺄아악! 교관님이!”
“교, 교관님……!?”
B반, C반 할 것 없이 근처의 모든 생도들이 반응했다.
새파랗게 질린 채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다.
김한석은 쓰러지는 시늉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생도들을 지켜봤다.
하나 모든 이들이 절망에 휩싸인 건 아니었다.
“얘들아, 침착해! 아무리 폭주한 녀석들이라 해도 D+급 수준이야!”
이변을 일으킨 순간부터 총기를 잃지 않은 채 생도들을 통솔하던 백유진.
그리고 C반 소속의 두 명까지 총 세 명이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오윤서! 저쪽을 부탁한다!”
“이잇,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 했거든?!”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전장의 한복판으로 달려드는 한 쌍의 남녀, 다름 아닌 심인욱과 오윤서였다.
이 셋은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전교에서 언제나 수위에 꼽혔다.
그렇기에 김한석이 일찍이 먹잇감으로 삼고 접근했으나, 원인 모를 이유로 실패했다.
그래서일까.
‘역시 세 명 모두 훌륭하네.’
김한석은 더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처절하기까지 한 항전을 지켜봤다.
과연 저들의 눈빛에 서린 투지가 언제쯤 꺼질 것인지.
언제쯤 절망으로 물들어 다시 한번 마음의 틈새가 벌어질지.
한참을 그렇게 주시했건만 그들의 의지는 쉬이 꺾이지 않았다.
‘……정말로 놀라운걸?’
비단 폭주한 몬스터를 처리하는 무력뿐만이 아니었다.
쓰러진 생도들을 지키거나, 남아 있는 생도들을 통솔하는 등.
이는 김한석의 상상을 뛰어넘는 활약이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괜히 희망을 품게 됐다간 지금까지의 수고가 전부 물거품이 될 테니까.’
이제는 다시금 상황을 반전시켜야 할 때였다.
김한석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으나,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서서히 살아나던 희망의 불씨가 한순간에 꺼져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이 또한 아주 볼 만한 광경이 될 터였다.
김한석은 진한 미소와 함께 품속의 펜던트를 매만졌다.
그러자 희미한 빛무리와 함께 주위의 안개가 요동쳤다.
“꺄앗! 뭐, 뭐지?!”
“지형이 바뀌고 있다……? 오윤서, 유진! 이쪽으로!”
두 사람, 오윤서와 심인욱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또 다른 이변에 대비해 셋이 뭉쳐서 대응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림없지.’
김한석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훤히 읽고 있었다.
때문에 세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갈 틈도 없이 제각기 안개에 휩싸여 버렸다.
“인욱아! 윤서……!”
백유진의 외침이 안개에 뒤섞여 아득해지는 걸 마지막으로 셋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로써 저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악전고투를 지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전부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남게 될 터였다.
‘실로 완벽하다.’
김한석은 진한 미소와 함께 슬슬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산산이 흩어진 채 안개 속에서 분투를 벌이는 생도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한편.
다음 목표물인 A반, 특히 진태진 교관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찾아낸 순간.
“……호오.”
김한석은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흘렸다.
진태진 교관이 공교롭게도 이쪽을 향해 이동 중인 까닭이었다.
때마침 잘됐다는 생각과 더불어 김한석은 추가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A반에는 그 아이가 있었지.’
안일한. 그 아이가 바로 A반 소속이었다.
더하여 A반에는 윤설하와 차은월이란 천재들도 함께 있었다.
때문에 김한석은 기대감과 함께 A반이 다가오길 기다리며 쓰러져 있는 이은애의 근처로 다가갔다.
진태진 교관을 낚기 위한 연출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자, 어떤 식으로 그림을 그려 볼까.’
즐거운 마음으로 계획을 다듬는 사이, 안개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A반의 접근에 대비하여 미리 안개를 옅게 해 둔 까닭인지.
저벅 저벅-
여러 명의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김한석은 그들과의 간격을 가늠하며 슬슬 몬스터 무리를 주위로 불러들였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진태진 교관님, 저쪽에 김한석 교관님과 이은애 교관님이 쓰러져 있으세요……!”
진태진이 A반 생도의 무리를 이끌고 나타났다.
무리라고 해 봐야 열 명 남짓으로, 이곳까지 이르는 와중에 상당수가 낙오된 모양이었다.
때문에 진태진은 물론, 뒤따르는 생도들의 표정도 상당히 어두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디 보자……, 저기 있구나.’
김한석은 오직 한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진태진의 곁에 있는 안일한을 발견하고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여태 낙오되지 않고 이 자리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앞선 세 명의 인재들처럼 안일한이 실시간으로 절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김한석은 그리 생각하며 슬슬 연기에 돌입했다.
“태, 태진 교관님! 은애 교관님의 상태가 지금……!”
다급한 어조로 소리치자 진태진은 한층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빠르게 간격이 좁혀지는 가운데, 김한석은 속으로 타이밍을 가늠했다.
진태진이 다가오기 직전에 몬스터 무리로 하여금 습격할 속셈이었다.
‘그리고 몬스터 무리를 섬멸할 타이밍에 맞춰 재우면 되겠지.’
그 정도로 가닥을 맺을 무렵, 진태진과의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다.
따라서 김한석은 근처의 안개 너머에 배치해 둔 몬스터 무리를 불러들였다.
크륵-!
키에에엑!
폭주한 몬스터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안개를 뚫고 등장했다.
진태진은 이를 인지한 순간.
스윽-
손에 쥔 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이어서 그는 몬스터 무리의 한복판으로 한 줄기 섬전과도 같이 뛰어들었다.
스-걱!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일격에 두세 마리를 쓸어버리는 진태진.
그 모습에 김한석은 나직하게 탄성을 흘렸다.
‘여전히 전장의 매라는 이명에 부족함이 없는 솜씨를 갖고 계시는구나.’
소싯적 4대 길드 중 한 곳, 스페셜리스트에 전투 초인으로 몸담은 이력을 가진 진태진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그의 공세는 매섭고, 날카로웠다.
단순히 전투뿐만 아니라 그는 남아 있는 생도들의 안위도 틈틈이 신경 썼다.
빈틈없는 모습에 김한석은 계획을 좀 더 촘촘하게 구상했다.
‘이번 전투가 마무리됐을 때를 노려보고, 만일 여의치 않으면 A반 생도들을 흔드는 방향으로…….’
머릿속으로 계획을 다듬는 사이.
스걱-!
진태진은 마지막 한 녀석의 목을 베어가르며 순식간에 전투를 끝냈다.
그는 뺨에 튄 몬스터의 혈흔을 닦아낼 틈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보아하니, 이은애의 상태를 살피는 게 최우선이라 여기는 듯했다.
김한석은 코어를 활성화시키는 한편, 표정을 가다듬으며 소리쳤다.
“태진 교관님, 은애 교관님이…….”
빈틈을 만들어내고자 무어라 설명하려는 찰나.
꾹 다물린 진태진의 입이 빠르게 열렸다.
그로부터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양이 완전히 추락하는 날.”
이는 김한석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듣는 순간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언령, 아뿔싸!’
경악 속에 김한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갔다.
그것과는 별개로 저항할 수 없는 언령의 힘으로 인해 저절로 입이 열렸다.
“새로이 거듭날 시대의 주인이 되리니……!”
대답을 끝마친 순간.
파직-!
진태진이 섬전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짓쳐들었다.
동시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격을 흩뿌렸다.
이에 김한석은 가까스로 품속에서 오브를 꺼내 들었다.
카가가강-!
아슬아슬하게 방어 마법을 전개하여 막아 낸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코어를 미리 활성화시켜 둔 덕분이었다.
그 사실에 안도할 틈도 없이 김한석은 마탄 수십여 발을 정면에 흩뿌렸다.
콰앙-! 쾅!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길 바랐건만. 역시 당신이 범인이었군, 김한석.”
서늘하고 차가운 목소리, 다름 아닌 진태진이었다.
그의 뉘앙스에는 이미 김한석이 범인일 거라 단정 짓고 있음이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진태진은 그의 정체를 꿰뚫어 본 건지.
아니, 그 전에 언령은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건지.
김한석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지금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때문에 그는 연기 따윈 집어치우기로 결정했다.
“하하, 태진 교관님. 이거 놀랍네요! 정말로요!”
“뭐가 우습지? 이젠 가면 따윈 집어 던지기로 마음을 먹었나?”
김한석은 경멸이 느껴지는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어요? 언령까지 들킨 마당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올해는 정말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요.”
김한석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네 녀석.”
태연자약한 그 모습에 진태진의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한석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 갔다.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죽어 주셔야겠네요, 태진 교관님.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진심이에요!”
평소와 다름없는 싱글거리는 말투와 표정.
하지만 김한석의 눈빛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고오오-
검보랏빛 아우라를 접한 순간, 진태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A급……. 네 녀석, 역량도 속이고 있었나?”
“맞아요, 태진 교관님. 반면 당신은 정직하게 B급이고요. 내 말이 맞죠?”
진태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바투 잡으며 전투태세를 취할 뿐이었다.
“하하, 한결같아서 좋네요! 어디 그럼 막아…….”
김한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태진이 짓쳐들었다.
섬전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 다름 아닌 섬전칠보였다.
파직-!
진태진은 시퍼런 잔상을 남기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의 움직임에 김한석은 다시금 마나를 끌어올렸다.
방어 마법, 그리고 후속타를 위한 공격 마법이었다.
쩌엉-!
콰앙-! 쾅!
순식간에 시작된 교전 속에서 두 사람의 위치는 시시각각 변해 갔다.
그 결과 김한석은 본래 있던 자리에서 한참 멀어졌고, 반대로 진태진은 이은애를 등지고 서게 됐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김한석은 탄성을 터뜨렸다.
“호오, 이런 상황에서도 은애 교관님을 생각하고 계실 줄이야. 이건 조금 놀라운데요?”
진심과 빈정이 뒤섞인 말에 진태진은 일말의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안일한 생도. A반 인원들을 이끌고 이쪽으로. 이은애 교관과 함께 부탁하지.”
여태 숨죽이며 두 사람의 교환을 지켜보던 생도들.
진태진은 그중에서도 안일한을 콕 짚어 지시를 내렸다.
그제야 김한석은 새삼스럽게 A반 생도들의 존재 여부를 인식했다.
‘……나 정도 되는 프로가 고작 언령 따위에 휘둘릴 줄이야. 이래서야 사도 실격이네.’
김한석은 순순히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했다.
그러고는 생도들을 활용하여 진태진을 몰아붙일 수를 계산하는 한편.
무표정으로 지시에 따르는 안일한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아이도 죽여야 하다니. 아니지, 우선 이지를 상실케 만들고 그다음 활용하는 방법을…….’
혼자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계속 그렇게 딴생각에 빠져 있어라.”
진태진이 전조도 없이 짓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