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우선은 흑영신보(黑影神步)부터
다음날, 7교시.
2학기 기말 과정의 첫 실기는 진태진 교관이 아니라 고태식 교관의 수업으로 진행됐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가상 레이드는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따라서 당분간 실기 수업은 무기별 전담 교관의 지도하에 진행되며, 무기에 따라 교대로 레이드 수업을 진행한다.”
단일 전투로 끝나는 가상 전투와는 다르게 레이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까닭이었다.
때문에 2학기 기말의 실기 수업은 전부 무기별 전담 교관이 수업을 전담했다.
즉, 당분간 실기는 쭉 고태식 교관의 수업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더하여 다른 이들이 가상 레이드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나머지는 무기술 심화 수업을 받는 식이었다.
운 좋게 내가 속한 건틀렛 반은 첫 번째로 가상 레이드 수업에 임하게 됐다.
“자, 다들 알아들었지? 지금 바로 3층 가상 전투실로 이동한다!”
고태식 교관의 지시에 생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가상 전투실을 향했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어젯밤 꿈속에서 그림자 녀석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우선은 흑영신보(黑影神步)부터 체득해 보자.’
김한석과의 결전에 앞서 그림자 녀석은 약속대로 내게 두 가지 무공을 전수해 줬다.
나는 그중에서 흑영보의 상위 호환 격 스킬이라 할 수 있는 흑영신보만 체득할 셈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머지 하나는 공개된 자리에서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까.’
김한석의 숨통을 끊을 비수가 될 거라면서 때가 되기 전까진 품속에 숨겨 놓으라던 스킬.
그 무공의 명칭은 항마멸인장(降魔滅印掌)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손바닥을 활용한 전투 방식이 주가 되는 장법이었다.
명칭부터 범상치 않은 데다가 흑영신보와 더불어 항마멸인장의 등급 또한 S급이라 했다.
때문에 위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지만 꾹 눌러 참았다.
‘쓰임새가 상대적으로 입체적인 벽뢰수와는 달리 항마멸인장은 철저히 공격 위주의 무공이라 했으니.’
지난번처럼 따로 고태식 교관에게 개인 교습을 청하지 않아도 혼자서 익힐 수 있을 터였다.
늦은 저녁 시간의 무기 훈련실이라면 사람도 별로 없을 테니, 그때 익히면 괜찮을 듯싶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다음, 이쪽으로!”
어느새 내 차례가 다가왔다.
고태식 교관은 나를 포함 다섯 명의 생도를 향해 수업 방식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시뮬레이션 룸의 설정을 가상 전투에서 레이드로 바꾸고, 게이트의 등급은 D급으로 설정해라. 보스 몬스터의 경우 D+급이니 알아두도록. 질문 있나?”
특유의 거친 목소리에 생도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시뮬레이션 룸으로 입장할 것을 재차 지시했다.
설명대로 가상 레이드로 변경한 다음, 등급을 설정하고 장비를 착용했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현실감 넘치는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진짜 게이트 내부의 필드를 보는 느낌이네.’
울창한 숲과 무성한 수풀, 그리고 그 너머에서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고블린들까지.
마치 이전에 게이트 현장 실습 때 접했던 풍경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생동감 넘치는 감각 속에서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동시에 기억을 더듬어 흑영신보의 동작과 구결을 떠올렸다.
‘오전에 구결을 미리 외워 두길 잘했네.’
각 초식의 형(形)과 개수까지 동일한 만큼 동작은 곧장 기억이 났다.
뿐만 아니라 구결도 반복해서 외워 둔 덕분에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지체할 이유도 없겠다, 나는 바로 흑영신보의 자세를 취했다.
스윽-
양발을 기괴한 각도로 내딛고, 보폭을 벌렸다.
그 상태에서 망설임 없이 첫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고블린들이 반응한 건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키에엑!
케룩-!
총 여섯 마리에 달하는 고블린들이 흉포한 기세로 달려드는 가운데.
나는 개의치 않고 흑영신보의 형(形)을 재현했다.
애초에 보법인 만큼 초식을 재현하는 것만으로 회피도 가능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녀석들의 공세를 피하며 구결에 몸을 맡겼다.
무아지경 속에서 깨어날 무렵.
‘……완성됐다.’
흑영신보의 체득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나는 달려드는 고블린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며 스킬을 확인했다.
-흑영신보(S)
스킬 목록에는 C급 흑영보 대신 S급 흑영신보가 새겨져 있었다.
이전의 혼원현천신공을 체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스킬이 대체된 것이다.
거기까지 확인하고는 상태창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취했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도 괜히 주목을 받을 테니.’
가상 레이드를 진행하면서 성능을 확인할 셈이었다.
가닥을 잡은 즉시 나는 흑영신보를 발휘했다.
그 순간.
스스스-
전신에서부터 칠흑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단순히 온몸이 그림자에 뒤덮이던 흑영보와는 또 다른 현상이었다.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기대와 함께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이.
자욱하게 뿜어져 나온 칠흑빛 기운이 근처를 뒤덮었다.
‘……이건.’
내게서 비롯된 기운이 마치 안개처럼 수풀을 뒤덮었음을 인식하는 한편.
현재 내 상태가 어딘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감각이 평소 이상으로 확장됐고, 육체와 정신이 유리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제야 나는 흑영신보의 효과를 깨달았다.
‘설마 내가 안개와 한 몸이 된 건가?’
흑영신보에서 비롯된 안개 그 자체가 된 것이다.
그 증거로써 칠흑빛 안개 속에서 두리번거리는 고블린 녀석들의 호흡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허공을 유영하는 듯한 기분 속에 한번 움직여 봤다.
마음을 먹자마자 순식간에 내 위치가 변했다.
‘이게 S급 보법인가…….’
그림자에 뒤섞여 유영하듯 움직이는 흑영보도 상당히 놀라웠으나, 흑영신보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안개와 한 몸을 이룬 덕분인지, 녀석들의 공세는 내게 통하지 않았다.
아무런 소용없이 칠흑빛 기운을 흩어 놓을 뿐이었다.
나는 감탄과 함께 이번에는 공격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녀석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슈와아앗-!
근처의 안개가 나를 향해 급속도로 밀려들었다.
아니, 차라리 칠흑빛 기운이 다시금 나의 형상을 이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감각을 속속들이 갈무리하며 고블린을 향해 복마구권을 펼쳤다.
콰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한 녀석이 그대로 찌그러졌다.
거기에 반응한 건지, 나머지 고블린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스스스-
흑영신보를 펼치자 또다시 내 몸은 안개화를 이뤘고, 녀석들은 나를 찾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그 상태에서 나는 한 마리씩 차분하게 처리하며 데이터를 갈무리했다.
‘일단 나를 특정하지 못하는 이상 공격도 통하지 않는 것 같긴 한데.’
사람을 대상으로도 통용될지는 직접 확인해 봐야 할 듯싶었다.
만일 가능하다면 이는 엄청난 이점으로 작용할 터였다.
하지만 장점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안개화, 이거 마나를 엄청 잡아먹네.’
맨 처음 흑영신보를 발휘했을 때와 다르게 칠흑빛 안개 상태를 유지하자 마나 소모가 극심했다.
그나마 혼원현천신공의 묘리를 깨우쳤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제대로 활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스텟 단련에 집중하라고 했던 건가?’
그런 식으로 세세하게 데이터를 수집하는 사이.
케룩……
마지막으로 남은 한 녀석까지 피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나는 녀석들이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흑영신보가 이 정도라면…….’
과연 항마멸인장의 위력과 효과는 어느 정도일지.
기대가 되는 한편, 새삼스럽게 아쉬웠다.
‘뭐, 조만간 기회가 있을 테니까.’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계속해서 레이드를 진행했다.
…
…
…
잠시 후.
D+급에 해당하는 보스 몬스터의 사냥을 끝으로 가상 레이드가 종료됐다.
시뮬레이션 룸을 빠져나온 순간, 고태식 교관이 입가를 비틀며 나를 맞이해 줬다.
“애송이, 네 녀석은 변함없이 재밌는 것들을 배워 오는구나.”
아무래도 내가 흑영신보를 체득하고, 실전에서 시험한 것까지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대답하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심인욱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보법인가.”
심인욱 역시 내 움직임이 달라졌음을 한눈에 알아차린 듯했다.
동시에 그의 눈빛은 호승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생각했다.
‘어차피 사람을 상대로 위력을 확인해 봐야 했으니까.’
심인욱 정도면 흑영신보의 위력을 제대로 확인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상대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번 수업이 끝나면 8교시는 무기술 심화 수업이 진행될 터였다.
때마침 좋은 기회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심인욱에게 말했다.
“다음 수업 시간에 한번 붙어보자.”
“대련을 통해서 연습할 셈인가? 좋은 생각이다.”
심인욱은 눈빛에 서린 호승심을 증명하듯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대화를 일단락 짓고 난 다음,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속으로 정리했다.
‘이걸로 흑영신보의 수련은 충분할 것 같고. 그렇다면 다음은…….’
지난밤에 떠올렸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야 했다.
다름 아닌 김한석을 보다 확실하고, 안정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 만한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방과 후에 찾아가면 되겠지.’
머릿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리는 한편,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 *
8, 9교시가 무기술 심화 수업으로 진행된 가운데.
나는 심인욱과의 대련을 통해 흑영신보를 낱낱이 파악했다.
덕분에 유의미한 데이터를 얻었을 무렵.
“수업은 이걸로 끝이다. 내일도 비슷하게 흘러갈 테니, 그리 알아 둬라. 다들 저녁 맛있게 먹도록, 이상이다!”
9교시를 끝으로 오늘 하루의 수업이 모두 끝났다.
“고생했어.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어.”
“이하동문이다.”
나는 수업 시간 내내 대련에 어울려준 심인욱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며 숨을 돌렸다.
그러고는 임강철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는 대신.
“오늘은 먼저 먹어. 나 행정실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임강철에게 양해를 구하고 행정실을 향했다.
지난밤 그림자 녀석과의 대화 도중에 떠올린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지금쯤이면 행정실에 계시겠지?’
한 사람을 떠올리며 걸음을 서두르는 한편, 부디 김한석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사이 행정실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내부를 확인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김한석은 없고, 진태진 교관님은 계시네.’
되도록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김한석은 자리에 없었다.
반대로 내가 행정실을 찾은 목적이나 다름없는 진태진 교관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행정실에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나직하게 인사를 건네자 진태진 교관이 특유의 무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내게 알은척을 했다.
“안일한 생도, 행정실에 용무가 있나?”
“네, 교관님께 상담을 좀 받고 싶어서요.”
나는 대답과 함께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에 진태진 교관은 일순 표정을 굳히더니, 내게 자리를 권했다.
동시에 내게 질문을 건네왔다.
“상담이라, 무엇을 상담받고 싶은 거지?”
그의 물음에 나는 지체 없이 목적을 밝혔다.
“제가 가진 미구현 특성에 관한 상담입니다.”
“……그간 새로운 일이 있었나?”
“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진태진 교관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하나가 더 있다?”
“네. 지난번 제가 병실에 있었을 때 기억하십니까?”
“병실이라면……, 여름방학에 있었던 게이트 실습 참사 이후를 말하는 거로군.”
“맞습니다. 그 당시 교관님이 제게 말씀해 주신 내용에 관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거라면.”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진태진 교관의 낯빛은 진지함을 넘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내 목적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대화를 나눠야 했다.
‘진태진 교관님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계획의 확실성과 안정성을 더해 주실 테니까.’
이를 위해서라도 먼저 진태진 교관의 흥미를 끌어내야 했다.
나는 그런 일념으로 생각해 둔 내용을 꺼내 들었다.
“오윤진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진태진 교관이 두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