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맞붙는 것, 그리고 제거하는 것
“얼마나 잘난 무공을 얻었는지, 내 눈으로 철저히 확인해 줄 테니 어디 한번 보여 봐라.”
백유성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을러대는 한편, 손에 쥔 창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이는 신창백가의 가전무공, 창룡격의 기수식이었다.
그 모습에 백유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장기전으로 가면 필패(必敗)다.’
백유성은 백유진의 두 살 터울의 형이었다.
2살이라는 나이 차에 따른 스텟의 차이는 쉽게 메울 수 없는 요소였다.
더욱이 백유성은 천재는 아닐지언정 수재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러니 대련이 길어질수록 백유진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스텟부터 역량, 심지어 주력 무공의 등급까지.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백유진이 우위를 점했다고 보기 힘든 가운데. 딱 한 가지, 이점이 존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보의 격차였다.
‘난 창룡격의 대부분을 꿰고 있지만.’
반대로 백유성은 분광십삼뢰에 관한 정보가 전무했다.
백유진은 바로 그 점을 파고들 셈이었다.
‘최대한 단기 결전으로, 그것도 가급적이면 10합 이내로 끝낼 수 있게끔.’
상대가 바보가 아닌 만큼, 대련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정보 격차에 따른 이점은 사라질 터였다.
그러니 백유성이 분광십삼뢰에 적응하기 전에 대련을 끝내야만 했다.
백유진은 그 정도로 계획을 정리하며 본격적으로 코어를 활성화시켰다.
고오오-!
구룡진기 특유의 청록색 마나가 창날을 뒤덮는 가운데.
“흥.”
백유성 또한 마찬가지로 마나의 유형화를 이뤄냈다.
그 상태로 말없이 대치하기를 수 초.
먼저 움직인 쪽은 백유진이었다.
타닷-
도약하듯, 보폭을 크게 넗히며 짓쳐드는 가운데.
백유성은 축발을 뒤로 빼며 격돌에 대비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간격에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을 내질렀다.
후-웅!
공기째 짓뭉개 버릴 기세로 날아드는 백유성의 창.
초반부 초식이었으나 절초를 연상케 할 정도로 묵직하고 위력적인 일격.
이는 창룡격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반면.
휘익-!
백유진의 창은 백유성의 일격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워 보였다.
맞닥뜨리는 순간, 창은 물론 백유진까지 튕겨져 나갈 것만 같은 수준 차이였다.
그래서일까, 백유성의 눈빛에 진한 실망감이 서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벌떼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백유진의 창끝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순식간에 창끝이 세 갈래의 빛살로 나뉘었다.
이를 보는 순간 백유성은 두 눈을 부릅떴다.
“……!”
그가 반응하는 와중에도 세 줄기의 섬전은 각기 다른 궤적으로 쇄도해 갔다.
두 줄기는 창룡격의 궤도를 비틀었고, 나머지 한 줄기는 그대로 백유성을 노리고 짓쳐들었다.
백유진이 노리는 바를 인식한 순간.
“어림없다!”
백유성은 단호한 목소리로 기합성을 터뜨리며 진각을 밟았다.
동시에 창을 풍차처럼 횡으로 휘둘렀다.
전방을 부채꼴 형태로 쓸어버린 순간.
쩌-엉!
어마어마한 기파와 함께 진한 청록색 참격이 발출됐다.
백유성의 반격에 맞서 백유진은 침착하게 운룡신보를 전개했다.
특유의 허공을 노니는 듯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백유진은 다시 한번 창을 내질렀다.
휘릭-!
곧게 뻗어 나가는 한편, 또다시 백유진의 창끝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언뜻 잡아도 십여 갈래에 이르는 청록색 섬광이 백유성의 시야를 뒤덮었다.
빠르고 현란한 일격은 허초와 실초의 구분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백유성은 혀를 짧게 찼다.
“……칫.”
그러고는 정면에서 받아내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크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 다음에야 반격을 위한 자세를 취했다.
마치 압도적인 위력으로 찍어 누르려는 양, 그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화아아앗-!
일순간 백유성의 어깨 위로 짙푸른 창룡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대로 녀석의 공세를 흩어 버리면 소강상태에 접어들 터였다.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도 확인했으니.’
재정비 이후 다시 맞붙는다면, 확실하게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유성은 판단 즉시 창을 내질렀다.
그의 창끝에서부터 청록색 용의 형상이 파괴적인 기세로 발출됐다.
창룡의 형태를 띤 참격은 수십 갈래로 나뉘었던 섬광을 일거에 소멸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지금이 승부처.’
오히려 백유진은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반대로 여기서 템포가 끊긴다면 더 이상 가망이 없을 거란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즉, 어떤 식으로든 다음 합에서 승부의 향방이 드러날 것이다.
판단 즉시 백유진은 실초 위주로 공세를 흩뿌리며 충격에 대비했다.
카가가가강-!
요란한 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오는 가운데.
백유진은 충격에 따른 반발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착지했다.
그러고는 자세를 바로 하며 정면으로 창을 내질렀다.
“흐읍!”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창끝.
그로부터 청록색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이윽고 커다란 와류의 형태를 이루더니, 그대로 백유성을 향해 쇄도해 갔다.
분광십삼뢰의 절초라 할 수 있는 후반부 초식이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
백유성은 표정을 굳히며 빠르게 창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어디 한번 막아 봐라!”
창룡격의 절초로 응수했다.
다시 한번 창룡의 형상이 나타나 창끝으로부터 쏘아져 나갔다.
서로 다른 두 절초가 맞닥뜨린 순간.
쩌-엉!
충돌 지점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청록색 마나의 파편이 격렬하게 튀는 가운데.
“……크윽!”
백유진은 항거할 수 없는 힘 앞에 주르륵 밀려났다.
그 모습에 백유성은 노호성을 터뜨렸다.
“고작 그 정도 무공을 가지고 네 녀석은……!”
질책을 쏟아내려는 찰나.
쌔애애액-!
느닷없이 백유진이 내지른 창끝이 요동쳤다.
서로의 창이 맞닥뜨린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비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백유성의 일격을 저지하던 힘이 분산됐다.
이대로 가다간 창룡의 형상을 띤 참격에 백유진이 난도질당할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 순간.
타닷-
백유진은 참격을 향해 부나방처럼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무모한 행동이었다.
“……!”
예상을 벗어난 움직임에 백유성은 두 눈을 부릅떴다.
반면 백유진은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결코 피할 수 없을 만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츠즈즛-
한 발짝 크게 내디뎌 보폭을 미친 듯이 넓히며 상반신을 완전히 뒤로 젖혔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참격의 피해 반경을 벗어났다.
이어서 백유진은 다시금 오른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흐읍!”
그대로 백유성을 향해 창을 찔러넣은 것이다.
그제야 백유진의 노림수를 깨달은 백유성은 다급하게 뒷걸음질을 쳤다.
“……크윽!”
그 상태에서 어떻게든 걷어내려 창을 회수했을 때.
쐐애애액-!
눈앞이 수십 갈래의 섬광으로 뒤덮였다.
백유성은 이를 악문 채 창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채채채챙-!
잇달아 금속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어느 순간 양측의 공세가 멎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허억, 허억, 허억!”
백유진의 창끝이 백유성의 목덜미 앞에 멈춰 서 있는 까닭이었다.
마치 난도질이라도 당한 듯, 백유성은 뺨이나 목덜미에 가느다란 혈선이 새겨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의복은 이리저리 찢겨나가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그를 향해 백유진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쯤 봤으면 충분히 알겠지. 이게 내가 택한 무공이자 내 길이라는 걸.”
단호한 결의가 묻어나는 말에 백유성은 백유진을 곁눈질했다.
그의 의복은 오히려 백유성, 그 자신보다 심한 상태였다.
완전히 넝마가 됐고, 그 너머의 흉근과 복근은 피칠갑이라도 한 것처럼 피로 뒤덮여 있었다.
즉, 마지막 일격을 위해 피해를 불사한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가닿은 백유성은 한숨과 함께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공의 이름이 뭐지?”
“분광십삼뢰.”
“……훌륭했다. 보고는 내가 할 테니, 너는 상처부터 치료해라.”
백유성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백유진, 그가 이겼다는 것.
마침내 자신의 길을 증명해 냈다는 뜻이었다.
‘……내가 이겼어.’
드디어 증명해 냈다.
백유진은 뒤늦게 밀려드는 승리의 여운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반면 백유성은 미련없이 돌아서서 그대로 대련실을 빠져 나갔다.
백유성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백유진은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서 있었다.
그 사이.
스르륵……
체내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미혹의 기운이 서서히 옅어져 갔다.
* * *
시간이 흘러 일요일, 저녁 무렵.
나를 찾아온 백유진을 향해 가장 먼저 건넨 말은 다름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런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백유진의 상태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양 팔뚝, 그리고 목덜미까지 붕대를 감아 둔 건 물론.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고된 지, 그는 벽에 상체를 기댄 채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명백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백유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냥 좀, 요란하게 한판 벌이고 왔거든.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보였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일은 잘 해결됐어?”
백유진이 이전에 언급한 ‘자신의 방식을 증명할 방법’에 관한 문제였다.
내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그건 다행이네.”
나는 탄성과 함께 그리 대답했다.
신창백가의 어른들은 내 생각보다 융통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감상을 떠올리는 한편, 혼원현천신공을 운용하며 전신의 감각을 예리하게 일깨웠다.
오윤서 때와 마찬가지로 환영 마법의 기운을 살피려는 것이다.
그 결과.
‘……환영 마법의 기운이 상당히 약해져 있다.’
환영 마법 특유의 불길한 색채가 상당히 옅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인식하니 새삼스럽게 백유진의 문제가 해결됐다는 사실이 실감됐다.
감상에 잠겨 있을 때.
“생각해 둔 소원 있어?”
백유진이 소원을 언급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또 한번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천천히 생각해 봐. 반드시 들어줄 테니까.”
“그럴게. 그보다 너 좀 더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그러려고. 조금 피곤하네.”
용건은 단지 그뿐이었는지, 백유진은 손을 내저으며 돌아섰다.
“그럼 내일 보자.”
인사를 마지막으로 백유진은 떠나갔다.
나는 잠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이걸로 백유진의 문제도 해결됐다.’
윤설하를 시작으로 백유진에 이르기까지.
김한석이 노리고자 하는 이들의 문제를 전부 해결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비를 끝마쳤을 뿐이지.’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마주해야 할 일은 다름이 아니었다.
환영 마법사, 김한석과 맞붙는 것, 그리고.
‘……제거하는 것.’
그림자 녀석의 예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결코 어쭙잖은 대처로 끝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그림자 녀석의 성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일절 주저함이 없어 보였으니까.’
물론 아직까진 내가 직접 김한석과 맞붙게 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도 마음의 준비를 갖춰야 할 듯싶었다.
‘여태까지는 어떻게든 됐어.’
그렇다면 과연 다음 대책은 무엇일지.
녀석이라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생각해 둔 바가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
…
잠시 후.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40%]
-[????의 그림자]가 연륜의 일부가 깃든 분별력과 미래시(未來視)의 편린이 담긴 기억, 그리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