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일한이 너, 눈썰미가 좋구나?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백유진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싱글거리는 낯빛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스스럼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다 만나네?”
변함없이 친화력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표정이나 간간이 마주쳤을 때 보이는 행동거지를 보면 도저히 문제가 있단 생각은 들지 않는데.’
최초로 문제를 해결한 윤설하부터, 가장 최근에 마무리 지은 오윤서에 이르기까지.
친구들을 포함해서 여태 문제를 해결하느라 엮인 이들은 대부분 티가 났다.
그들의 표정과 비교하면 백유진은 평소와 다르지 않음은 물론, 심지어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표정 관리를 잘한다? 그게 아니라면 속내를 숨기는 데 능숙한 건가?’
때아닌 의문에 고개를 기울이고 있을 때.
“수행평가 연습 중이었어?”
백유진이 재차 내게 물어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 너는?”
“음, 비슷하려나? 몸 좀 풀려고 왔거든.”
백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오른손에 든 창을 내밀었다.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창이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보급용 무기였으나, 백유진이 들고 있으니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문득 그의 사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전무공을 거부했다는 건 주력으로 사용하는 무공이 아예 없다는 건가? 그럼 어떤 식으로 싸우는 거지?’
의문과 함께 호기심이 동했다.
한번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찰나.
“구경할래?”
별안간 백유진이 내게 권유했다.
뜻밖의 제안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괜찮겠어?”
타인의 무공 내지는 전투를 지켜보는 건 굳이 따지자면 민감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이는 금기까진 아니어도, 사람에 따라 실례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차 물어봤으나, 백유진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예전에 지켜본 적 있으니까.”
“예전? 아.”
그의 대답에 뒤늦게 생각이 났다.
분명 1학기 때, 느닷없이 백유진이 내게 흑영보에 관해 질문했었다.
‘그다지 신경 안 썼는데.’
그런 속내와는 별개로, 백유진의 권유는 내 입장에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이는 개인적인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건 물론.
혹시 모를 대립에 앞서 백유진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때문에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유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볍게 다녀올게.”
그 즉시 백유진은 시뮬레이션 룸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입구 쪽에 마련된 홀로그램 화면에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동시에 몬스터 무리가 출현했다.
‘홉 고블린 다섯 마리라……. 기왕 하는 김에 수행평가처럼 연습하려는 건가?’
나와 같은 조건이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감을 떠올리는 순간.
타닷-
백유진이 지면을 박차고 쏘아져 나갔다.
나는 최대한 집중력을 끌어올린 채 그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소요 시간은 결과로 알 수 있을 테니, 우선은 움직임과 전투 스타일에 집중하자.’
과연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창술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전투를 벌일지.
또한 그런 조건으로 어떻게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학기 수석을 차지했는지.
이런저런 의문을 떠올리는 가운데.
‘……저건.’
때마침 백유진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표홀하면서도 날카로운 걸음걸이.
다름 아닌 보법이었다.
‘삼재보는 아닌 것 같고. 스킬이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보네.’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갈무리하는 한편.
그가 선보인 보법의 성능을 가늠하고자 안력을 끌어올렸다.
때마침 백유진이 본격적으로 마나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백유진의 속도가 가일층 빨라졌다.
동시에 그의 하체가 청록색 마나로 뒤덮였다.
본격적으로 보법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타앗-!
그의 도약력은 물론, 체공 시간이 길어졌다.
그 상태로 백유진은 공중에서 폭격하듯, 선두에 있던 홉 고블린을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휘익-!
단순하고, 직선적인 일격.
하나 속도가 상당한 까닭에 유효타로 들어갔다.
이를 시작으로 백유진은 그야말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창룡이 허공을 노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게 바로 백유진이 가진 보법인가.’
내가 가진 흑영보와도 다르고, 심인욱의 패왕진군보와도 달랐다.
때문에 감탄이 절로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전투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확실히 가전무공을 거부했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네.’
깊이가 느껴지는 회피 기동과는 달리, 그의 공세는 상당히 단조로운 편이었다.
비유하자면 그의 창술은 건틀렛으로 치면 기초 권법에 해당하는 육합권을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일까.
‘저 움직임에 그림자 녀석이 알려 준 분광십삼뢰가 더해진다면…….’
자연스럽게 보는 것만으로도 깊이와 위력이 느껴졌던 무공, 분광십삼뢰가 떠올랐다.
과연 백유진이 제대로 된 창술을 갖추게 된다면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 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피가 끓어올랐다.
창술의 부재가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백유진의 실력은 뛰어났다.
‘실시간으로 약점을 파악하는 안목은 물론이고, 그냥 움직임 자체가 남다르네.’
이전에 윤설하와 손을 섞으며 느꼈던 바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천재성은 눈에 보이는 무력이 아니라 디테일에서 진가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감탄과 함께 완전히 몰입해서 지켜보는 사이.
“후우, 개운하네.”
어느새 백유진은 전투를 끝마치고 시뮬레이션 룸에서 나왔다.
나는 곁눈질로 그의 점수를 파악했다.
A랭크, 고득점이었다.
소요 시간으로 인한 실점을 제외하면 완벽한 점수였다.
‘성적 자체는 내가 더 높지만.’
나한텐 치트에 가까운 ‘경험 계승’이 있었다.
즉, 제대로 된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어땠어?”
백유진이 내게 감상을 물어왔다.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순간 고개를 기울였다.
수련을 보게끔 권유한 점은 그렇다 쳐도, 평가를 요청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까닭이었다.
‘……고작 한두 번 인사를 나눈 사이인데.’
개방적인 성격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친구가 많은 이들은 보통 이렇게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건지.
온갖 시답잖은 생각이 잇달아 떠오르는 가운데, 백유진이 웃으며 덧붙였다.
“음,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인욱이나 윤서, 둘 다 내 친구거든?”
“그건 알고 있어.”
“근데 너와 엮이고 나서 뭔가 표정도 좋아지고, 컨디션도 괜찮아진 것 같아서. 비결이 있나 싶었거든.”
백유진의 솔직한 대답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여태 개개인의 문제 해결에만 몰두했지, 이런 식으로 주변에 영향을 끼칠 거란 점은 생각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고민에 휩싸였다.
‘혹시 지금이 타이밍인가?’
다름 아닌 백유진에게 분광십삼뢰를 전달하는 타이밍에 관한 고민이었다.
완벽한 적기라곤 할 수 없었지만, 잘하면 원하는 대로 대화의 흐름을 만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애매한데. 성급한 것 같기도 하고.’
확신이 서질 않았다.
이대로 답변을 보류하는 것도 이상한 까닭에 나는 우선 간을 보기로 했다.
“심인욱이나 오윤서에게 거창한 도움을 준 기억은 없긴 한데.”
“흐음, 그래?”
“방금 가상 전투의 감상을 묻는다면, 그 정도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게 궁금한 것도 있고.”
“호오, 뭔데?”
“무공 정도려나. 살짝 이질감이 느껴져서.”
내 대답에 순간 백유진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서렸다.
웃는 낯은 그대로인데,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것이다.
하나 이는 찰나에 불과했다.
“일한이 너, 눈썰미가 좋구나?”
어느새 본래대로 돌아온 표정으로 수긍이나 다름없는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예상보다 시원스러운 백유진의 반응에 나는 살짝 늦게 대답했다.
“보법이나 마나 활용이 그만큼 엄청났으니까.”
“그런가? 뭐, 네 말이 맞아.”
“그래서, 이유를 물어봐도 돼?”
단도직입적인 내 질문에 백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내놓은 대답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건 개인 사정이라고 해 둘게.”
대답을 회피한 것이다.
순간 아쉬운 감정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대화 주제를 바꾸든, 아니면 쭉 밀고 나가든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할 것 같은데.’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백유진.”
가상 전투실 입구 쪽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 당사자인 백유진은 물론, 나 또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처음 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묘하게 백유진과 닮은 느낌인데.’
체격이나 목소리, 그리고 표정까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점이 많았으나, 어째선지 그런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백유진을 곁눈질했다.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
나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그만큼 백유진이 풍기는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늘상 웃으며 여유를 풍기던 분위기가 아니라, 어딘가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일한아, 먼저 갈게. 저 사람하고 볼 일이 있어서.”
백유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백유진은 그대로 정체 모를 청년과 함께 가상 전투실을 벗어났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사라지고 나서야 의문을 떠올렸다.
‘혹시 가족, 그러니까 형제인 건가?’
만일 그렇다면 방금 본 청년이 바로 백유진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람일 터였다.
거기까지 사고가 닿는 순간 또 다른 고민에 휩싸였다.
‘……따라가서 지켜봐야 할까?’
조금 전 백유진과의 대화가 그랬듯, 현 상황도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잇달아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지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졌다.
‘엿듣다가 들켰을 때 변명할 거리가 마땅치 않은데.’
쉽게 가닥이 잡히지 않는 가운데.
일단 입구 쪽으로 다가가 바깥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없네.”
한발 늦은 모양이었다.
이미 두 사람은 씻은 듯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려나.’
하나부터 열까지,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따지자면 나쁘지 않았다.
내가 구상해 둔 계획에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백유진의 무공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한 가지 득이 된 부분이 있었다.
‘이미 무공에 관하여 한 차례 이야기를 나눴으니, 차후에 언급해도 마냥 부자연스럽진 않겠지.’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의문을 곱씹으며 기숙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연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 * *
비슷한 시각.
“어디까지 갈 셈이지?”
백유진은 말없이 앞서가는 청년, 가족이자 둘째 형인 백유성을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하나 백유성은 무시로 일관했다.
그는 용맹관을 벗어나 건물의 뒤뜰에 이르렀을 때가 되어서야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굳은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가문에서 사람이 올 거다.”
느닷없는 말에 백유진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는 천천히 되물었다.
“수행평가 말이지?”
백유성은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제 할 말을 내뱉었다.
“숙부도 오실 거고, 가문의 구성원들도 오겠지. 게다가 다른 가문, 다른 길드의 사람들도 와서 지켜보는 자리다.”
“그래서?”
일방통행에 가까운 백유성의 화법에도 백유진은 웃는 낯으로 응했다.
그러나.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거든, 오늘 밤에라도 당장 가전무공을 체득해라.”
백유성은 으르렁거리듯, 명령조에 가까운 말로 되돌려줬다.
시종일관 위협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백유성.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는지, 백유진의 표정에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잠깐의 침묵 끝에 백유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추태라고 생각…….”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익-!
백유성이 별안간 주먹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