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또 재밌는 걸 가져왔구나
시리도록 투명한 백은색의 마나.
두 주먹에 휘감긴 마나를 보는 순간,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게 바로 혼원현천신공…….’
색채의 선명함은 물론, 이전의 은회색 마나보다 한층 순수한 느낌이었다.
출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잉!
소용돌이치는 듯한 외견부터, 맹렬하게 회전하는 소리까지.
기존의 현천강기에서 비롯된 마나도 상당히 강력했지만, 눈앞의 혼원현천신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과연 S급 스킬인가.’
단순히 마나를 외부로 사출하는 것만으로도 변화가 피부로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실제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호기심이 강렬하게 피어오르는 한편,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위력을 파악하는 건 힘들겠지?’
정확히는 파악하는 데 있어 난점이 존재했다.
위력이 수치화되어 나타나는 게 아닌 까닭이었다.
때문에 나는 다른 부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나 소모량이나 신체 능력의 상승 폭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정도만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어도 내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생각을 정리할 무렵.
케룩-!
고블린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순수하게 육탄전을 벌일 생각으로 지면을 박찼다.
타닷-
그대로 녀석에게 짓쳐들어 일권을 내질렀다.
백은의 마나를 휘감은 주먹이 녀석에게 꽂히는 순간.
“……!”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백은으로 물든 주먹이 고블린을 말 그대로 갈아 버렸기 때문이다.
쐐애애액-!
고블린이 육편이 되어 갈리는 광경에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위력이 발휘됐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위력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파괴력의 바탕까지도 금방 알아차렸다.
‘분명 현천강기를 바탕으로 호신을 발휘할 때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한 느낌인데.’
다름 아닌 반발력.
현천강기 특유의 능력이 마나의 유형화 단계에서 발휘된 것이다.
‘설마 혼원공의 특징도 포함되어 있으려나.’
생각만으로 기분 좋은 가능성을 떠올리는 한편.
서서히 소멸해 가는 고블린을 바라봤다.
‘마나 소모량이나 무공 테스트는 다수를 상대로 해 봐야겠네.’
어쩌면 한두 번의 실험으론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상관없을 듯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차근차근 데이터를 쌓아 나가면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며 설비를 조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섯 마리의 고블린이 나타났다.
케룩-!
키에엑!
녀석들은 소름 끼치는 울음을 토해내며 꺼드럭거렸다.
나는 다시금 마나의 유형화를 이루며 생각했다.
‘복마구권부터 차근차근 시험해 보자.’
결정을 내린 즉시 녀석들을 향해 쇄도해 갔다.
…
…
…
30분 후.
‘이 정도면 기존의 무공 활용 데이터는 충분하겠지?’
대략 6번에 걸친 가상 전투 끝에 만족할 만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복마구권.
마를 굴종시킨다는 명칭답게, 상당한 위력을 자랑했다.
이는 단순히 파괴력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복마구권의 발동과 함께 흘러나오는 기운에 고블린들이 전투 시작 전부터 위축되는 것이다.
‘물론 심인욱의 패왕진군보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실전에서 충분히 위력적일 터였다.
이는 탈혼지도 마찬가지였다.
효과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여전히 구명절초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내게 있어 절초이자, 회심의 한 수라 할 수 있는 무영귀살각.
무영귀살각은 예상대로 절륜한 위력을 발휘했다.
단 한 번의 참격으로 단숨에 세 마리를 참살할 정도였으니, 절초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무영귀살각을 실험할 땐 위력보단 마나 소모량에 집중했다.
그 결과 혼원현천신공의 정체성을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유 계열의 지속력과 강 계열의 폭발력을 두루 갖췄다고 보면 되겠지.’
덕분에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마나 소모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게 나는 무공의 데이터를 쌓고 나서야 다음 과제로 신경을 돌렸다.
다름 아닌 그림자 녀석이 전해 준 새로운 무공이었다.
‘우선 일대일 상황에서 연습해 보자. 마나 활용은 신체 강화와 호신까지만 사용하면 되겠지.’
마나의 유형화를 사용했다간 전투가 너무 빨리 끝나는 까닭이었다.
결정을 내린 즉시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자세를 취하는 사이, 고블린이 내게 달려들었다.
키에에엑!
간격이 빠르게 좁혀지는 가운데.
녀석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이밍에 맞춰 오른손을 뻗었다.
동시에 머리로는 끊임없이 그림자 녀석이 선보인 동작을 떠올렸다.
‘여기서 상대의 호흡을 끊어내듯이…….’
비스듬히 세운 손날을 그대로 내리갈겼다.
건틀렛을 착용한 덕분인지.
콰직-!
소리만큼이나 손맛도 확실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기억 속 동작과 실제로 구현한 동작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녀석이 선보인 동작들은 하나같이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을 줬다.
반면 내가 재현한 동작은 어딘가 경직됐고,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 느낌이었다.
결정적으로.
키에에엑!
손날에 가격당한 고블린은 잠시 주춤했을 뿐.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괴성을 내지르며 반격해 왔다.
‘일단 이것부터 처리하자.’
녀석의 반격을 아슬아슬하게 흑영보로 피해내는 한편.
계속해서 연습에 임했다.
그렇게 녀석과 수 분간 합을 나눴으나 생각보다 진척이 더뎠다.
‘……뭐가 문제지?’
궤적을 틀어 보고, 타이밍을 달리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괴리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심지어 혼원현천신공을 바탕으로 한 신체 강화의 효과 때문인지.
케룩……
원하는 데이터를 얻기도 전에 순수하게 구타로 녀석을 때려눕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피거품을 물며 소멸해 가는 녀석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다수를 상대로 연습이 가능하려나?’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다음 전투로 넘어갔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오히려 연습은커녕, 녀석들의 엉성한 연계로 인해 수세에 몰리기까지 했다.
그 탓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실험을 단념하고, 녀석들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민이 들었지만 일단 뒤에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서 시뮬레이션 룸을 빠져나왔다.
다시 줄을 서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애송이, 또 재밌는 걸 가져왔구나.”
바로 근처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고태식 교관이었다.
아무래도 여태까지 나를 지켜본 모양이었다.
‘피드백을 주시려는 건가?’
고태식 교관의 의도를 헤아리며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지만 수공(手功)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그로부터 날카로운 피드백이 흘러나왔다.
“그럼 어떻게 연습하면 되죠?”
“어디 한번 배워 볼 테냐?”
“가르쳐 주신다면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그럼 방과 후에 2층 소훈련실로 와라.”
그의 말은 곧 개인 교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 녀석에게 물어볼까 싶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요령이 없다고 해야 할까.
이제 와서 새삼 느꼈지만, 녀석에겐 타인을 가르치는 재주가 다소 부족했다.
무엇보다 가타부타 설명 없이 동작을 주입하려 드는 점부터가 그랬다.
반면 고태식 교관은 달랐다.
‘무지막지하다는 점이 흠이긴 하지만.’
효과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방과 후라. 그나저나 장법이 아니라 수공이었구나.’
나는 고태식 교관의 설명을 속으로 곱씹어 보는 한편.
기대 반 떨림 반으로 방과 후를 기다렸다.
* * *
방과 후.
“일한이, 저녁은 안 먹나?”
“먼저 먹어. 고태식 교관님께 상담받을 일이 있어서.”
나는 임강철에게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한 다음, 곧바로 2층 소훈련실을 향해 갔다.
덕분에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자 오래지 않아 고태식 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변함없이 성실한 애송이로군. 그 점은 마음에 들어.”
그는 입가를 비틀며 다가왔다.
동시에 어깨를 돌리거나 연신 손목을 풀더니,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수공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나?”
“손을 활용하는 무공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거의 모른다는 뜻이군.”
고태식 교관의 단호한 평가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수공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이를 고려해 고태식 교관은 곧장 실전 대련을 진행하는 대신.
“개념 자체는 그게 맞다. 수공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손을 주로 활용하는 무공이지.”
수공에 관한 설명을 진행했다.
“체득 방법은 여타 무공과 동일하다. 그럼에도 네 녀석이 실패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수공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수공의 본질, 용도, 목적.
확실히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보아하니 동작만 겉핥기식으로 따라 하던데. 이번에도 특성을 통해 얻은 거냐?”
“네.”
“그래서 그렇게 무식하게 연습을 한 거로군.”
고태식 교관의 가차 없는 평가에 나는 찔끔했다.
실제로 연습하는 내내 무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탓에 더더욱 그랬다.
그는 혀를 짧게 차며 설명을 이어 갔다.
“어떤 무공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수공의 가장 큰 특징은 공방 일체라 할 수 있다.”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성립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특징을 담은 초식이 주를 이루지.”
공방 일체.
그제야 내 연습 방식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깨달았다.
실제로 나는 수공을 연습할 당시, 공세에만 집중했다.
방어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런 내 속내를 읽은 양, 고태식 교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킬의 체득이란 곧 무공의 각 초식의 쓰임새, 묘리를 이해하고 숙달하는 거다. 이건 기억하고 있겠지?”
“네. 결국 저는 공격과 방어,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만 파고든 셈이네요.”
“정확하다, 애송이. 영 돌머리는 아니구만.”
거친 말투와는 다르게 고태식 교관은 만족스럽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대충 자세를 취하며 내게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올바른 연습법을 가르쳐 주지. 그 전에 먼저 제대로 된 수공을 보여 주마. 애송이, 네 녀석이 가진 복마구권으로 나를 공격해 봐라.”
“공격 말씀이신가요?”
“그래. 마나는 일단 신체 강화 정도로만 사용하도록.”
고태식 교관의 느닷없는 지시에 순간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기를 수 초, 뒤늦게 그의 의도를 깨달았다.
‘시범을 보여 주시려는 거구나.’
그제야 나는 망설임 없이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코어를 활성화시켜 신체를 강화하는 한편, 고태식 교관을 향해 힘있게 주먹을 내질렀다.
휘익-!
고태식 교관은 내 주먹이 지척에 이를 때까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그의 가슴팍에 작렬하나 싶은 순간.
스윽-
고태식 교관의 왼손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마치 뱀처럼 교묘한 궤적으로 내 주먹을 휘감더니.
탁-!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내 주먹의 궤도가 엄한 곳으로 뒤틀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왼손이 내 목젖을 향한 채였다.
“……!”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 펼쳐진 동작에 눈이 저절로 커졌다.
고태식 교관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나에게서 한걸음 물러나며 입가를 비틀었다.
“이게 바로 수공이다.”
“……대단하네요.”
“더 재밌는 걸 보여 줄까?”
고태식 교관은 또다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는 나와 충분히 간격을 두고 나서야 자세를 취했다.
이내 그의 양손에 황금빛 선명한 마나가 일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그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애송이,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라. 그래야 편린이나마 볼 수 있을 테니까.”
거친 목소리가 그치는 것과 동시에.
파직-!
황금빛 섬전이 기묘한 궤적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