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지금부터 두 가지를 알려 주지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셋째 주 금요일이 찾아왔다.
오윤서는 오윤진과의 만남을 앞두고 저녁 무렵에 나를 호출했다.
미리 외출 허가도 받아놨는지, 떠날 채비까지 갖춘 모습이었다.
나는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시간은 기억하고 있지?”
“……어, 새벽 5시잖아. 누가 범죄자 아니랄까 봐, 새벽에 만나자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오윤서는 괜히 투덜거리며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왠지 그녀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오윤진과의 만남을 걱정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되나?”
오윤서는 내 물음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말없이 떠났는지.
과연 언니의 사정을 알게 됐을 때, 그걸 자신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오윤서의 눈빛으로부터 혼란스러운 속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반면 나는 침착했다.
오윤서와는 달리 나는 두 사람의 사정이나 심정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대화가 제대로 안 풀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나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녀를 다독여줄 요량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을 거야. 차분하게 사정을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걸로 충분해.”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런 일념으로 오윤서를 다독여줬다.
다행히 내 격려가 도움이 됐는지.
“……잘난 척하기는.”
오윤서는 평소에 가까운 어조로 툴툴거리며 돌아섰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
나는 그대로 멀어져가는 오윤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남은 건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부디 변수가 없기를.
그렇게 바라며 나도 몸을 돌렸다.
* * *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다름이 아니었다.
‘과연 대화는 잘 끝났을지.’
오윤서와 오윤진, 두 사람의 만남.
대화는 새벽에 이뤄졌을 테니, 지금 쯤이면 이미 끝났을 것이다.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지.
‘오윤서가 아카데미로 돌아와야 알 수 있으려나.’
그런 의문을 떠올리는 찰나.
때마침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
곧바로 확인해 봤지만 발신인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번호도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기울이다가 불현듯 그림자 녀석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오윤진, 그 사람이 보통 이런 식으로 연락을 준다고 말했었지.’
떠올린 순간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림자 녀석은 몰라도, 내가 그녀와 제대로 대화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까닭이었다.
나는 스마트 워치를 조작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나야, 오윤진.
스마트 워치에서 성숙한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조가 평이한 까닭에 목소리만으로는 대화의 결과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직접 물어봤다.
“오윤서와의 대화는 잘 풀리셨나요?”
-그럭저럭, 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저나 너, 갑자기 웬 존댓말?
오윤진의 반문에 나는 순간 뜨끔했다.
그녀의 뉘앙스로 보아 그림자 녀석은 여태까지 반말로 대화에 임한 모양이었다.
깨달은 순간.
‘……이런 경우없는 녀석 같으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와중에 오윤진이 화제를 돌렸다.
-뭐, 아무튼. 윤서를 만나는 데는 별문제 없었고, 네 덕분에 오해도 풀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녀로부터 원하는 대답이 흘러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오윤진은 이를 듣지 못했는지, 별다른 내색 없이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윤서의 생각이나 대화를 나눴던 걸 내게 미리 알려 줬던 것도 도움이 됐고.
“그건 다행이네요.”
-일단 네 말대로 환영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괜찮겠니?
이 부분은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머릿속으로 득실을 따져본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네, 당장은 문제없을 거예요. 그 부분은 필요하면 따로 연락을 드릴게요.”
-그래. 여태까지 그랬듯, 네게는 나름의 생각이 있을 테니까. 뭐, 물어봐도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오윤진은 왠지 툴툴거리는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말하는 뉘앙스로 보아 그림자 녀석에게 꽤 맺힌 게 많은 듯했다.
‘하기야, 녀석에겐 특유의 화법이 있으니까.’
시답잖은 생각을 떠올리며 슬슬 통화를 끝내려고 하는 찰나.
오윤진이 머뭇머뭇 한마디를 덧붙였다.
-……뭐, 이번 건 소원으로 치지 않을게. 이번 일은 너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 됐으니까.
“소원, 아.”
-연락 방법은 알지? 필요할 때 연락해.
그 말을 끝으로 오윤진은 통화를 종료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스마트 워치를 조작했다.
‘……좋은 거겠지?’
재앙의 마녀라 불리는 A급 마법사가 들어주는 소원.
어떤 형태로 활용하게 될지는 아직 가늠조차 안 됐지만, 적어도 손해로 작용하진 않을 것이다.
‘시간 봐서 그림자 녀석에게 전해 주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슬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주말 단련을 위해 방을 벗어나는 순간.
“……어? 오윤서.”
복도에서 오윤서와 마주쳤다.
그녀의 행색으로 미뤄봤을 때, 아무래도 오윤진과 대화를 마치고 곧장 아카데미로 복귀한 듯했다.
더욱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으로 보아 내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덤덤하게 시선을 받아내는 사이,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내 그녀는 머뭇머뭇 말문을 열었다.
“……언니와는 별문제 없이 대화했어. 네 덕분에.”
오윤서는 오윤진과 마찬가지로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찾아온 것 같았다.
오윤진을 부르는 호칭이 ‘그 여자’에서 ‘언니’로 변한 것으로 보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듯싶었다.
때문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잘됐네.”
“네가 어떤 식으로 언니와 관계를 맺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일단 고마워. 그리고.”
“그리고?”
“……언젠가 이 빚은 꼭 갚을게.”
그 말만을 남긴 채 오윤서는 곧바로 돌아섰다.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자매라 그런가. 어째 하는 말이 비슷하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남은 일을 머릿속으로 헤아렸다.
‘이제 남은 사람은 백유진 뿐인가.’
다소 막막하게 느꼈던 오윤서의 문제도 잘 해결했다.
이제 백유진의 문제만 해결하면 적어도 그림자가 언급한 이들의 문제는 전부 해결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남은 문제는 한 가지뿐이었다.
‘과연 김한석을 어떤 식으로 저지하게 될지.’
그림자 녀석은 김한석이 2학기 기말 시점에서야 이빨을 드러낼 거라 말했다.
본격적으로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과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내가 직접 그와 맞서야 하는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동시에 새삼스럽게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감정을 느낀 순간.
‘……당장 눈앞에 집중하자. 그림자 녀석에게도 분명 생각이 있을 테니까.’
나는 상념을 떨쳐낼 생각으로 고개를 세차게 털어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더욱이 백유진의 문제를 포함,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수업, 마지막으로 2주 뒤의 수행평가까지.
당장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백유진 문제는 때가 되면 녀석이 알려 줄 테니, 그때까진 수업에 신경 써야지.’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
…
…
그날 새벽.
‘……완성됐다.’
마나 호흡에 몰두하기를 수 시간.
그림자는 깨달았다.
비로소 혼원현천신공이 완성됐음을 말이다.
이제 남은 건 안일한에게 구결을 전하고, 스킬을 습득하는 과정뿐이었다.
녀석에게 구결을 전하기에 앞서 그림자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로써 백유진을 상대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들 중에서 한 가지는 갖춘 셈이다.’
남은 두 가지 조건도 이미 그의 머릿속에 담겨 있었다.
사실상 모든 조건을 충족한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림자는 기억을 더듬는 한편, 계승을 발휘해 잠들어 있는 녀석의 의식을 깨웠다.
‘듣고 있나?’
-어, 말해.
‘너도 알다시피 이제 남은 건 백유진뿐이다.’
-방법이 있는 거지?
‘지금부터 두 가지를 알려 주지.’
-두 가지? 설마 그와 싸워야 하는 거야?
‘비슷하다.’
그림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첫 번째는 혼원현천신공의 구결이다.’
-드디어 마무리됐나보네. 나머지 하나는?
‘그건 직접 보여주는 편이 빠르겠지.’
그림자는 먼저 혼원현천신공의 구결을 전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과 함께 자세를 취했다.
계승을 유지한 채로 펼치면 녀석에겐 꿈의 형태로 전해질 터였다.
‘지금부터 연습하면 수행평가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다.’
말을 마친 즉시 그림자는 허공을 향해 힘있게 손을 뻗었다.
벼락조차 흩어버리는 손짓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점심.
“윤서야, 이쪽!”
백유진의 호출에 오윤서는 식판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에 이어서 심인욱까지 착석하고 나서야 세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백유진이었다.
“그나저나 윤서야. 외출은 잘하고 왔어?”
“으응.”
“다행이네. 며칠 전보다 표정이 좋아 보여.”
“그런가?”
싱긋 웃으며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백유진.
반면 오윤서는 머뭇머뭇 답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심인욱은 문득 오윤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윤서, 그나저나 안일한과 대화는 잘 나눴나?”
심인욱이 느닷없이 안일한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오윤서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 어떻게 알았어?!”
“그 녀석과는 무기술 심화 수업을 같이 듣는다. 대화 정도는 하고 있지.”
심인욱의 무덤덤한 대답에 오윤서는 잠깐 침묵했다.
이내 그녀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걔가 너한테 뭔가 말했어……?”
“네 상태를 물어봐서 대답해 줬을 뿐이다. 그것도 벌써 일주일도 더 된 이야기다. ”
“아, 응. 그렇구나.”
오윤서는 어쩐지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의 대화가 슬슬 끝날 무렵, 백유진이 미소 어린 표정으로 오윤서에게 물었다.
“윤서야 너도 일한이랑 친해진 거야?”
“친하다기보단. 그냥 몇 번 대화를 나눠봤을 뿐이야.”
“흐음, 그렇구나.”
“그, 그보다 이제 곧 수행평가네?”
어째선지 오윤서는 다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다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수행평가를 언급한 것이다.
심인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안 남았군. 이번에는 참관 형태로 진행되니 슬슬 준비할 필요가 있겠어.”
가만히 날짜를 헤아리던 심인욱은 문득 백유진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묘한 기색을 띤 백유진의 표정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분위기가 달랐다.
백유진과 함께한 시간이 제법 오래된 만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수행평가, 아니 길드 참관 때문에 그런 건가.’
이번 수행평가는 길드를 비롯한 거대 단체들의 참관하에 진행된다.
그중에는 신창백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창백가를 떠올리는 순간, 자연스럽게 백유진이 가문에서 받는 취급이 뇌리를 스쳤다.
‘비록 유진이가 천재이긴 하나 가문에선…….’
‘별종’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외부인인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겠지.’
결국 심인욱은 외부인일 뿐이었다.
백유진의 문제는 제아무리 친구라 한들, 그가 참견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심인욱은 적당한 선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식사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