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적어도 목표는 이룬 셈이야
‘기숙사 뒤뜰이라고 했지.’
나는 오윤서가 반강제적으로 잡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방과 후에 바로 기숙사를 향해 갔다.
이동 중에 다시금 미리 구상해 둔 대화를 점검했다.
‘뭐, 구상이라 해봐야 별거 없지만.’
애초에 그림자 녀석이 내게 요구한 부분은 다름 아닌 디테일이었다.
처음엔 잘 와닿지 않았으나, 녀석의 주먹구구식 계획을 듣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다짜고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할 거라니. 요령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터무니없는 계획부터, 어째선지 제 3자인 양 무덤덤하게 설명하는 그림자 녀석의 반응까지.
지적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괜한 심력 소모를 피하기 위해 신경을 돌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디테일에 몰두한 결과 어느 정도 그럴듯한 방법을 떠올렸다.
새삼스럽게 기억을 더듬으며 걷는 사이.
“……안일한.”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오윤서가 다소 흐트러진 상태로 서 있었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는지, 그녀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다른 분들과 면담했을 때 계속 잠들어 있다고 대답한 거, 사실이야?”
“그건 사실이지.”
“……정말 그 여자, 오윤진과 아무런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고?”
오윤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재차 물었다.
나는 이번에는 긍정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내 대답에 그녀는 일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화를 나눴다고?”
“어.”
“잠들어 있었다면서.”
“면담에선 그렇게 대답했어.”
“……지금 나랑 말장난하는 거야?”
싸늘한 어조로 쏘아붙이는 오윤서.
나는 그녀의 반응을 속으로 갈무리했다.
‘역시 당장 해결하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네.’
동시에 나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분명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눴어.”
“무슨 말을 했지?! 그 여자의 목적은 뭐고? 빠짐없이 말해!”
“대신 조건이 있어.”
“……뭐? 조건?”
내 대답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오윤서는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녀의 반응을 하나씩 머릿속에 담아 두며 생각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지금이 바로 구상해 둔 대화의 시작점이었다.
이를 명확하게 인식한 채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첫 번째, 나와의 대화를 비밀로 할 것.”
“……어차피 어디 가서 떠벌릴 생각은 없었어. 그러니까 빨리 말해.”
“두 번째는…….”
“두 번째도 있어?! 지금 나랑 장난해?!”
오윤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쏘아붙였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기세였지만, 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해 둔 바를 입에 담았다.
“네 사정을 나한테 전부 털어놓는 것. 일단 이 두 가지가 조건이다.”
“……!”
오윤서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내세운 조건을 조금도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인가.’
애초에 오윤서와 나는 단순히 면식만 있을 뿐.
아는 사이라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여태까지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사를, 그것도 꽤나 심각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라 한다면 누구든 불쾌감을 드러낼 것이다.
바로 지금.
“……네가 뭔데 주제넘게 참견이야?!”
눈앞에서 언성을 높이고 있는 오윤서처럼 말이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때문에 나는 변함없이 무덤덤한 태도로 답했다.
“털어놓을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나도 네게 말해 줄 수 없어.”
“……뭐야!?”
“분노로 가득 찬 상태라면 내 이야기를 듣게 되든, 그 사람과 직접 대면하든.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갈 게 뻔하니까.”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야기를 듣게 되든, 직접 대면하게 되든 의미 없을 거야.”
“뭐? 직접 대면……?”
오윤서는 감정이 격해진 와중에도 ‘대면’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물론 나는 이를 의도적으로 언급했다.
‘연락이 닿는다는 것까진 예상치 못했겠지.’
실제로 오윤서의 동공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
그게 바로 내가 예상한 반응이자, 대면을 언급한 이유였다.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했던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애초에 당사자가 아닌 내가 이 두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관계에서 비롯된 문제는 철저히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하는 법이었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택한 방법은 오윤서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분노에 휩싸인 채 대면시키면 100% 파탄이 나겠지. 하지만.’
만약 오윤서의 마음이 오윤진을 향한 분노 대신, 의문 쪽으로 기울어진다면 어떨까.
그녀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듯, 오윤진에게도 사정이 있었다면?
어째서 오윤진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만일 오윤서가 이 부분에 의문을 갖게 된다면.
그 상태에서 오윤진과 대면하게 된다면.
‘적어도 분노로 가득 찬 상태에서 만나는 것보단 훨씬 나은 결과가 나오겠지.’
어디까지나 결과는 전적으로 두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내게 가능한 것은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것뿐이었다.
이거야말로 그림자 녀석에 내게 바란 디테일이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확신했다.
때문에 나는 오윤서의 마음이 의문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도록.
분노조차 잠시 잊을 만큼 의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도록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실제로 나는 연락할 수단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우연찮게 그 사람의 사정도 듣게 됐지.”
“……!”
“하지만 그걸 지금 네게 알려 줄 생각은 없어. 현 상태로 만나 봤자 우리 셋 다 좋은 꼴은 못 볼 테니까.”
“……으윽!”
오윤서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깨를 부들거렸다.
그러고는 감정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네가 뭔데! 네가 대체 뭐길래 다 아는 척 떠들고 있는 거야?!”
“적어도 너보단 그 사람의 사정을 잘 알고 있지.”
“그러니까 그 잘난 사정이 뭐길래 나한테……!”
오윤서는 감정에 복받쳐 무어라 소리치려다가 별안간 말을 삼켰다.
이윽고 그녀는 험악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봤다.
거기서 나는 직감했다.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야겠네.’
지금 상태에서 더 자극했다간, 그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지금은 오윤서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켰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가급적 빨리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 대화할 준비가 되면 나를 찾아와라.”
“뭘 제멋대로! 난 아직 안 끝났어……!”
나는 오윤서의 외침을 외면한 채 돌아섰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을 찔러 왔지만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기숙사에 들어설 무렵에서야 목소리가 멎었다.
그제야 나는 한숨과 함께 어깨에 힘을 뺐다.
‘두 번은 못 할 짓이네.’
이는 명백히 내 성향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몇 차례는 더 감수해야 할 듯싶었다.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그림자 녀석에게 결과물을 전달했다.
‘일단 오윤서와 대화는 텄어.’
…
…
…
비슷한 시각.
오윤서는 기숙사를 향해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간 즉시 침대 한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내 그녀는 자연스럽게 조금 전 안일한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여자한테도 사정이 있다고?’
하나뿐인 자매이자, 동경했던 언니.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가 그녀와 가족을 저버린 사람.
그게 바로 오윤진이었다.
새삼스럽게 이를 떠올린 순간, 오윤서는 무의식적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대체 얼마나 잘난 사정이길래……!’
가족을 저버리고, 자신을 저버린 건지.
그것도 모자라 뒷세계에서 빌런으로 활동하며, 뻔뻔하게 낯짝을 드러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한편, 미치도록 궁금했다.
생각할수록 용서가 안 됐지만 그만큼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무엇보다 어렸을 적, 상냥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더더욱 그랬다.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을 떠올린 오윤서는 일순 고개를 세차게 털어냈다.
그러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반드시 알아내고 말겠어.’
* * *
처음 오윤서와 대화를 나눈 이후.
그녀는 이틀 내리 나를 찾아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화는 첫날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여전히 그녀는 공격적이었고, 나는 의연하면서도 단호하게 내 입장을 고수했다.
그로 인해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4일째 되는 날.
“……정말 내 사정을 말하면 만나게 해 줄 거야?”
방과 후에 만난 오윤서는 기세가 한풀 꺾인 모습으로 내게 물었다.
목표했던 대로 그녀의 감정 상태가 분노에서 의문으로 완전히 넘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두 가지 조건을 지켜준다면.”
“비밀로 하고, 내 사정을 얘기하라는 거지.”
“어.”
“……알겠어. 그 대신 짧게 할 거야.”
오윤서는 머뭇거리면서 천천히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본래 오윤진은 상냥한 언니였으며,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점부터.
아카데미 입학 후 눈에 띄게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점.
그리고 졸업도 하기 전에 빌런으로 타락했다는 점까지.
대부분 그림자 녀석에게 들은 내용과 일치하는 가운데 딱 한 가지, 처음 듣는 내용이 있었다.
‘나이 차 때문에 오윤진의 아카데미 생활 자체를 거의 모르고 있었구나.’
그림자 녀석에게 듣기론, 오윤진과 오윤서는 9살 터울이었다.
어린 시절에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오윤서는 내 생각 이상으로 오윤진에 관해 무지했다.
그로 인해 그녀의 마음속 상처가 속절없이 곪아가던 와중에 게이트 침식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 터져 버린 것이다.
이전에 오윤서가 병실에서 이성을 잃고 나를 추궁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인 듯했다.
‘역시 이런 건 두 번은 못 할 짓이야.’
그녀의 사연에 새삼스럽게 부담을 느끼는 한편.
슬슬 오윤서와의 대화도 끝이 보이는 듯했다.
‘다행히 생각대로 풀린 것 같으니까.’
말하는 뉘앙스나 풍기는 기세로 보아 오윤서의 감정은 확실히 의문 쪽으로 기울었다.
이젠 진짜 오윤서와 오윤진, 두 사람의 몫이었다.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을 겸,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다.
“내일까지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 줄게.”
“……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말해 준다면서.”
“그건 직접 듣는 편이 좋을 거야.”
그림자 녀석의 말에 따르면 게이트 침식 사태 당시.
오윤진은 딱히 오윤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즉, 그녀와 나눴다는 대화는 블러핑에 가까웠다.
때문에 나는 오윤서에게 대충 얼버무리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속으로 그림자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오윤서와의 대화도 끝났어.’
-결과는?
‘적어도 목표는 이룬 셈이야. 나머지는 오윤진에게 달렸지.’
-역시 능숙하군. 수고했다.
그림자는 무덤덤한 어조로 치하의 말을 건네왔다.
능숙하다는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으나, 일단 할 말을 마저 이어 갔다.
‘능숙은 무슨. 오윤서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알려 줄 테니, 그 사람에게 전해 줘. 그리고 나머지는 맡길게.’
-알겠다.
녀석의 대답을 끝으로 대화를 마쳤다.
슬슬 기숙사로 걸음을 옮기는 한편, 남은 일들을 속으로 헤아렸다.
…
…
…
그날 밤.
그림자는 깨어난 즉시 오윤진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에게 안일한의 전언을 전달하며 접선을 시도한 것이다.
오윤진은 한참을 침묵한 끝에.
-……다음 주 토요일 새벽 5시. 접선 장소는 따로 전해 줄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